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를 전하는 수단으로 대략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서술이고 다른 하나는 묘사다. 청자를 마주보고 화자의 입장을 일방적으로 전달하거나, 청자와 같은 방향을 보면서 청자가 자신과 같은 것을 보고 듣고 느낄 수 있도록 배려하거나, 전자의 목적은 설득일 것이고 후자의 목적은 공감일 것이다.
어쩌면 드라마 <해를 품은 달>이 40%를 넘나드는 높은 시청률에도 불구하고 비평적으로 여러 비판에 노출될 수밖에 없는 이유였을 것이다. 드라마의 내용을 이해하는데는 서술만으로도 충분하다. 드라마가 어떤 이야기를 전하고자 하는가는 작가의 설득만으로도 충분히 받아들일 수 있다. 그러나 정작 왜와 어째서와 어떻게라는 질문에 대해서는 많은 아쉬움이 있을 수밖에 없다. 그렇게 드라마는 일방적이다. 일방적으로 설득하고 강요하려고만 든다.
갑작스레 몰아치는 드라마의 마지막 2회는 바로 그러한 드라마가 갖는 내재적 문제를 고스란히 드러내고 있었을 것이다. 원래 윤대형(김응수 분)이 허염(송재희 분)에게 사람을 보내 과거 민화공주(남보라 분)가 저지른 죄를 전한데에는 따로 의도한 바가 있었을 것이다. 윤대형이 편지에 쓴 그대로 민화공주의 죄를 덮은 것이 죽은 선왕이었으며 지금의 왕 또한 민화공주가 지은 죄에 대해 알고 있다.
결국 허염과 이훤(김수현 분)의 관계를 갈라놓으려 했던 것이다. 그것을 막은 것이 다름아닌 죽지 않고 살아 있던 허연우(한가인 분)였던 것이고 말이다. 허염은 비록 날개는 꺾였지만 한때 모든 젊은 선비들이 우러르던 인재였다. 그래서 이훤과 갈라서도록 했던 것인데 그 뜻이 이루어질 것 같지 않자 반란을 모의하며 그를 죽이려 한다. 그리고 그때 그것을 막아서다 설(윤승아 분)이 죽는다.
하지만 없었다. 어째서 윤대형은 굳이 허염에게 민화공주의 죄를 알리는 편지를 보낸 것이며, 그럼에도 바로 그를 죽이려 자객을 보내고 있었는가? 그것은 민화공주가 죄를 용서받기까지의 과정에 대한 허술한 묘사로도 이어진다. 모든 사실을 알게 되고 허염은 민화공주와 이훤에 대한 견딜 수 없는 배신감을 느낀다. 비록 이훤에 대해서는 허연우를 통해 오해를 풀게 되지만 민화공주에 대해서는 그럼에도 그녀를 사랑할 수밖에 없는 자신에 자괴감마저 느끼게 된다. 차라리 민화공주와 더불어 죄를 받겠다. 그것이 더욱 민화공주를 절망케 하고 고통스럽게 한다. 비로소 허염의 마음을 얻었기에 그녀는 더욱 고통스런 후회속에 살아가야 한다. 그같은 고통스런 과정이 있었기에 민화공주는 용서받을 수 있었고 허염 또한 민화공주를 용서하는 자신을 용서할 수 있었다.
하지만 드라마는 굳이 그같은 번거로운 묘사를 통해 시청자와 교감하려 하지 않는다. 하기는 설이 어떻게 허염을 마음에 품게 되었는가 하는 것조차 죽어가는 설의 입을 통해 들을 수밖에 없었다. 이제껏 애써 감춰오던 설의 마음이 죽음에 이르는 순간 그녀의 입을 통해 허염에게 전달된다. 안타깝기는 한데 원작에서와 같은 애절함은 없다. 마지막까지 사랑한다는 한 마디조차 전하지 못하고 허염이 자신의 존재조차 알지 못하도록 죽어간 원작에서의 설에 비해 지나치게 구체적인 설명은 그저 그런 이야기가 있었구나 납득하고 말게 한다. 그리고 결국 그런 그녀의 고백을 위해 이훤은 어떻게 알았는지도 모르게 운(송재림 분)을 보내 허염을 구하도록 하고 있었다. 원작에서처럼 설이 모든 자객을 죽이고 자신도 죽는다면 허염에게 고백할 기회따위는 없다.
어째서 그 순간 양명군은 죽음을 택할 수밖에 없었는가? 그러고 보면 죽은 여러 사람들 가운데 유일하게 그 과정이 설득력있게 보여진 것은 중전 윤보경(김민서 분) 한 사람 뿐이었다. 굳이 윤보경은 자신의 입으로 이것저것 설명할 필요조차 없었다. 마지막 가는 길에 적잖이 긴 이야기를 남기기는 했지만 굳이 그것이 아니더라도 윤보경이 죽을 수밖에 없는 이유를 납득하지 못할 사람은 거의 없었다. 그것이 묘사라는 것이다. 오히려 독기를 보이고 악의를 내비치면서도 결국에 죽을 수밖에 없는 가련한 운명에 공감하게 된다.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그것을 이해하고 납득하게 된다. 그것이 부족하니 무리하게 쓰러져 있던 반란군이 일어나 모두가 보는 가운데 창을 던져 멍하니 서 있던 양명군을 죽이는 장면이 그려지고 있는 것이다.
