세상에서 어쩌면 가장 잔인한 복수는 그로 하여금 후회하게끔 만드는 것일 게다. 육체에 남기는 상처는 유효기간이 있다. 억울함이나 분노 역시 시간이 흐르면 희석된다. 그러나 후회는 아니다. 이제는 모두 잊었다 싶은 순간 어느새 깨어나 다시금 영혼에 상채기를 남긴다.
부모가 자식과 싸우기를 포기한 순간 그는 이미 부모이기를 포기한 것이다. 그것은 증오이거나 유기이거나 혹은 맹목일 것이다. 맹목과 유기는 같은 것이다. 더 이상 아무런 고민도 판단도 하려 하지 않는다. 방치하여 스스로 후회하도록 내버려둔다. 부모가 자식에게 화를 내는 것은 사랑해서이고, 자식과 싸우려 드는 것은 후회를 남기지 않기 위해서다. 자신을 위해서든 자식을 위해서든.
순간 조금은 화가 나려 했다. 얼마나 어리석은 모정인가? 하지만 그렇게 살 수밖에 없는 사람도 있는 것이다. 그렇게 서툴다. 화가 치밀어 오르도록 답답하기만 하다. 그러니 그런 뻔한 사기에도 번번이 당하며 아들을 곤란한 지경에 빠뜨리곤 하는 것이다. 영악하게 세상을 사는 법을 배우지 못했기에 그렇게 서툰 방식으로밖에는 자식을 사랑하지 못하는 것이다. 영악하게 세상을 살지 못하는 사람은 자식을 대하는 것조차 영악스럽지 못하다.
오해였다고 했다. 아버지가 갑자기 병원에 실려가고, 다시 수술도중 시체가 되어 실려나오고, 혼란스런 와중에 이강훈(신하균 분)의 기억 역시 혼동이 있었던 모양이다. 딸 이하영(김가은 분)을 임신하고 있을 때 남편이 그를 의심하여 상습적으로 폭력을 휘두르고 있었다고 했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아이를 지키기 위해 집을 나가야만 했다. 거기에는 이강훈 역시 동의하고 있었다. 어머니가 몸을 피하도록 이강훈이 나서서 아버지의 폭력에 자신을 내던지고 있었다. 그러나 이후 이강훈이 기억하는 것은 아버지가 죽고 임신하여 배가 불룩한 채 돌아온 어머니의 모습이었다.
일찌감치 오해가 풀렸더라면 이강훈도 조금은 편할 수 있었을 텐데. 마음 편히 어머니를 걱정하고, 어머니를 위해주고, 어머니에 의지할 수 있었을 것이다. 아니 반대였을까? 어머니에 대한 분노가 아니었다면, 그래서 더욱 어머니와의 사이에 벽을 만들고 자신을 다그치지 않았다면 그 어려운 환경에 이강훈이 지금의 자리에까지 이르지 못했을지도 모르겠다. 지금의 이강훈의 위치란 증오이든 분노이든 끊임없이 자신을 다그치고 채찍질하며 이를 악물고 마침내 스스로의 힘으로 이루어낸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조금은 더 행복할 수 있지 않았을까?
어쩌면 이강훈이 장유진(김수현 분)도 윤지혜(최정원 분)도 온전히 받아들이지 못하는 이유가 거기에 있는지도 모르겠다. 부모에 대한 기억이야 말로 인간이 태어나 가장 처음 접하는 이성에 대한 경험일 것이기 때문이다. 어머니로부터 버림받았다고 생각했다. 아버지와 함께 어머니에게 배신당했다고 생각했다. 차라리 증오라도 할 수 있었으면 좋았으련만 그럼에도 이강훈은 어머니를 연민하고 말았다. 증오할 수조차 없는 믿을 수 없는 대상이란 공포에 불과하다. 두렵다. 과연 그로부터 배신당하지 않고 버림받지 않을 수 있을까.
그러고 보면 고재학(이성민 분)의 배신에 대해 이강훈이 유독 민감하게 반응한 것도 어느 정도 이해가 되려 한다. 그는 이미 어려서 어머니로부터 버림받았다. 배신당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믿고 의지하고 있던 고재학으로부터도 버림받고 배신당했다. 그것은 이강훈에게 트라우마였을 것이다. 역린을 건드린 것이다. 더욱 이강훈은 천하대학병원을 그만두어가면서까지 완고한 벽으로 자신을 두르고 안으로 잠겨들어간다. 그의 강퍅함은 그로부터 비롯된 것일 게다.
