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기를 부린다. 강한 척 하고 싶어한다. 아무렇지 않은 척 자기를 꾸미려 한다. 그래도 괜찮다고. 전혀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돌이켜 보면 내가 그때 왜 그랬을까? 나는 그렇게 잘나지도 대단하지도 멋지지도 않은 사람인데. 그래도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젊음일 것이다.
최안나(유리 분)에 대해서는 안타까움이 있다. 거의 실시간으로 대본을 쓰고 촬영을 해야 하는 우리나라 드라마 문화에서 캐릭터의 비중이란 곧 연기자가 보여주는 존재감에 비례한다고 할 수 있다. 연기력이라거나, 아니면 감히 눈을 떼지 못하게 만드는 매력이거나. 아무래도 신인인 유리로서는 최안나의 미묘한 내면의 감정을 표현해내기에 어려움이 많을 것이다. 그렇지 않아도 드라마의 감정선이 시청자를 화나게 만들 정도로 복잡하고 애매하게 표현되고 있다.
당당해지고 싶다. 자기를 저버리려는 정재혁(이제훈 분) 앞에서, 그리고 자기를 모욕주는 정재혁의 어머니 윤향숙(이혜숙 분) 앞에서. 그래서 짐짓 오기를 부린다. 독하지도 않은데 독하려 하고, 악하지도 않은데 악하려 한다. 괜하게 꾸민 일로 말미암아 조숙희(장미희 분)만 곤란해지고 결국 원망과 함께 비웃음만 사고 만다. 디자이너로서도 책략가로서도 그녀는 한참 미치지 못한다. 심지어 여성으로서도... 그게 싫다. 다른 여자에게 떠밀려 정재혁으로부터 버림받고, 아무 가치없는 존재가 되어 무시당하는 것이. 그래서 그는 강영걸(유아인 분)을 찾아간다.
이미 모든 것이 끝났다. 더 이상 YGM은 강영걸의 것이 아니다. 조숙희가 가지고 있던 회사의 지분 절반이 정재혁에게 넘어갔다. 정재혁은 더 이상 YGM에 있어서의 강영걸의 역할을 인정하지 않을 것이다. 과반의 지분을 가지고 있고 그만한 힘도 가지고 있다. 어떻게 해서든 회사를 살려보겠다고 꾸민 꼼수마저 들통나고 말았을 때 그가 할 수 있는 일이란 이제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았다. 억지로 미련을 가지고 고집을 부려보던가, 아니면 깨끗하게 패배를 인정하고 물러나던가.
아니 그것은 그다지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그렇게 정재혁을 싫어했었다. 정재혁을 죽기보다 싫어하고 있었다. 정재혁과 얽히는 것이 싫다. 정재혁의 이름이 나오는 것만으로도 그리 끔찍하게 싫었다. 그래서 이가영(신세경 분)과도 여러번 본의아니게 다투고 말았다. 정재혁에게 지는 것은 당연히 더 싫을 것이다. 원래의 강영걸이었다면 결코 질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고 순순히 패배를 받아들이지는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강영걸은 그 정재혁 앞에서 순순히 현실을 받아들이고 만다. 태연한 표정으로. 아무렇지 않은 듯한 모습으로. 어른이 되어 있었다.
이가영이다. 남자란 동물이 그렇다. 여자와 얽히면 자꾸 무리를 하게 된다. 멋있게 보이고 싶다. 잘나게 보이고 싶다. 대단하게 여겨지고 싶다. 초라하게 보이고 싶지는 않다. 동정과 연민이 아닌 동경의 눈으로 우러르기를 바란다. 자연에 존재하는 수많은 수컷들 처럼 인간의 남성 역시 여성의 선택을 받기 위해 살아가는 존재일 것이다. 남성의 등을 떠미는 것도, 남성의 손을 붙잡아주는 것도 결국 여성이다. 세상은 남성이 지배하지만 남성을 지배하는 것은 여성이다. 하물며 호감을 가진 여성에 대해 그녀를 사이에 두고 경쟁하는 상대로부터 비웃음을 당하는 것은 도저히 참을 수 없다. 기왕에 진 싸움이라면 깨끗이 포기한다. 모양이라도 나쁘지 않게 자존심이나마 세운다.
