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

빛과 그림자 - 쇼비즈니스보다 권력암투, 재미는 있지만 길을 잃다.

까칠부 2012. 3. 20. 10:00

어쩌면 바로 이런 것들이야 말로 한국드라마의 다양성을 해치는 안타까운 부분들일 것이다. 과연 원래의 의도대로 70년대 쇼비즈니스를 통해 강기태(안재욱 분)이 성장하여 장철환(전광렬 분)을 쓰러뜨리기까지의 과정을 그려내는 것이 쉽겠는게, 흔히 아는대로 당시의 청와대와 중정간의 치열한 암투를 그려내는 쪽이 더 쉽겠는가? 대중의 관심 또한 후자쪽이 훨씬 확실하고 안정적이다.


더 이상 드라마에 쇼비즈니스란 없다. 빅토리아의 무대도, 빛나라기획도, 하다못해 세슨스타쇼단도, 이정자(나르샤 분) 또한 더 이상 무대에서 노래를 부르기보다는 최성원(이세창 분)과 야릇한 분위기나 만들고 있을 뿐이다. 유채영(손담비 분)도 더 이상 무대 위에서 노래를 부르지 않고 궁정동과 요정을 오가며 암투에 휘말린다. 그나마 이정혜(남상미 분)는 배우를 쉬고 있는 사이 잃어버린 아버지를 찾으려 하고 있다. 원래의 의도란 어디로 갔는가? 드라마의 엔딩로고를 보고 있으면 제목처럼 드라마에 대해 처음 가졌던 기대와 역시나 가질 수밖에 없었던 불안을 떠올린다.


이제 남은 것은 장철환과 김재욱(김병기 분)이다. 청와대와 중정의 암투다. 한빛회가 그 뒤에 있다. 너무 뻔하다. 그동안 수도 없이 다루어져 온 내용일 것이다. 이제 새삼스러울 것도 없다. 그 시대가 그러했음을 모르는 사람이 과연 얼마나 될까? 차라리 역사적 사실에 충실하다면 역사를 재현한다는 의미라도 둘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장철환과 김재욱부터가 가공의 인물들이다. 지금 일어나고 있는 사건들이 모두 가공의 사건들이다. 한빛회가 하나회라면 벌써 전면에 나서서는 안된다. 대마초파동이 마무리되고 해를 넘겼으면 겨우 1976년이다. 아직 박정희는 건재하다.


사람들이 좋다좋다 하니까 거기에 넘어가 버렸다. 70년대 쇼비즈니스를 통해 강기태가 성장하는 어려운 과정들을 그렇게 쉽게 넘겨 버렸다. 노상택(안길강 분)과 겨루며, 장철환과 차수혁(이필모 분), 조명국(이종원 분)의 방해를 이겨가며, 이정혜와 유채영의 지독스런 사랑을 몸으로 받아가며, 그렇게 강기태가 70년대를 관통해 마침내 성공을 이루고 복수를 하기까지의 복잡하면서도 다루기 쉽지 않은 내용들이 쉬운 권력의 암투로 넘어가 버리고 만 것이다. 더 이상 빡빡한 일정에 쫓겨 급하게 쓰기에는 앞으로의 내용들이 도저히 쉽지 않은 때문일 것이다. 한국드라마제작의 한계다.


어려운 길보다는 쉬운 길을, 검증되지 않은 가능성보다는 확실하게 검증된 현실을, 기획단계에서는 이런저런 다양한 가능성도 모색해 볼 수 있겠지만 일단 시한을 앞둔 상황에서는 당연히 후자의 현실을 우선할 수밖에 없다. 괜히 어려운 길을 가려다가 제대로 때를 맞추지 못하는 것보다 확실한 길을 찾아 그나마 있는 것이나마 챙기는 것이 낫다. 현명하지만 아쉬운 선택일 것이다. 그만한 준비도 없이 50부작이라는 장편을 기획했던 것일까? 그렇지 않아도 힘이 떨어지던 참이었다. 


재미는 있는데 아쉽다. 김재욱의 노회함과 장철환의 광기가 서로 얽히는 과정이 흥미로우면서도 어쩌면 더 중요한 것을 놓친 듯 아깝기만 하다. 장철환은 저렇게 초라한 몰골이 되어 조사를 받아야 할 인물이 아니다. 그의 몰락은 강기태에 의해 이루어져야 한다. 그것도 중앙정보부라는 또다른 권력의 힘이 아닌 쇼비즈니스업계에서 성공한 강기태 자신의 힘으로 이루어질 수 있어야 한다. 그때까지는 그는 강한 적으로 남아 있어야 한다. 이 또한 김병기의 노련한 연기가 만들어낸 부작용일까? 그럼에도 김재욱을 연기하는 김병기에게는 도저히 눈을 뗄 수 없다. 그는 너무 멋있다.


어쨌거나 반전의 계기가 만들어졌다. 그 사이 강기태가 장철환의 자백을 유도하고는 그것을 녹음하는데 성공하고 있었다. 장철환의 육성으로 그가 강기태와 조태수(김뢰하 분)를 제거하기 위해 살인을 교사하고 음모를 꾸민 정황이 밝혀졌다. 그것은 김재욱이 주도권을 쥐고 있는 지금 장철환을 제거할 가장 강력한 무기가 될 것이다. 장철환을 제거하고 자신에게 씌워진 누명을 벗는다. 장철환이 건재하다면 언론또한 권력에 의해 장악되어 있던 터라 보도 자체가 불가능하다. 그럼에도 김재욱을 믿지 못해 거리를 두는 것은 강기태가 바보이기 때문일 것이다.