결국 그래서 이강훈은 자신의 자존심을 꺾고 만다. 아직도 확신이 있다. 의신대에서 당시 아버지를 수술하여 죽게 만든 것은 바로 눈앞의 김상철(정진영 분)이다. 하지만 이대로 어머니를 죽도록 내버려둘 수 없다. 어머니로 인해 쌓아 올린 단단한 벽이었기에 어머니로부터 진실을 듣는 순간 한 순간에 힘없이 허물어지고 만다. 그 비통함과 억울함. 그럼에도 그리 할 수밖에 없는 절박함. 김순임(송옥숙 분)은 마지막 순간까지 아들에게 주었던 것을 다시 가지고 가려 하고 있다.
솔직해진 것이다. 그래서 더 두렵다. 차라리 전처럼 두터운 벽이라도 두르고 있으면 어떻게든 자기 자신마저 속이며 버틸 수 있으련만. 그래서 저주라 하는 것이다. 이제와서 밝혀진 진실들로 말미암아 이제 이강훈의 영혼은 크나큰 죄책감과 후회로 온통 상처투성이가 되어 너덜거릴 것이다. 어째서 오해했던가? 어째서 잘 알지도 못하면서 제멋대로 오해하고 그로 인해 어머니께 상처를 주어 왔던가? 한 번 제대로 마음으로 위해 준 적조차 한 번도 없다. 어머니의 일방적인 사랑과 이강훈의 일방적인 거부만이 있었을 뿐이었다. 그런데 이제 떠나려 한다고 한다.
참 잔인한 것이다. 어머니나 작가나. 어머니의 무지와 맹복도 작가의 이강훈 괴롭히기도. 하기는 그래서 드라마다. 그렇게 후회를 남기고, 미안하다고 잘못했다고 제대로 마음을 전할 틈도 없이 어머니는 떠나려 한다. 이제까지의 잘못을 만회할 기회조차 주지 않고 어머니는 이대로 떠나려 한다. 자식이 효도하려 할 때는 부모는 이미 그 자리에 없다 하더니만. 아마 이후 그것은 이강훈에게 큰 상처가 되리라. 그리고 어떤 계기가 되어줄 것이다. 무엇인가는 작가만 알 것이다.
과연 김상철은 이강훈의 아버지를 수술했던 그 의사인가? 확률은 매우 높다. 김상철은 부정하지만 이미 혜성대학의 안동석 학과장이 의신대에서 당시 젊은 시절의 김상철을 본 적이 있었다. 이강훈도 그로부터 전해들었다. 그리고 혜성대학병원에 입원해 있는 김신우로부터도 확인받고 있었다. 처음부터 이강훈이 김상철을 의심했던 것도 아니었다. 그렇다면 어째서 김상철은 극구 부인하며 도리어 이강훈을 의심하는 듯한 말을 하는가?
첫째는 어쩌면 의사로서의 자신의 커리어에 위협이 될 지도 모르기에 의도적으로 은폐하려 하고 있다. 이미 오래전 일이고, 은사인 김신우의 도움으로 증거란 하나도 남아 있지 않은 상태다. 이강훈만 이상한 사람으로 만들면, 그래서 이강훈에게 미움을 받아봐야 어차피 천하대학병원에서 이강훈의 자리는 없다. 아니 대한민국 의학계 어디에서도 김상철이 아닌 이강훈의 말을 믿어줄 사람은 없다. 이 경우 김상철은 철저히 위선자가 되며, 이후의 드라마는 이강훈과 김상철의 대결로 흘러갈 수 있다. 김상철의 병은 어쩌면 김상철과 이강훈이 대화합하는 결말을 위한 복선일 것이다. 김상철은 잘못을 인정하고, 이강훈은 김상철을 위해 메스를 든다.
아니면 김상철이 자주 호소하는 두통에 그 비밀이 있을 것이다. 과거에 겪었던 어떤 사건이나, 혹은 지금 앓고 있는 병으로 인해 벌써부터 기억에 장애가 오기 시작했다. 다만 눈앞의 연구에만 몰두하고 있기에 그러한 과거의 기억에 대한 장애를 김상철은 잘 인지하지 못하고 있다. 이 부분은 의학적 지식이 부족하기때문에 무엇이라 말하지 못하겠다. 김상철이 진실을 말하고 있다고 가정했을 때 그 감추어진 진실을 마주하는 것이 대미의 열쇠가 되리라.
물론 당시 이강훈의 아버지를 수술했던 의사가 김상철이 아니었다는 가정도 한 번 쯤 해 볼 필요는 있다. 하지만 그럴 경우 너무 허무해진다. 그럴 것이면 굳이 안동석의 입을 빌어 김상철이 의신대에 있었다는 단서를 흘릴 까닭이 무엇이고, 김신우까지 등장시켜 김상철의 이름을 거론하도록 할 것은 무엇인가? 괜한 수고이고 노력일 것이다. 차라리 오해하기까지의 과정을 단순화시키고 오해를 풀어가는 과정에서 노력을 쏟아붓는 쪽이 이야기의 완성도를 높인다.