정재혁이 YGM의 뜻을 물었을 때 강영걸이 'Yellow Great Mountain'이라 대답한 것이 그것을 말해준다. 원래는 영영어패럴이라는 회사이름과 마찬가지로 영걸과 가영의 영어표기에서 첫글자를 따 만든 이름이 YGM이었을 터다. 하지만 강영걸은 정재혁의 물음에 가영의 이름이 담긴 원래의 뜻 대신 과거 동대문의 큰손 황태산의 투자를 받아내고자 임의로 만들어 붙인 가짜이름을 대고 만다. 더 이상 YGM과 자신은 상관없다. 아니 그보다 자신과 이가영은 더 이상 아무런 상관도 없다. 다른 무엇보다 정재혁에게 이가영에 대한 자신의 진심이 담긴 이름을 들려주고 싶지 않다. 쿨한 척 당당한 척 그는 그렇게 아무렇지 않게 이름을 던지고 정재혁의 방을 나선다.
방을 나서는 순간 마주친 이가영 앞에 더 이상 사장이 아니라 말하는 그 모습처럼 그 또한 허세이고 오기였을 것이다. 아무렇지 않은 척 했지만 아무렇지 않은 게 아니다. 태연한 척 짐짓 밝은 표정을 하고는 있지만 결코 태연한 것이 아니다. 당당한 척 아무리 자기를 꾸미려 해도 당당하지 못하다. 이가영이 떠난 빈자리가 너무 크게 느껴진다. 환각까지 보인다. 그래도 돌아서 손벌릴 수는 없다. 먼저 자기를 떠나간 이가영에게 손을 내밀 수는 없다.
아니 내밀려 했다. 마침 핑계도 생겼다. 정재혁에게 받은 돈으로 직원들에게 일일이 그동안 주지 못했던 돈을 나누어주었다. 그리고 그 가운데 이제는 떠났지만 이가영의 이름이 있었다. 자기가 직접 쓴 그 이름을 핑계로 다시 이가영을 만나려 했었다. 만나서 무슨 이야기를 할까? 그런 생각도 없었을 것이다. 아무런 다른 계산 없이 그저 이가영을 만나고 싶다. 그런데 하필 그 순간 이가영은 정재혁과 함께 회사를 나와 차에 오르고 있었다. 현실을 깨닫게 된다. 이가영은 떠났고 정재혁에게로 가버리고 남았다. 정재혁에게 진 자신은 이렇게 혼자 남았다.
아마 생각한다. 과연 그때 강영걸이 억지로라도 이가영을 붙잡아세우고 다시 돌아와달라 말했다면 이가영은 어떻게 대답했을까? 이가영의 환각을 보고 있는 것처럼 도저히 이가영 없이는 안되겠다 솔직하게 털어놓고 다시 돌아와달라 졸랐다면 이가영은 어떻게 대답했을까? 모양이 구겨지더라도, 그래서 한심하게 보이더라도, 하지만 두려웠을 것이다. 그렇게까지 했는데 이가영에게 거절당했다. 억지로 핑계를 만들어 이가영을 만나러 갔는데 이가영은 정재혁과 함께 있었다. 자신이 그렇게 초라하고 비참하게 여겨진다. 그것은 차마 감당하기 힘들다. 강영결은 약자다. 이제까지의 그의 삶이란 좌절과 굴욕이 너무 어울리는 그런 삶이었다. 다시 좋아하는 여자 앞에서 그같은 비참한 자신을 인정하고 싶지 않다.
그래서 최안나는 강영걸을 만난다. 강영걸도 최안나를 만난다. 서로의 앞에서 그들은 비참해지지 않을 수 있기에. 서로의 앞에서 그들은 더 이상 초라하지도 비루하지도 않다. 그들은 동지다. 동병상련의 동반자다. 사랑과는 다르다. 그들은 서로를 사랑하지 않는다. 아니 사랑할 수 없다. 사랑하는 순간 그들은 결코 보고싶지 않은 자신의 모습을 상대로부터 보게 될 것이다. 그러나 위로는 얻을 수 있다. 허튼 기만에 불과할 테지만 그렇게라도 그들은 현실로부터 도망칠 수 있다.
