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

천일의 약속 - 우리가... 닮았어요?

까칠부 2011. 12. 13. 08:24

사실 아직까지도 이 대한민국이라는 나라에서 여성이 혼자, 더구나 아이까지 데리고 살아간다는 것은 그리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아니 대부분의 사회에서 마찬가지일 것이다. 이미 결혼까지 했던 여성이 아무런 기술도 학벌도 없이 할 수 있는 일이란 도대체 무엇이 있겠는가?

 

그래서 여성에게 결혼이란 생존을 위한 수단이기도 했다. 그래서 조선시대에도 그 엄격한 정조관념 아래에서도 가난한 여성들은 남편이 죽거나 하면 바로 며칠만에 새로운 남자를 만나 결혼하는 뜻밖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기도 했었다. 그것이 아마도 서양인이 보기에도 정조관념과는 거리가 먼 행동으로 보였던 것인지 비난하는 듯한 어조로 기록된 것이 있다.

 

하기는 유럽도 마찬가지였다. 재혼할 상대를 구하지 못한, 더구나 자식으로부터도 부양받지 못하는 미망인에게 허락된 일자리란 제한되어 있었다. 부모나 남편으로부터 팔려온 경우가 아니라면 대부분 유럽의 사창가를 채우고 있던 것은 일자리를 구하지 못한 그같은 미망인들이었다. 결혼을 통해 자신의 일생을 팔거나, 아니면 하룻방 성을 팔거나. 굳이 결혼이라는 제도와 매춘을 비교하는 과격한 이론에 한 마디 더하고 싶지는 않다.

 

"나 하나 없어지면 느이 둘 고모가 밥은 먹여주겠지..."

 

어떻게 할 것인가?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어떻게 앞으로 살아갈 것인가? 차라리 죽을 용기조차 없었다. 차라리 함께 죽을 용기조차 없이 그래도 세상을 살아가야 한다. 그래서 겨우 의지할 남자를 구했지만 그는 아이들까지 떠맡을 생각이 없다고 한다. 우리나라 드라마에서 흔한 소재 가운데 하나다. 새로운 삶을 위해서 아이를 버리고 맡기고 떠나는 어머니들. 고려까지만 해도 아이는 당연히 어머니가 데리고 재가하는 것이었지만 가부장적인 질서가 강조되기 시작한 조선 이후로는 여성은 단지 남성씨앗만을 품고 낳아야 하는 수단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과연 고모조차 없었다면 이서연의 어머니(김부선 분)은 어떠한 판단을 했겠는가? 고모조차 없이 자식을 외롭게 버려두어야 했다면? 고아원이라는 곳도 있다. 그렇게까지 모질었을까? 하지만 정작 모진 것은 그녀 자신이 아닌 그녀를 그러도록 내몬 현실이었을 것이다. 남편이라는 든든한 그늘조차 없이 아이들마저 등에 업이 이 힘든 세상을 살아가야 한다는 공포. 공포는 때로 인간을 잔인하게 만든다. 잔인하다기보다는 비겁한 것이다. 도망치려 한다.

 

"우리가... 닮았어요?"

 

이서연(수애 분)도 그것을 아마 느꼈을 것이다. 그녀 역시 도망치려 했었다. 알츠하이머라는 병으로부터. 그리고 그 병을 알게 될 주위로부터. 병도, 주위의 사람들도 정면으로 마주할 자신이 없었다. 그래서 더욱 단단한 껍질을 두르고 당당하려, 책임감 강한 모습을 보이려 애쓰고 있지만, 그녀의 본질은 그러함에도 나약해서 감히 현실과 맞서지 못하는 비겁함이었을 것이다. 박지형(김래워너 분)을 사랑하면서도 박지형의 주위와 싸울 용기가 없어 포기해야 했던 것처럼. 그것은 그녀의 긍지였다. 더럽혀지기를 두려워하는 나약하면서도 애처로운 긍지.