차라리 윤대형의 칼에 쓰러졌으면 더 좋았을 뻔했다. 반란군과 싸우다 누군가 휘두르는 눈먼칼에 맞아 쓰러진다. 굳이 막으려 하지 않는다. 반란군을 제압하려 쏘는 화살에조차 그는 막거나 피하지 않고 자신의 몸을 그대로 노출시킨다. 그쪽이 양명군의 의지를 보다 선명하게 드러내는데 보다 효과적이지 않았을까? 그것은 우연이었다. 쓰러져 있던 반란군 가운데 운좋게 살아남은 이가 있었고, 그가 창을 들어 양명군을 노리게 되었다. 아니었다면 양명군은 살았을까? 죽어야 했던 양명군이 지나친 작위로 인해 뜬금없는 돌발상황으로 전락하고 만다. 양명군의 죽음을 쉽사리 인정하지 못하는 이유다. 그는 과연 그 자리에서 그렇게 죽어가야 했을까?
굳이 마지막회가 아니더라도 그렇다. 어쩌면 가장 중요한 부분이다. 어째서 허연우는 왕후가 되어야 하는가? 이훤의 사랑을 받고 있기 때문에? 이훤은 어째서 허연우를 그토록 마음에 품고 놓지 않으려 하는가? 이훤은 왕이다. 단 한 순간도 그는 왕이 아닌 적이 없었다. 왕의 아내가 된다는 것은 조선의 모든 여성 가운데 가장 높은 자리에 오르게 된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래서 왕의 아내를 따로 국모라 부르기도 한다. 단지 개인적인 감정만으로 그같은 지고한 자리에 오를 이를 선택할 수는 없다. 그래서 원래 이훤 역시 자신의 세자빈으로써, 이제는 왕후로써 그녀를 사랑했던 것이었다.
그렇다면 허연우에게는 이훤이 사랑할만한 부분들이 보이고 있던가? 아니 그 이전에 허연우란 조선이란 드라마속 현실과 어울리는 존재이기는 하던가? 왕을 앞에 두고서도 하고자 하는 말은 일단 하고부터 보았다. 판서라고 정승이라고 해서 예외는 아니었다. 비천한 무녀의 신분이면서도 그녀는 자신의 속에 있는 말을 하는데 전혀 아무런 거리낌도 없었다. 오히려 모든 진실이 밝혀지고 왕의 곁에 머물게 되면서 현실을 이유로 모든 것을 덮으려는 모습이 어색하게 여겨질 정도다. 철이 든 것일까? 비천한 무녀의 신분에서 왕후를 바라볼 수 있는 처지가 되니 현실이 보이기 시작한 것일까? 그러나 그 이전까지 과연 허연우에게서 이훤이 사랑할만한 왕에게 어울리는 매력이란 보이고 있었는가? 한가인이 예쁘더라는 한 가지 말고는 없었다.
어쩌면 한가인과 관련해 연기력 논란이 불거진 이유 가운데 하나일 것이다. 그보다는 허연우라는 캐릭터가 아역시절과는 달리 왕이 사랑하기에 어울리는 인물로 보여지지 않았다. 왕이 사랑하여 왕후까지 되어야 할 인물로는 도저히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그것이 한가인의 어색한 연기와 어우러지며 한가인에 대한 과도한 비판의 원인이 되었다. 충분히 허연우의 캐릭터가 설득력을 가지고 있었다면 한가인의 연기에 대한 비판도 이렇게까지 격렬하게 이루어지지는 않았을 것이다.
결국은 모든 것이 일방적인 것에 이유가 있었다. 어째서 이훤은 허연우를 사랑하는가? 어떻게 허연우는 이훤의 사랑을 독차지하게 되는가? 그나마 워낙에 그것이야 말로 드라마의 주제이기도 한 터라 그 부분만큼은 드라마적으로 묘사하여 보여주려 하니 이훤만 부각되었다. 허연우에 대한 반감과 반비례하여 이훤에 대한 호감만 커져갔다. 이런 종류의 드라마에서는 일단 남자만 멋있으면 된다. 고귀한 신분에 외모도 뛰어나고 인물됨도 훌륭하다. 그러나 워낙 허연우에 대한 묘사가 부재하다 보니 이훤에게 지나치게 비중이 쏠리게 된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나머지는 무시된다.