정재혁에게 거절당하고 최안나는 강영걸을 찾는 것은 그래서다. 이가영으로부터 거절당했다 여긴 강영걸도 그런 최안나를 받아들인다. 그리고 하필 이가영이 그것을 본다. 이가영은 이 두 사람보다 훨씬 더 인내에 익숙하다. 이가영은 참는다. 인내야 말로 이가영의 허세고 오기다. 이렇게 세 사람의 감정이 서로 엇갈린다. 솔직하지 못한 허세와 오기 때문이다. 그 또한 현실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어린 나약함이기도 할 것이다. 그들은 아직 멋지고 대단하고 아름다워야 한다.
정재혁도 조금은 성장했을 것이다. 엄격한 아버지가 있었다. 자신만을 생각해주는 어머니가 있었다. 아버지의 그에 대한 기대가 크다. 사사건건 그를 가르치고 훈계하려 든다. 어머니 또한 자신을 위해 자신의 사생활에마저 깊이 관여하려 든다. 어려서 부모를 잃은 강영걸등과는 달리 그는 아직도 부모의 그늘 아래에 있다. 다른 사람들처럼 굳이 허세와 오기로서 자신을 감출 필요가 없다. 솔직하게 자기의 감정을 드러내더라도 그것을 현실로 이루어낼 수 있는 충분한 힘이 그에게는 있었다. 부모의 힘이었다. 부모로부터 벗어나려 하지만 그같은 부모로부터 받은 혜택받은 환경을 거부하고 싶은 마음은 없다. 말 그대로 어린아이다.
정재혁이 최안나를 사랑한 과정도 그랬다. 최안나의 말처럼 정재혁이 최안나를 저버리고 이가영에게로 향하는 순간도 그렇다. 그는 순수하게 욕망했을 뿐이었다. 그 욕망을 굳이 감추려 하지 않았을 뿐이었다. 강영걸과는 다르다. 그는 후회하면서도 그 순간 이가영에 대한 감정에 솔직하지 못했다. 그는 두려움에 익숙하다. 좌절과 포기에 익숙하다. 그래서 자신의 욕망을 드러내는데도 솔직하지 못하다. 짓눌려 있고 일그러져 있다. 그러나 정재혁은 다르다. 하지만 달라졌다. 그럼에도 이가영은 여전히 정재혁을 사랑하지 않는다.
처음으로 좌절이라는 것을 겪게 되었다. 그것은 차라리 절망이다. 이가영은 자신을 돌아봐주지 않는다. 어쩌면 앞으로도 영원히 자신을 돌아봐주지 않을 것이다. 분노해야 한다. 원망해야 한다. 어떻게든 자신의 것으로 만들고자 집착해야 한다. 그런데 이가영을 대하는 정재혁의 모습은 무언가 무거운 것을 벗어던진 듯 홀가분해 보인다. 받아들이게 된 것이다. 자기 뜻대로 되지 않는 것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을. 김실장과의 관계도 그렇게 회복된다. 김실장의 양보도 있었지만 정재혁의 인정도 있었다. 어른이 되어간다. 어른이 되어 성숙한 감정을 다스릴 줄 알게 된다. 한 걸음 앞서가게 된다. 한참 어리던 정재혁이 부모의 보살핌 속에 좌절마저 받아들일 수 있게 된다.
솔직히 화가 난다. 어른이 된다면 보다 절박한 환경에서 치열하게 살아왔던 강영걸과 최안나가 먼저여야 했을 것이다. 이가영이 정재혁보다 먼저여야 했다. 하지만 채 무르익기도 전에 거친 세상과 만나야 했던 그들에게는 반드시 지켜야 하는 약한 부분들이 남아 있었다. 미처 자라지 못하고 오히려 세상에 시달리며 약해진 치명적인 부분들이다. 밭에서 충분한 영양과 보살핌을 받으며 자란 작물은 크고 곧지만 들판에서 아무렇게나 자란 작물들은 억세지만 작고 뒤틀려 있다.
