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마 사람이라면 누구나 갖는 근본적 공포 가운데 하나일 것이다.
"나는 네가 지난 여름에 한 일을 모두 알고 있다."
그래서 사람은 신을 두려워한다. 이미 모든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이미 모든 것을 알고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심지어 자신조차 두려워 차마 잊으려 하는 죄마저.
그리고 심판하려 한다. 자신의 죄를 낱낱이 밝히고 그 죄에 대한 댓가를 물으려 할 것이다. 아무리 감추고 속이려 해도 언젠가 죄는 밝혀질 것이며 그에 따른 심판을 받게 될 것이다. 바로 그 공포가 흔히 말하는 죄책감이라는 것이다. 신은 자기 안에 산다.
과연 이장일(이준혁 분)이 의심하는 것은 김선우(엄태웅 분)일까? 아니면 자기 자신일까? 그가 진정으로 분노하는 것은 그가 저지른 죄의 증거일 김선우였을까? 아니면 죄를 저지른 자기 자신이었을까? 어쩌면 김선우가 자신이 저지른 모든 죄를 알고 있을지 모른다. 김선우가 자기 자신은 물론 아버지 이용배(이원종 분)가 저지른 죄까지 모두 알고 있을 지 모른다. 심판하려 할 지 모른다.
신은 외경의 대상인 동시에 증오의 대상이기도 하다. 처음에는 부끄러워하고 두려워하다가도 분노하고 원망하고 증오케된다. 자신이 저지른 죄조차 신의 탓이 된다. 신으로 인해 죄를 저지르게 되었으며 신으로 인해 벌을 받게 되었다. 무슨 잘못을 그렇게 크게 저질렀는가 도리어 따져묻기도 한다. 그렇게 인간은 신에게 도전하며 그를 외면하고 잊어간다. 죄를 잊어간다. 신이 인간을 용서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신을 용서하는 것이다.
어쩌면 그것은 복수가 아니었을 것이다. 심판이었다. 그는 모든 것을 알고 있었다. 모든 것을 이미 아는 상태에서 시험하고 있었다. 이장일의 진심을. 이장일의 선의를. 그를 용서할 수 있기를. 김선우가 굳이 위험을 무릎써가며 승강장의 끝에 발을 걸치고 선 이유였다. 지하철이 빠르게 다가오고 있는데 과연 이장일은 어떻게 행동할 것인가? 이장일은 아직도 김선우의 친구인가? 아니 이장일에게 김선우란 여전히 친구인 것인가? 그보다는 확신을 얻고 싶었을 것이다. 이장일을 원망하고 그를 증오해도 좋은가? 그에게 죄의 댓가를 물어도 한 점 거리낌이 없는가?
믿고 싶다. 그래서 의심한다. 용서하고 싶다. 그래서 시험에 들게 한다. 그것을 거부한 것은 이장일 자신이다. 매순간의 선택이 김선우의 시험에 대한 그의 답이었다. 도망치려 들었고 숨으려 들었다. 외면하고 잊으려 했다. 김선우에게 어떤 악의가 있어서가 아니었다. 김선우에게 분노하며 그를 폭행하던 그 순간에조차 그는 오히려 김선우를 연민하고 있었다. 그같은 연민을 미안해하고 있었다. 다만 자신의 죄를 솔직하게 인정하고 받아들이기엔 그는 너무 머리가 좋다.
타협하려한다. 합리화하려한다. 이성이란 때로 비이성적인 목적을 위해 쓰이기도 한다. 논리란 가장 비논리적인 상황을 정당화하려는 목적에 동원되기도 한다. 영리하기에 그 방법을 안다. 어떤 순간에도 진실로부터 비껴나는 방법을 그는 안다. 한 사람의 장애인을 돕기보다 검사가 되어 더 많은 사람들에게 더 큰 도움을 베풀겠다. 만일 김선우가 자신의 제안을 순순히 받아들였다면 그와 같은 비극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자신도 죄를 짓지 않았고 김선우도 지금과 같은 처지가 되지 않았다. 자신은 언제나 옳다. 잘못되지 않았다.
물론 안다. 거짓이다. 누구도 속지 않을 뻔한 거짓말이다. 그래서 그는 술을 마신다. 항상 쫓기듯 의심하고 불안해한다. 마침내는 화를 낸다. 그같은 뻔한 거짓말을 일삼는 자신에게. 그런 뻔한 거짓말을 하도록 만드는 김선우에게. 그런 지경에까지 이르게 만든 아버지 이용배에게. 그러나 아버지에게도 그리고 자신에게도 그는 진심으로 화낼 수 없다. 그러기에는 아버지나 자신이나 너무 가엾고 불쌍하다. 그래서 속을 수밖에 없다.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안되는 너무나 작고 초라한 자신이기에. 온전히 그 분노는 김선우에게로 향하게 된다.
