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사회

타진요와 허상논리 - 역사논쟁의 피곤함...

까칠부 2012. 3. 17. 21:57

이를테면 이런 것이다. 드라마 <무신>에서 묘사한 격구의 고증에 대해 사료를 들어 비판한다. 그러자 누군가 반박하며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그래봐야 고려후기 기록 아닌가? 무신의 배경은 고려중기다."


최충헌에 대한 기록은 당연히 후대의 왜곡일 것이고. 따라서 사료는 근거가 될 수 없다.


물론 일견 타당하다. 분명 조선왕조실록에 기록된 격구는 고려후기의 것이다. 고려중기와 고려후기가 같을 수는 없다. 다만 그럼에도 과연 고려중기 격구의 모습이 어떠했는가 추정해 보는 근거는 될 수 있다. 다른 나라의 예를 들어 존재하는 사실로써 유추하여 가정한다. 추론이다. 그러나 그런 것은 전혀 없다.


타진요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막연한 가능성이다. 그럴 것이다. 그런 것 같다. 그러지 않을까. 그리고 어느새 그것이 사실로 둔갑한다. 그것을 담보하는 것은 다름아닌 논리, 최충헌에 대해 사료에 대해 기록된 것이 이렇다 하니 바로 <고려사>가 후대에 쓰여지며 왜곡되었을 가능성을 따지는 것과 같다.


어떻게 가능한가? 결국은 논리라고 하는 말에 대한 오해에서 비롯된다고 할 수 있다. 논리란 사물을 인식하는 방법이다. 사물을 유기적으로 인식하고 이해하는 과정이다. 그런데 정작 사물보다는 인식에 초점을 둔다. 사실보다는 이해에 방점을 찍는다. 내가 인식하고 내가 이해하는 것이 중점을 둔다. 훨씬 편하다. 어떻게 하면 내가 생각하고 있고 여기고 있는 바를 훌륭하게 만족시키는가?


1+1도 어떻게 논리를 풀어나가느냐에 따라 얼마든지 그 답이 달라질 수 있다. 0이라고 하면 0이 되고 1이라고 하면 1이 된다. 그래서 그것은 논리적인가? 그러나 그렇게 믿는다. 어떻게? 자신의 믿음을 충족시켜주니까. 그래서 그것을 논리라 착각하게 된다. 그러나 사실을 배제한 논리란 단지 망상에 불과할 뿐이다. 상상에서 비롯된 추론조차 사실을 근거하지 않았을 때 단지 의미없는 망상에 불과하다.


그런데 그게 쉽게 되지 않는다. 자기에 대한 확신 때문이다. 어느새 권력이 되어버린 탓이다. 모오류의 함정에 빠져 있다. 나는 지혜롭다. 나는 현명하다. 나는 어리석지 않다. 어떤 논란이 불거졌을 때 그래서 사람들이 흔히 하는 말이 그것이다. 대중을 바보취급하지 말라. 바보가 아니기에 옳다. 편리한 논리다.


어째서 당시 그토록 많은 사람들이 타진요에게 낚여 퍼덕였는가? 그렇게 믿었다. 모두는 어리석지 않다고. 모두는 바보가 아니라고. 당연히 그 가운데 자신도 포함된다. 자신의 믿음을 충족시켜 기분좋게 만들어주는 논리에 이끌리고 만다. 그조차도 이성이라 착각한다. 나는 올바로 판단하고 있다고 여긴다. 그런 자신감에 이미 명백한 사실에 대해서조차 작은 흠집을 찾고 그 가치를 훼손함으로써 자신의 정당성의 근거로 삼는다. 굳이 자신의 근거가 사실일 필요는 없다. 의심하고 부정함으로써 그 믿음은 정당성을 갖는다.