과연 강영걸과 최안나, 이가영은 정재혁처럼 어른이 될 수 있을까? 아니면 정재혁의 지금의 설익은 가식이 다시 본모습을 드러내게 될까? 무엇보다 정재혁은 그럼에도 부모로부터 독립할 수 있을까? 부모로부터 벗어나기 전까지는 아직 다 자란 것이 아니다. 아버지의 그늘로부터, 어머니의 품으로부터, 보다 냉정한 바깥세상에 알몸을 드러낼 수 있어야 한다. 정재혁에게 있어 극복해야 하는 것은 강영걸이 아니라 그의 부모다. 부모를 이긴다면 그는 강영걸도 이길 수 있다. 아니 이기지 않아도 그는 이긴 것이다. 이긴다는 것은 지금 바로 여기에 존재한다는 것이니까.
사춘기소년 정재혁의 질풍노도의 시기는 짐짓 이가영의 도시락을 모조리 먹어치우는 심술에서도 고스란히 드러난다. 이가영이 자기를 좋아하지 않는 것을 알고 있다. 좋아하지 않으리라는 것도 인정하고 있다. 그러면서도 이가영을 좋아한다. 그런데도 여전히 이가영을 좋아한다. 그 정도 심술은 괜찮을 것이다. 비어버린 도시락통에 뚱한 표정을 짓는 이가영의 모습을 보고 있으면 어쩐지 정재혁의 의도에 공감하게 된다. 왠지 괴롭혀주고 싶다. 매력적이다.
아무튼 그럼에도 도저히 납득이 가지 않는 것은 이 무슨 뜬금없는 '패션왕' 대회인가? 설마 굳이 회사에 속해 있지 않아도 참가자격이 주어진다는 것이 복선이 되는 것일까? 패션업계에서 인정받고 성공해서가 아니라 정재혁이 있는 J패션으로부터 '패션왕'으로 마침내 인정받았기에 <패션왕>이 되는 것이었을까? 지금으로서는 정재혁과 이가영이 한 편이다. 강영걸과 최안나가 한 편이다. 어울리지 않는 조합이다. 파열음이 예상된다. 그 앞에 '패션왕'이라는 오디션 전성시대에 어울리는 서바이벌이 놓여져 있다. 참으로 멀리 돌아와서 엉뚱한 결론에 이르고 만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그것이 단순한 패션경연만은 아닐 것이라는 점이다. 디자인 자체도 중요하지만 상업적인 실적도 중요하다. 얼마나 자신의 디자인을 시장에 팔아 수익을 얻는가? 강영걸은 J패션의 밖에 있다. 이가영은 정재혁과 함께 J패션 안에 있다. 김실장이 있다. 조순희의 딸 신정아(한유이 분) 역시 한 몫 거든다. 조순희도 참가할 것이다. 구도가 분명해진다. 하지만 역시 그동안의 전력으로 보아 이조차 일관되게 앞으로 결론까지 이어지게 되리라고는 기대하지 않는다. 분명 그 과정에서 모든 것을 초기화시키는 사건이 일어나고 말 것이다. 어쩌면 그것은 강영걸의 반격이거나, 조순희의 의외의 일격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참 복잡하다. 그 복잡한 것이 매력이다.
현실이란 혼돈이다. 사람이 산다는 것은 혼돈 속에 살아가는 것이다. 정해진 것이란 없다. 명확한 것이란 없다. 드라마는 별세계다. 그것이 이 드라마가 갖는 가장 큰 문제다. 드라마란 판타지일 것이다. 현실과 다른 결정된 명확한 구도가 있다. 그것을 기대하고 본다. 그런데 드라마 자체가 현실에서처럼 혼돈이다. 서로 엇갈리고 부딪히고 얽히고 찢겨나간다. 종잡을 수 없다. 현실에서처럼 한참을 고민하고 이해하지 않으면 안된다. 물론 그것이 드라마의 매력이기는 할 테지만 말이다.
벌써부터 오기로 인해 후회할 일을 만든다. 이가영이 강영걸을 떠나온 것이나, 강영걸이 이가영을 포기한 것이나, 최안나가 정재혁에게 강한 모습을 보이려 하는 그것들이다. 정재혁은 그나마 약한 자신을 인정한 것 같다. 그러나 과연 그를 둘러싼 부모의 단단한 껍질은? 흥미롭다. 재미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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