어쩌면 말할 것이다. 어째서 강기태는 그 자리에서 장철환과 차수혁, 조명국을 쏘지 않고 놓아둔 채 그대로 도망쳐 버리고 말았는가? 하마트면 잡힐 뻔했다. 아니 잡히기 전에 죽을 것이다. 어차피 장철환은 그를 잡을 생각이 없다. 죽이려 한다. 바로 코앞에서 김재욱이 장철환을 잡은 덕분에 강기태는 겨우 목숨을 구하고 만다. 그럴 것이면 복수라도 해야 하지 않을까? 하지만 바로 그것이야 말로 강기태가 장철환, 그리고 차수혁과 다른 점일 것이다.


장철환은 말한다. 강기태를 죽이기 위해 자신이 꾸민 음모에 대해 그조차 각하를 위한 것이고 나라를 위한 것이었노라고. 그는 끊임없이 변명한다. 이유를 댄다. 그것이 잘못이 아니라고. 그것이 잘못된 것이 아니었노라고. 자신을 틀리지 않았노라고. 차수혁 역시 마찬가지다. 그러나 강기태는 아니다. 강기태는 바보라서 이유를 대지 않는다. 죽이면 죽이는 것이다. 이유야 어찌되었든 이미 총을 쏘아 죽인 순간 그는 살인자가 되는 것이다. 그것이 양심이다. 오히려 그다지 영리하지도 많이 배우지도 못했기에 더욱 솔직하게 드러나는 양심이다.


이유가 사람을 죽인다. 가장 정의롭고 선한 이유가 아무렇지도 않게 사람을 죽이도록 만든다. 수많은 사람을 죽이고 심지어 어린아이까지 잔인하게 살해한다. 여성을 강간하고 재산을 약탈하고 마을에 불을 지른다. 그럼에도 그들의 행위는 정의라는 이름으로 교과서에 실려 있었다. 아직까지도 그들은 스스로 나라를 위해 그리 했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렇게 일부에서는 받아들여지고 있다. 과거의 많은 억울함들에 대해서조차 산업화의 과정에서의 어쩔 수 없는 희생이었다. 그것이 권력이다. 그렇게 권력은 정의라는 이름으로 사람을 죽이고 그것을 정당화한다. 그리고 강기태는 바로 그 권력의 반대편에서 피해자가 되었던 경우다. 과연 강기태가 그들을 닮아야 할까?


강기태가 장철환을 죽이는 순간 그는 장철환과 같은 부류가 된다. 장철환을 죽이고 그것이 정의였노라 어쩔 수 없었노라 변명하는 순간 그는 장철환과 다르지 않은 종류의 사람이 되고 만다. 그것은 당연한 것이었으며 피치못할 사정이었다. 그것이 차수혁이다. 차라리 돈욕심에 배신을 저지른 조명국이 낫다. 조명국은 오히려 명쾌하기라도 하다. 죽이고 싶어 죽인다. 그러나 강기태는 그렇게까지 독한 인물이 아니다. 그래서 그는 드라마의 주인공이다. 어둡던 시대, 영리하고 계산빠르던 사람들이 승승장구하던 시대 유일하게 바보같이 어리석기에 그는 주인공일 수 있다. 그런 시대에 강기태와 같은 사람도 한 사람 쯤은 성공해야 하지 않겠는가.


그럼에도 길을 잃은 탓에 많이 아쉽다. 그렇게 바보같은 강기태가 어느새 우뚝서서 장철환과 차수혁을 내려다 보는 모습을 보았어야 했는데. 어떤 어려움에도 그것을 기회삼아 성장하고 성공하는 모습을 보았으면 했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그려지는 70년대 연예계의 모습도 흥미로웠다. 지금은 볼 수 없는 그 시대만의 낭만과 애환들이 호기심과 흥미를 자극한다. 하지만 너무 어려운 길이고 드라마는 쉬운 선택을 했다. 그것도 또 재미있다. 


강기태는 그렇게 쇼비즈니스와 함께 드라마에서 한쪽 구석에 비껴나 있다. 시대의 주인공은 그들이 아니다. 한낱 딴따라쇼단의 단장인 강기태가 아니다. 아니 이제는 빛나라 기획의 사장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그 시대의 주인공은 김재욱과 장철환이다. 조명국과 차수혁이다. 노상택이나 조태수조차도 아니다. 권력을 가진 이들이다. 권력에 가장 가까이에 있던 이들이다. 유채영조차도 쓰임을 다하자 장철환에게 모욕을 당한다. 그 또한 씁쓸한 시대의 단면일 것이다.


많이 아쉽다. 재미는 있지만 보석이 될 수 있는 돌조각을 당장의 반짝이는 유리와 바꾸어 버린 모양새다. 과연 이것을 다듬으면 아름다운 보석이 될 수 있을까? 그러나 유리조각은 지금 이 순간에도 반짝이며 화려하게 빛나고 있다. 누구나 반짝이는 것을 탐낸다. 보석을 다듬는 것도 그 반짝이는 화려한 아름다움을 탐내기 때문일 것이다. 어쩔 수 없음을 안다. 그것이 더 아깝다. 안타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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