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

사랑비 - 진부함과 지루함, 참신한 의도가 참신한 결과로 이어지지 않음을 알다.

까칠부 2012. 5. 2. 10:06

진부하다. 지루하다. 하필 재벌아들이다. 돈많은 사모님이 힘을 이용해 상대를 곤경에 빠뜨린다. 자기만 아는 현실로부터 도망치려는 일방적인 사랑도 있다. 그를 붙잡아 세우려 눈물을 흘리는 비련도 있다. 어느새 드라마가 신파가 되고 있다. 하기는 원래 사랑이야기란 그렇다.


서로 사랑해서 함게 사귀다 결혼까지 이르게 된다. 결혼해서도 아들딸낳고 문제없이 행복하게 살다가 한 날 한 시에 누구도 아쉬움이나 미련따위 없이 함께 세상을 마친다. 얼마나 아름다운가? 그야말로 이상적인 사랑일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면 드라마가 되지 않는다. 하다못해 마지막에 먼저 세상을 떠난 사랑에 대한 그리움과 아쉬움이라도 있어야 한다. 그래야 드라마가 된다.


재벌아들이란 얼마나 대단한가? 잘나가는 포토그래퍼인 서준(장근석 분)에게 위기감을 느끼게 하려면 그래도 재벌아들쯤은 되어야 할 것이다. 자식세대의 사랑만으로는 부족하다. 김윤희(이미숙 분)에게 이미 심각한 병이 있지만 그것만으로는 서인하(정진영 분)의 간절한 마음을 감당하기에는 아쉬움이 있다. 백혜정(유혜리 분)이 그래서 악역으로 등장한다. 상당한 영향력이 있는 기업의 경영자로서 그만한 부와 권력이 있다. 그다지 대단할 것 없는 김윤희의 삶을 흐트러 놓기에 충분할 정도다. 백혜정이 작심하고 악의를 드러내게 되면 서인하조차 감당하기 힘들다. 이쯤 되어야 사량이야기도 재미가 있어진다. 


바로 그게 진부하다는 것이다. 제목이 사랑비다. 기왕에 과거의 낭만적인 사랑이야기가 있었다. 긴장은 위기로부터만 찾아오지 않는다. 긴장이란 위상차에너지다. 과거의 사랑과 현재의 사랑을 대비한다. 같은 배우다. 젊었을 적의 서인하와 자식인 서준이 원래 같은 배우다. 김윤희 역시 젊었을 때와 지금의 딸 정하나를 같은 배우가 연기한다. 그런데 서로 사랑하는 방식이 다르다. 더구나 어느새 장년의 나이에 접어든 전혀 다른 모습의 서인하와 김윤희 역시 과거의 연장에서 다른 사랑을 나누고 있다. 충분히 흥미를 불러일으킬만하지 않은가?


처음 드라마의 기획안이 통과된 이유가 바로 그것일 것이다. 충분히 경쟁력이 있다고 보았기에 당당히 드라마의 격전지에 다른 경쟁작들과 함께 편성하고 있었을 것이다. 드라마라는 것이 한두푼 들어가는 것도 아닌데 막대한 제작비애 중요한 광고수입까지 포기해가며 기대도 없는 드라마를 편성할 까닭이 없다. 문제라면 구상과 실제란 다를 수 있다는 점일 것이다. 기획단계에서는 훌륭했지만 그것을 구현하는 단계에서 문제가 드러날 수 있다. 과연 어떻게 같은 배우를 가지고 서로 다른 이름으로 서로 다른 사랑을 하게 하여 차별화시키는가? 더불어 같은 이름인데 서로 다른 배우가 서로 다른 모습이 되어 다른 사랑을 보여주도록 하는가? 더구나 장근석과 윤아는 아이돌이다. 일본의 판권까지 생각한다면 장근석의 활용에도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


그래서 편하게 간다. 70년대의 서인하과 2010년대의 서준 사이에는 그다지 차별성이 없다. 김윤희와 정하나는 말할 것도 없다. 여전히 순정적이고 여전히 비련이다. 2010년의 서준은 70년대의 서인하와 이동욱을 더한 캐릭터일 것이다. 그나마 바람둥이 캐릭터까지 빼앗긴 2010년의 이선호(김시후 분)는 존재감이 없다. 나쁜 남자이지만 알고 보면 착한 남자다. 다른 여자들에게는 나쁜 남자지만 오로지 정하나 앞에서는 착한 남자가 된다. 로망일 것이다. 판타지다. 장근석을 위해 이보다 좋을 수는 없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70년대와 2010년의 사랑이 무슨 차별성이 있던가? 서준이 서인하여도 상관없고 서인하가 서준이어도 상관없다.