어쨌거나 결국 김상철에게 아버지의 죽음에 대한 진실을 밝히고 그 책임을 묻겠다던 이강훈의 다짐은 결국 어머니 김순임의 병으로 말미암아 좌절하고 만다. 그 곧던 무릎이 굽혀졌다. 여전히 머리에 맴도는 진실마저 부정했다. 당시 아버지를 수술했던 의사는 김상철이다. 그러나 어머니를 살리기 위해 그 모든 것을 부정하고 스스로 무릎을 꿇어 사정한다. 의사란 어째서 권력일 수 있는가? 사람의 생명이 바로 의사의 손에 달려 있는 까닭이다. 반드시 그를 죽이겠다 마음먹은 것도 아닌데, 죽을 사람을 살릴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다는 것만으로 그는 권력이 된다. 설마 굳이 그 상황에서까지 과거이야기를 하며 이강훈을 굴복시킨 것도 김상철이 의도한 바인가?
서준석의 이강훈에 대한 견제는 더욱 심해질 듯하다. 이강훈이 진행하던 논문에 대해 자기 식대로 더 진행시켜 보았지만 고재학으로부터 심한 소리나 겨우 면했을 뿐이다. 미국 명문대 유학까지 포기해가며 천하대에 남도록 한 당사자인 윤지혜는 그의 그런 마음은 전혀 몰라주고 이강훈만을 바라보고 있는 중이다. 열등감과 질투는 인간이 갖는 감정 가운데 가장 지저분하면서도 가장 강력한 감정일 것이다. 두 사람의 갈등이 비로소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것일까?
장유진이 정말 애처롭다. 처음에는 그저 제멋대로인 재벌가의 숨겨진 딸로만 여겼는데, 그런데 갈수록 그녀의 진심에 지켜보고 있는 마음마저 움직인다. 단지 이강훈과 함께 있고 싶다는 욕심으로 사기당한 것을 알고서도 비행기 시간까지 감추고 있고, 그러면서도 정작 더 이상 거짓말을 하고 있을 수 없이 미국으로 떠나기 전 그 사실을 털어놓는다. 이미 오래전에 그것이 사기였다는 사실을 알았다는 고백과 함께. 이강훈의 어머니의 병을 알고 바로 아버지를 찾아가 철없이 떼를 쓰고, 그렇게 이강훈과 미국으로 가려던 계획이 틀어지자 눈물로 아버지에게 투정을 부리고. 어떻게 하면 이렇게까지 어린아이같아질 수 있을까?
지금에 와서는 만일 장유진이 아닌 윤지혜라면 이야말로 재벌가의 딸이라는 이유로 역차별하려는 것이라고밖에는 달리 설명할 수 없다. 윤지혜는 장유진처럼 모든 것을 내던지며 사랑하지 않는다. 어린아이처럼 펑펑 울지도, 자존심 다 팽개치고 매달리지도 않는다. 드라마가 없다. 순수할지는 모르지만 드라마적인 재미는 없다. 기껏해야 서준석의 존재 정도일까? 아마 앞으로 서준석의 관계가 윤지혜와 이강훈의 관계를 정의하게 될 지도 모르겠다. 아직까지는 장유진 쪽이 훨씬 존재감이 있다. 물론 결국 마음이란 흘러가는 길이 곧 원래의 길이겠지만 말이다.
참 이렇게까지 수난이 끊이지 않을 수 있을까? 마치 작가가 이강훈이라는 이름을 가진 누군가에 원한을 가지고 글을 쓰려는 것처럼. 물론 신하균의 연기가 되니 가능한 것이다. 신하균의 존재감이 그 모든 것을 감당해낸다. 울 것만 같은 다부짐과 상처입은 독기와 자신만만한 외로움을. 그리고 끝내 모든 것을 버리고 자신을 내던져 무릎을 꿇을 때에도. 신하균의 눈으로 드라마를 본다. 어느새 드라마를 보고 있는 자신이 신하균이, 아니 이강훈이 되어 있다.
시련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어머니는 그리 오래 살 지 못할 듯하고, 이번의 약속으로 말미암아 그는 꼼짝없이 김상철의 지시를 들어야 할 테고, 여전히 삶은 외롭고 고단할 것이다. 언제쯤 이강훈은 진심어린 밝은 웃음을 지을 수 있을까? 그것을 기대하게 된다.
동정하고 연민하고, 그러면서도 그 뛰어남을 동경한다. 그리고 그 뛰어남이 순리대로 인정받고 성공으로 이어질 수 있기를 기대한다. 꿈일 것이다. 드라마란 판타지다. 멋진 캐릭터 아닐까? 멋진 이야기일 것이다. 드라마는 그래서 존재한다. 몰입해 보는 이유일 것이다. 재미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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