자신에 신세지려는 김선우와 친구들을 아버지는 방해가 된다며 내쫓으라 말한다. 그리고 이장일은 그런 아버지에게 그러다 벌받을 것이라며 오히려 경고한다. 이장일도 알고 있는 것이다. 자신이 김선우에게 무슨 짓을 저질렀는가를. 그것이 어떤 의미인가 하는 것 역시. 다만 두렵다. 말은 그렇게 해도 정작 죄를 마주하고 그 댓가를 치러야 할 순간이 너무나 두렵다. 김선우와 한지원(이보영 분)은 그의 본질을 꿰뚫고 있다. 단 한 번도 다른 사람을 도운 적도 도움을 받은 적도 없다.
그는 영리하며 계산이 빠르다. 무엇이 이익이 되고 손해가 되는가를 누구보다 빨리 판단한다. 그렇게 길러졌다. 너무나 가난했기에. 가난하더라도 김선우의 아버지 김경필에게는 여유가 있었다. 그러나 이장일의 아버지 이용배에게는 그같은 여유가 없었다. 항상 절박했고 항상 쫓기고 있었다. 열등감을 체화하고 있었다. 그에게 자신이란 무엇보다 소중하지만, 그러나 또한 무엇보다 하찮다. 얼마든지 언제든지 쉽게 타협할 수 있다. 고작 그런 정도의 가치다.
아마 마지막 한지원이 자신이 선물한 기타로 김선우를 위해 연주하고 있는 모습을 보며 이장일이 짓고 있던 표정 역시 바로 그것을 말해주고 있을 것이다. 그는 진심으로 분노하고 있었다. 자신의 마음을 외면한 한지원에게, 그리고 자신의 것을 빼앗아가려는 김선우에게. 김선우에 대한 견딜 수 없는 죄의식이 모멸감이 되어 그에 대한 증오로 바뀐다. 어쩌면 김선우를 죽이려 하던 그 순간보다 더 이장일이 김선우에게 악의를 가지게 된 순간이었을 것이다. 운명은 그렇게 엇갈린다.
최수미(임정은 분)의 이장일에 대한 집착을 이해한다. 그것은 평범함에 대한 집착이다. 평범한 일상에 대한 간절한 바람이다. 아버지 최광춘(이재용 분)이 결코 평범하지 않기에, 결코 평범하지 않은 일상들로 인해 그동안 많은 수모와 고통을 겪어 왔기에, 그래서 더욱 그녀는 평범한 일상을 원한다. 그녀가 서울을 동경하던 것도, 비록 김선우를 따라온 것이지만 서울에서의 삶을 즐기려 하는 것도, 무엇보다 이장일이란 그녀를 평범하면서도 안온한 세계로 이끌어줄 사람이다. 더구나 그녀는 이장일의 비밀을 안다. 비밀을 안다는 것은 모든 것을 아는 것과도 같다.
그게 문제였다. 절망의 순간 그녀는 이장일을 보았다. 자신을 거부하려는 모습에 더욱 집착을 가지게 되었다. 그리고 이장일이 감추고 싶은, 도저히 드러나서는 안되는 비밀을 알게 되는 순간 그와의 운명을 느끼고 말았다. 이장일의 비밀을 아는 순간 그는 그녀의 것이 되어 버렸다. 그의 가장 은밀하면서도 치명적인 비밀을 아는 순간 이장일은 그녀만의 것이 되어 버렸다. 김선우와의 우정마저 잊는다. 때로 기억을 되찾아가는 김선우에게 쫓기는 이장일을 통쾌해한다. 그녀는 모순되다. 그러면서도 한결같다. 간절함이 있을 때 인간은 강해진다.
진노식(김영철 분)은 확실히 이장일의 미래였을 것이다. 모든 시작은 그의 열등감이었다. 사랑했다. 그러나 확신이 없었다. 무엇하나 내세울 것 없던 그에게 그녀는 너무나 과분한 사랑이었다. 그런 그녀에게 어울리는 사람이 되고자 더욱 열심히 앞만 보며 달려왔지만 그의 영혼에 뿌리내른 지독한 열등감은 마침내 균열을 일으키고 만다. 그녀 은혜에 대한 열등감과 오히려 자신보다 더 그녀에게 어울려 보이는 문태주(정호빈 분)에 대한 질투가 그의 안에서 파열음을 일으킨다. 복수라는 이름의 배신은 그렇게 시작된다. 복수도 아니었고 배신도 아니었다. 단지 어리석음이었다.