김윤희와 정하나 역시 둘이 한 사람이어도 전혀 상관이 없다. 단지 정하나가 김윤희보다는 조금 더 솔직하다. 아니 김윤희 역시 은근히 자기주장이 있었다. 홧김에 이동욱과 사귀고, 그러면서도 서인하를 만나고자 직접 먼 길을 찾아가기도 한다. 속엣말을 못하고 끙끙 앓던 것은 처음의 정하나도 마찬가지였고, 자기의 감정을 알고 솔직해질 수 있었던 것은 나중의 김윤희 또한 마찬가지였다. 도식적이다. 정하나의 통통튀는 모습이 오히려 어색하게 보이는 이유다. 충분히 과거의 김윤희와 차별과 구별이 이루어지고 있지 않다.


그러니 재벌 2세가 필요한 것이다. 드라마에 긴장을 불어넣기 위해서. 서준과 갈등하며 정하나를 유혹한다. 더구나 재벌 2세 한태성(김영광 분)은 서준과는 다른 마냥 좋은 남자다. 차라리 이쪽이 대비가 된다. 차라리 처음의 70년대의 이야기가 없었으면 어땠을까 계속 생각하게 되는 이유다. 이야기가 번잡스러워진다. 70년대와 2010년, 그리고 서준과 한태성, 그나마 이선호의 동생 이미호(박세영 분)는 아직 존재감이 그다지 없다. 그녀의 존재감까지 커진다면 그때는 수습불가능이다. 서인하와 김윤희를 동반자살로 처리해야 할 지 모른다.


백혜정은 차라리 좋은 사람으로 남아있어도 좋았을 것이다. 김윤희를 협박하기보다 울면서 애원했으면 어땠을까? 협박하다 말고 눈물로 하소연을 해온다. 무리하게 백혜정을 악역으로 만들면서 장년의 서인하와 김윤희의 사랑 역시 뻔한 치정극이 되어 버리고 말았다. 과거에 순수한 사랑이 있었으니 지금도 순수하게 남았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그렇지 않아도 서준과 정하나로 인해 과거의 시간이 나뉘어진 상황이다. 서준과 정하나가 대비를 이룬다면 서인하와 김윤희는 일관되게 이어나가는 것이 좋다. 아니었다면 역시나 말했듯 차라리 70년대를 빼고 지나간다. 어째서 굳이 서인하와 김윤희까지 과거와 달라야 하는가? 무리하게 차별성을 부여하느라 서준도 정하나도, 서인하도 김윤희도 어정쩡하게 끝내고 말 뿐이다.


다른 것들은 그저 진부한 클리셰다. 장르적 전형이다. 부모의 이야기를 알고 혼자서 고민하며 이별을 결정하는 남자와 그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여자. 끝내 남자를 잊지 못하고 여자는 우연처럼 찾아온 기회를 억지로 붙잡아 그의 함께하고자 한다. 남자는 밀어내려 하고 여자는 다가가는 방법을 모른다. 하지만 그럼에도 두 사람은 진심으로 사랑하는 사이다. 자식세대의 사정을 안다면 서인하와 김윤희 역시 다르지 않을 것이다. 좋은 소재였을 텐데. 하다못해 그 세부적인 내용만이라도 참신하게 바꾸었으면 어땠을까 싶다. 대사며 연출들은 이제까지 없던 색다른 것들로 채워 놓을 수만 있었다면. 어디선가 본 듯한 장면과 대사들이 채널을 돌리고 만다.


항상 깨닫는다. 기획안과 결과물이 항상 같을 수는 없다. 그것이 기술이고 실력이다. 배우들은 매력적이다. 화면도 예쁘다. 이야기도 재미있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한 가지가 빠진 것 같다. 파스타를 먹는데 면이 일반 소면이다. 소스가 충분히 배어나지 않는다. 고민이 필요하다. 아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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