내가 어느 순간부터 역사논쟁을 포기한 이유이기도 하다. 대부분의 논쟁을 포기하고 있다. 위화도회군이 잘못이라 한다. 그래서 사료를 들어 근거를 제시한다. 당시 고려의 사정이 어떠했는가를. 그런데도 고려가 과연 요동을 정벌해 유지할 수 있었겠는가를. 그러자 조선에서 쓰여진 사료라 말한다. 굳이 공들여 사료까지 찾아 제시하는 내가 다 바보같다. 굳이 이러니저러니 근거를 찾고 논리를 개발해도 어차피 들으려 하지 않는 것은 똑같다. 지금의 타진요의 모습 그대로다. 할 의욕이 생길까?


타진요 재판이 또 연기되었다는 말에 문득 다시 생각나고 말았다. 사실 <무신>에 대한 나의 비판에 대해 이러쿵 반박하는 모습을 보면서도 타진요가 연상되고 있기는 했었다. 나는 두 손 들었다. 이길 자신이 없다. 그런다고 누가 크게 피해보는 것 없다. 13세기 고려에서 기원전의 로마에서도 않던 인명을 살상하는 경기를 보면서 고려인의 기상을 이야기하는 야만성을 그려내고 있다고 해서, 그리고 그것을 사실로 믿는다고 해서 누구 하나 피해 보는 사람이 있는가? 어차피 그것을 믿는 사람은 사람을 죽이는 경기를 통해 호연지기를 드높이는 것이야 말로 진정한 무인의 기상이라 여기고 있을 것이다. 자랑스러운 것이지 부끄러운 것이 아니다. 다시 말하지만 <스파르타쿠스>는 기원전의 이야기고 <무신>은 13세기의 이야기다. 


이성이라는 것을 다시 생각한다. 논리라는 것에 대해서도 생각해 본다. 나는 과연 이성적인가? 나는 과연 논리적인가? 한 가지만은 분명하다. 내가 이성적이라고 믿는 순간 나는 이성적이지 않다. 내가 논리적이라 여기는 순간 나는 논리적이지 않다. 믿고 여기는 것은 감정의 영역이다. 이성과 논리가 감정을 위해 봉사한다. 가장 쉽게 범하는 실수다. 무엇이 이성이고 무엇이 논리인지.


타블로가 제대로 잘못 걸린 셈이다. 더구나 그들이 틀렸음을 제대로 입증해 보임으로써 자존심에마저 상처를 내고 말았다. 지금도 타진요의 학벌에 대해서는 잘못을 인정하면서도 다른 이유를 들어 그를 비난하며 나서는 많은 네티즌들의 모습일 것이다. 이성을 잃은 군중처럼 무서운 것이 없다. 그런 주제에 자기가 이성적이라 생각하는 맹목처럼 무서운 것은 더 없다. 네티즌이란 그렇다.


차라리 드라마는 드라마일 뿐이라 하는 것이 옳다. 그저 드라마적인 상상력에 불과할 뿐이다. 나는 그렇게 여긴다. 감정은 감정으로써 이해한다. 감정을 통해 반박하고 변호한다. 오히려 그것이 잘못을 줄인다. 그나마 아무도 피해보는 사람이 없다면 좋다. 타진요가 용서가 안되는 이유다. 타진요만이 아니라 적우와 관련해서라던가 정선희와 관련해서, 과연 그들은 그렇게까지 정의로운가.


어처구니 없는 사건이 길어지고 있다. 또다시 연기된 것을 기화로 기세가 등등한 사람들이 많다. 타진요는 아니더라도 다른 곳에서 같은 모습을 반복하는 사람들이 있다. 저들은 전혀 반성이란 걸 모른다. 저들의 본질일 것이다. 타진요란 단지 그 드러난 극단적 일면에 불과할 것이다. 저들도 반성이란 없다.


가장 이성적일 때 이성을 의심한다. 가장 논리적이라 여길 때 논리인가를 의심한다. 그래도 쉽지는 않다. 한 걸음 물러선다. 두 걸음 물러선다. 결국은 끊임없는 노력 뿐일 것이다. 새삼 깨닫는다. 웃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