아마 진노식도 알고 있었을 것이다. 단지 믿고 싶었을 것이다. 그렇다고 끝까지 고집을 부리고 있을 뿐이다. 아니라면 자신은 형편없는 아무것도 아닌 존재가 될 것이기에. 사랑하는 여인마저 자신의 터무니없는 오해로 인해 불행한 죽음을 맞고, 아끼던 동생들 또한 자신의 잘못된 판단으로 말미암아 영영 다시는 보지 못할 사이가 되고 말았다. 그녀가 낳은 자식조차 여전히 의심하고 있는 가운데 지금 그의 곁에는 남아있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 절대적인 고독. 지금의 아내 마희정(차화연 분)은 필요에 의해 만난 파트너일 뿐 진심으로 마음을 주고받는 가족이 아니다. 마희정의 딸 박윤주(김혜은 분) 또한 마찬가지다.
진노식이 그토록 문태주와 만나기를 바라는 이유다. 확인하고 싶다. 그것이 터무니없는 오해였는지. 자신의 잘못된 판단이었는지. 물론 그 다음에 어떻게 하리라는 계획은 없다. 과연 그 모든 진실을 알았을 때 자신이 그것을 감당할 수 있을 것인지. 과연 되돌릴 수 없는 진실 앞에 자신이 무엇을 할 수 있을 것인지. 그러나 알고 싶다. 문득 꿈에서 만난 혜은을 간절히 부르던 그의 마지막 진심이, 그리고 사랑을 쫓아 결심한 박윤주에 대한 조언이, 그럼에도 그는 자신이 틀리지 않았음을 확인하고 싶다. 혜은을 사랑했던 자신도, 그녀를 저버렸던 자신 역시. 모순이다. 과연 그가 진정으로 바라는 진실은 무엇일까? 사랑인가? 아니면 배신인가?
절묘하게 스포일러하고 있다. 한지원이 김선우에게 시각장애인을 위한 오디오도서 목록을 읽어주는 가운데 가장 먼저 언급되는 것이 뒤마의 '몽테크리스토 백작'이었다. 그리고 다음에 나오는 것이 도스토예프스키의 '죄와 벌'이었다. 김선우가 문태주와 만나 힘을 갖추고 다시 돌아와 벌이게 될 복수극 - 아니 심판은 '몽테크리스토 백작'의 전형적인 구조를 따르고 있다. 이장일이 지은 죄와 그에 따른 벌은 '죄와 벌' 안에 담겨 있다. 어쩌면 청년 라스콜리니코프가 죄를 고백한 창녀 소냐는 최수미가 아니었을까? 그녀는 이장일의 죄를 알고 그것을 감춰준다. 언젠가 그는 그녀를 통해 자신의 죄를 투영해 보게 될 것이다. 복수가 아니다. 심판이며 징벌이다.
마침내 이장일의 김선우에 대한 열등감과 죄의식이 한지원에 대한 질투와 만나 악의로 다듬어지려는 모양이다. 비로소 그들은 적이 된다. 가장 친한 친구에서 가장 치열한 적이 되어 만난다. 한지원은 아마 그들이 마지막까지 간직하고 있던 순수일 것이다. 가장 아름답던 그들의 어린시절에 꾸었던 꿈일 것이다. 한지원은 김선우를 꿈꾸었고 이장일은 한지원을 꿈꾸었다. 그러나 더 이상 그들 사이에 순수는 남아있지 않다. 이장일은 그렇게 자신의 과거와 결별한다.
김선우와 이장일의 서로를 시험하며 의심하는 첨예한 대립과 대결이 손에 땀을 쥐게 한다. 서로 자신의 속내를 감추고 끊임없이 상대를 떠본다. 분노와 증오로, 죄의식과 원망으로, 도망치려 하고 쫓으려 한다. 외면하려 하고 그를 찾으려 한다. 보이지 않는 눈이 본다. 닿지 않는 마음이 서로 닿으려 한다. 얽히고 섥힌 감정들이 서로를 옭죈다. 드라마가 극치를 이룬다. 감탄한다.
문태주가 김선우를 찾으려 한다. 문태주와 만나게 되면 김선우는 떠나게 될 것이다. 심판을 위해 그는 떠났다 다시 돌아오게 될 것이다. 멈추었던 시간은 그때부터 다시 흐르기 시작한다. 엇갈렸던 시간들이 다시 만나 흐르기 시작한다. 그 분기다. 시간이 갈라서려 한다. 집중한다.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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