 

비로소 이서연이 어머니를 만날 결심을 하게 된 이유였을 것이다. 그리고 용서할 수 있었다. 아니 그것은 용서조차 아니었다. 인정이었다. 수용이었다. 그녀가 자신의 어머니라는. 그리고 어머니이기를 포기하고 떠난 여인이라고 하는. 그리고 벌을 주었다. 정확히는 마지막 응석이었다. 어머니로 하여금 자신을 기억하게 하고 싶다. 부끄러운 그 눈물에 다시 자신의 모습을 각인시키고 싶다. 영원히 잊지 못하도록. 이서연 나름의 어머니와의 화해였을까?

 

"여인을 나는 곧 잊겠지만 그쪽은 죽는 날까지 날 잊지 못할 것이다."

 

아마도 병째 들이킨 소주가 속에서 올라오는 듯 무언가 계속 안으로 삼키며 맥없이 이야기를 이어가던 김부선의 연기가 너무나 절절하다, 세파에 치이며 고단하게 패인 주름이 한없이 초라하도록 거칠다. 멀어지는 이서연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그녀의 눈빛은 어느 오래된 집의 낡고 퇴락한 축대와도 같다. 그저 그 자리에 있을 뿐인. 그저 그 자리에서 집을 버티고 자리를 지키고 있을 뿐인. 자식을 앞에 두고도 사랑한다 미안하다 말 한 마디 못하는 애닲은 모정일 것이다. 그녀는 그렇게 약하고 그래서 무정하다. 무정하도록 치이고 패인다.

 

처음 어머니가 들어섰을 때 이서연의 표정은 멍했었다. 원망도 미움도 반가움도 분노도 없었다. 아마 마음의 준비를 한다고 했지만 정작 어머니를 보았을 때는 아무런 준비도 되어 있지 않았을 것이다. 술기운을 빌어, 그러나 어머니 역시 말없이 고개를 돌리고 앉아 있었다. 딸이 얼굴을 보아도 좋다고 할 때까지 어머니는 딸의 얼굴조차 보지 못했다. 막연한 침묵과 무연한 침묵과 애처로운 침묵. 단지 대사가 채워져서 이야기가 전해지는 것은 아닐 것이다. 만나기 전, 만나고 나서, 그리고 차안에서, 말없이 드라마는 많은 이야기를 전한다. 그 무언의 디테일이 아름답다.

 

뜻밖에 주목하게 되는 존재일 것이다. 이서연의 고모부(유승봉 분)다. 평소 그렇게 말이 없다. 있는 듯 없는 듯 존재감조차 없다. 그러다가 한 마디 던지는 것이 위엄이 있다.

 

"그건 그 입장에서 그럴 수밖에 없을 거라니까."

 

말보다는 표정으로 더 많은 것들을 이야기한다. 굳이 입밖에 내어 표현만 하지 않을 뿐 그의 안에서는 수많은 염려와 감정들이 교차한다. 이서연이 어머니를 만나고 싶어 한다고, 그 어머니의 이야기를 하려는 아내 앞에 고모부는 묵묵히 그녀의 이야기를 들어만 주고 있다. 어느 때보다 무겁고 어두운 표정으로. 그러나 단 한 마디의 말조차 없이. 그나마 내뱉은 한 마디는 그 역시 마음이 편치 않을 이서연 어머니의 입장을 생각한 한 마디다.

 

오랜만에 보는 전통적인 아버지상일 것이다. 남자가 집안일에 이것저것 이래라저래라 간섭하는 것은 너무 가벼워 보인다. 남자라면 당연히 함부로 표정을 드러내서도 안 되고, 그것을 더구나 입밖에 내놓아서도 안 된다. 집안의 기둥처럼. 집안을 지탱하는 그런 묵직한 존재였을 것이다. 말 한 마디 없이 있는 듯 없는 듯 앉아 있어도 어느새 어려운 일이 있으면 돌아보게 되는. 항상 그러면서도 어려워하고 마는. 물론 그것을 가능케 하는 것은 아버지의 권위를 세워주는 고모의 존재가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전통적인 아버지의 연기를 중견배우 유승봉이 능숙하게 풀어 보여준다.