어째서 윤대형은 대왕대비 윤씨(김영애 분)를 죽이려 하는가? 역시 덕분에 대왕대비 윤씨마저도 죽음을 눈앞에 두고 하소연하듯 자신이 죽어야 하는 이유를 스스로의 입으로 일일이 설명하고 있다. 대왕대비 윤씨는 또한 이훤의 친할머니로써 이훤을 지키고자 했다. 이훤을 압박하려고만 한 것이 아니다. 자신의 가문을 위해 이훤을 누르려고만 했던 것도 아니었다. 그래서 윤대형은 대왕대비 윤씨를 죽였다. 그러나 그와 같은 묘사가 부족했으니 설명이 대신한다. 대부분이 그렇다. 영상은 아름답고 좋은데 정작 이야기와 관련해 반드시 필요한 내용은 없고 단편적으로만 소모될 뿐이다. 지나고 나면 미처 신경쓰지 못한 부분이 발견되어 그것을 대신하느라 설명만 늘어난다.
아마 허염이야 말로 그로 인한 가장 큰 피해자였을 것이다. 도대체 허염이 한 것이 무엇이 있던가? 민화공주가 용서받게 되는 이유가 바로 허염에게 있건만 허염은 아무것도 보여주지 못했다. 민화공주가 용서받기까지의 과정을 그는 그 어떤 것도 보여주고 있지 않았다. 민화공주와의 사이에 이렇다 할 관계조차 만들지 못하고 있었다. 단지 설정이 그러하니 남편이고 아내인 것이지 두 사람 사이에 어떤 이야기가 있었는가 드라마로서는 전혀 알지 못한다. 역시 민화공주가 모든 짐을 홀로 짊어지고 원작보다 더 조숙한 모습이 되어야 하는 이유였다. 마지막 순간 민화공주를 용서하는데 그 모습조차 공허해 보인 이유였다. 그로부터 어떤 서사도 설득력도 찾아볼 수 없었다.
문제는 그럼에도 어느 정도 납득이 된다는 것이다. 설명을 들었으니까. 드라마로 보지 못한 것을 배우들의 대사로 귀로 들을 수 있었다. 양명군의 비극도, 설의 비련도, 민화공주의 구원도, 대왕대비의 죽음도, 이훤과 허연우의 사랑마저도, 이해는 안가지만 이미 귀로 들었으니 이해할 수 없다. 무슨 내용인지는 알겠는데 그 과정이 너무 허술하다. 감독에 대해서는 감탄을 금하지 못한다. 그럼에도 멋진 영상으로 부족한 묘사부분을 대신한다. 배우들의 연기 또한 아쉽지만 최악은 아니었다.
어쩌면 그것은 통속극의 정석처럼도 보인다. 고전적인 로망스의 구조가 그러했다. 굳이 그래야 하는 이유가 없음에도 필요하다면 그렇게 했다. 갑작스러운 비장함과 느닷없는 애절함과 그리고 떠밀리는 듯한 감동. 그럼에도 사람들은 만족했다. 얼마나 재미있는 이야기인가가 중요했으니까. 드라마란 것도 결국 얼마나 시청자로부터 동의를 이끌어내느냐 하는 것일 게다. 그 과정에서 서술이냐 묘사냐 하는 것은 그를 위한 한 방법에 불과하다. 설득인가 공감인가 하는 것 또한 그에 이르는 한 수단일 뿌이다. 모든 중심에는 작가가 있다. 단지 작품에서 작가가 너무 튀고 있었다.
그야말로 작가의, 작가에 의한, 작가를 위한 드라마였을 것이다. 배우란 말이다. 사건 또한 말이다. 드라마라고 하는 커다란 캔버스 위에 규칙조차 없이 작가가 뜻한대로 그것들을 배열한다. 중요한 것은 작가가 전하고자 하는 바가 무엇인가. 그래서 이해할 수 있다. 이해하지 못하는데 어느새 이해하게 된다. 드라마가 재미있을 수 있는 이유다. 그런데도 안으로 들어가면 너무 허술하다. 작가밖에 없으니 당연할 것이다. 캐릭터도 사건도 무엇 하나 살아있는 것이 없다. 하지만 그런 것 없이도 이야기만 재미있다면 대중은 기꺼이 그에 반응한다. 언제나 가장 중요한 것은 컨텐츠일 것이다.
대중드라마라는 것에 대한 고민이다. 대중문화 그 자체에 대한 근본적인 회의이기도 하다. 하지만 결국 그 모든 것은 대중의 쾌락을 위해 존재한다. 단지 그를 위한 방법론 가운데 이런 것도 저런 것도 존재할 뿐이다. 방법론적으로 더 높은 수준의 것이 있을 수는 있지만 더 우월한 것은 있을 수 없다. 얼마나 효과적으로 쓰이는가? 그런 점에서 드라마는 성공한 드라마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럼에도 드라마에 대한 비판이 끊이지 않는 이유일 것이다.
아쉬움이 있다. 원작을 읽었다. 그리고 무척 좋아했었다. 원작에서와 같은 감동을 기대했다. 아니더라도 드라마로서 보다 완성도 있는 내용을 기대하며 보았다. 기대에는 미치지 못한다. 그다지 아름답지는 않다. 그래도 재미있다. 모순이다. 하지만 그것이 대중드라마다. 결론이다. 이것이 드라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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