 

아마 고모네 가족을 보면서 그리운 무엇을 보는 듯한 그런 반가움을 느끼는 이유일 것이다. 가부장적이지만 사려깊고 정이 깊은 아버지, 그리고 억척스럽고 수선스러우면서도 그런 아버지를 끔찍이 위하는 어머니, 그리고 듬직한 아들과 샘이 많은 첫째딸. 그리고 철없는 사위와 어린 손자. 마치 시간이 교차하듯 그같은 전통적인 가족의 느낌이 트랜디한 박지형의 주위와 교차한다. 21세기와 20세기가 공존하는 그런 느낌이다. 계급의 차이이기도 하고, 현실의 거리이기도 할 테고.

 

어쨌거나 이서연과 어머니의 만남을 보면서 어머니를 동정하게 되었다. 그러면서 이서연 역시 동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서연은 어머니의 딸이었다. 어머니는 이서연의 어머니였다. 절묘하게 두 사람의 유전자를 두 사람의 캐릭터를 통해 이어 놓는다. 이서연에게는 고모가 어머니였고, 이문권(박유환 분)에게는 이서연이 어머니였다. 그러나 끊을 수 없는 피의 끈끈함이라는 것이 있다.

 

이서연이 노향기(정유미 분)의 문자메시지에 민감한 반응을 보이고, 그러면서도 노향깅에게 박지형의 마음을 담은 다정한 문자를 보낸 이유는 역시 그녀가 떠나고 난 다음을 기약하기 때문일 것이다. 노향기는 이서연이 죽고 나서도 살아 있을 것이다. 앞으로도 한참을 박지형과 함께 이서연이 없는 시간을 살아갈 것이다. 그것이 못내 부럽고 질투난다. 그러면서도 그녀에 대한 미안함에 박지형을 맡겨도 좋겠다는 생각이 있다. 박지형의 말처럼 그녀는 치열하면서도 어느새 물러나는 법을 배워가고 있다. 얼마 남지 않은 시간을 서서히 포기해가는 법을 배워가고 있다. 아마 그 또한 이서연이 어머니와 만나고 그녀가 어머니임을 받아들일 수 있었던 이유일 것이다.

 

비극의 끝은 화해로 이어지고 만다. 비극을 받아들였을 때 그것은 더 이상 절망이 아니게 된다. 물론 희망도 아니다. 하지만 포기란 더 이상의 싸움을 포기함으로써 보다 여유를 가지고 자신과 주위를 둘러볼 수 있도록 한다. 패자의 여유일 것이다. 상처입은 자의 여유다. 그것은 또다른 절박한 싸움이기도 하다. 이서연은 하루하루를 그렇게 싸우며 살아가고 있다. 안타까운 것은 그러한 이서연의 싸움에 비해 빅자형의 싸움이 보이지 않는다는 것. 박지형의 비중이 안타깝다.

 

여전히 박지형의 비중은 안쓰러울 정도다. 이제 곧 엔딩이기에 아쉬움은 더 크다. 이서연의 병이 더 깊어져야 하는데. 그래서 이서연이 더 망가지지 않으면 안 되는데. 그러면 드라마는 비극을 넘어 공포를 보여주게 된다. 지고한 사랑따위 보여줄 여유가 사라진다. 알츠하이머란 그런 병이다. 지금까지는 너무 곱고 예쁘고 평탄하다. 솔직히 보고 싶지도 않다. 너무 아플 것 같다.

 

서서히 정리되어가는 과정이다. 드라마는 연착륙하려 한다. 조금의 요동은 있을 것이다. 사실 지금의 이서연에게 새로운 사건이란 도저히 감당하기 무리다. 비극도 있고, 소란도 있을 것이지만, 그래도 서서히 준비해가고 있는 과정일 것이다. 비극이 그래서 더욱 깊다. 담담해서 더욱 깊다.

 

http://www.stardailynews.co.kr/news/articleView.html?idxno=698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