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

추적자 - 소시민 백홍석, 권력으로부터 배반당하다!

까칠부 2012. 6. 5. 11:02

지난 대선때 어느 아주머니의 말이 아직도 선연하다.

 

"그분이 다 해주실 거야."

 

과연 그럴까?

 

어쩌면 참으로 절묘하다 할 것이다. 정치인과 아이돌과 그리고 법정... 하필 모두가 사람들이 믿고 의지하며 따르는 대상들이었다. 그리고 바로 그 대상들에게 철저하게 배반당하는 현장이었다.

 

당황스러웠을 것이다. 딸이 죽었다. 그래서 딸을 죽인 범인을 잡아다 법정에 세웠다. 그런데 누구도 딸의 이름을 말하는 사람이 없다. 딸 또래의 소녀들이 모여 오히려 자신들 또래의 딸을 죽인 범인의 무죄석방을 빌고 있다. 무엇이 잘못된 것일까?

 

하지만 바로 그것이 권력이라는 것이다. 노동자들이 모여 있다. 해직된 동료 노동자의 복직을 주장하는 집회였다. 강동윤(김상중 분)은 멋진 연설로 그들의 마음을 사로잡는다. 그들의 편에 서겠다. 그들의 권력이 되어주겠다. 그들의 친구가 되겠다. 그래서 지지자들을 모았다. 그런데 누군가 강동윤의 감춰진 부분을 들춰내어 상처를 입히려 한다. 사람들은 어떻게 반응할까?

 

물론 자기 자신을 위해서다. 아이돌의 팬덤이나 정치인의 지지자나. 내가 좋다. 내가 바란다. 그래서 위해주려 한다. 그래야 내가 기분이 좋으니까. 내가 마음이 놓이니까. 그는 내 자신이다. 이기가 이타가 되고 이타가 이기가 되는 또 하나의 경우다. 다른 말로 그것을 투사라 부른다. 강동윤의 연설은 그래서 매우 정확했다. 당신들의 친구가 되어주겠다. 권력이 되어주겠다. 함게 하겠다. 나는 당신들의 것이다. 강동윤을 건드리는 것은 바로 그들 자신을 건드리는 것이다.

 

그렇다면 과연 강동윤은 말처럼 그들을 위해줄 것인가? 당장 가장 먼저 강동윤의 연설을 쫓아 촛불을 껐던 백홍석(손현주 분)이 있다. 그는 심지어 강동윤에게 죽은 딸이 그동안 모아둔 동전을 후원금으로 기부하고 있었다. 그의 앞에서 무릎까지 꿇고 있었다. 지켜주겠노라. 반드시 지켜주겠노라. 정작 자신의 딸을 죽이도록 사주한 강동윤의 경호를 백홍석이 맡는 것은 이 얼마나 기막힌 역설인가? 그래서 강동윤은 백홍석에게 어떻게 대하고 있던가?

 

한류스타 PK준은 어떠한가? 그의 팬들은 그 순간에도 그의 무죄를 믿고 있었다. 그가 죄가 없음을 믿고 석방을 간절히 기원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런 팬들에게 PK준이 돌려준 것은 철저한 거짓과 기만 뿐이었다. 무대 위에서 연기하듯 그렇게 연기하는 자신을 보여줄 뿐이었다. 아무런 미안함도 고마움도 없이. 얼마나 우스웠을까? 자신을 위해 눈물을 흘려주고 환호해주는 팬들이. 그들은 단지 자신의 영화를 위한, 그리고 무죄석방을 위한 수단에 불과할 뿐이었다.

 

모든 것이 그렇게 일방적이다. 팬이 있기에 스타도 있다. 팬의 지지가 있어 스타도 될 수 있었다. 하지만 스타란 그 자체로 권위다. 팬에 의해 스타가 되었어도 스타가 된 이상 그는 팬과 전혀 다른 존재가 된다. 팬에 의해 자발적인 복종을 받고 그들을 자신의 영향 아래 둔다. 자신의 말 한 마디 행동 하나에 일일이 반응하는 팬들의 모습을 확인하게도 된다. 그것은 도취다. 팬 한 사람 한 사람의 의견따위 전체 팬들의 의견에 비하면 일부에 불과하다. 전적인 자신과 작아지는 개인의 팬들, 숫자로 계량화되며 인격은 소멸된다. 그나마 주위의 눈이 정도를 넘어서는 것을 막아서고 있을 뿐이다. 그렇더라도 그로 인한 문제는 지금도 얼마나 많이 일어나는가.

 

권력은 더 고약하다. 그나마 스타와 팬이란 자발적 동의에 의해 성립되는 관계다. 그러나 권력에는 폭력이 동반된다. 거부나 반발에 대해 강압으로써 강제할 수 있는 힘이 주어진다. 권력 역시 권력을 쥐기 위해서는 지지자의 존재를 필요로 하지만, 이미 권력을 쥐고 난 다음에는 더 이상 자신을 거스르는 지지자따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소수의 작은 의견따위 얼마든지 무시해도 좋을 힘이 있고, 그 힘을 뒷받침하는 지지자가 있다. 권력과 그를 지탱하는 다수의 억압 아래 개인은 소멸한다. 백홍석과 같은 사소한 개인따위 얼마든지 무시되어도 좋다.

 

법이란 얼마나 우스운가? 한 사회에서 기득권과 그렇지 못한 소외된 이들을 나누는 기준은 어쩌면 하나일 것이다. 법을 지켜야 하는 대상으로 보는가? 이용하는 대상으로 보는가? 법에 종속되면 국민이다. 법과 같은 선상에 있다면 시민이다. 법의 위에 있다면 그들은 기득권이다. 보통의 국민들은 그저 법을 지킬 것을 생각하지만 누군가는 기존의 법을 이용하고, 그에 앞서 아예 자신들을 위한 법을 만들 것을 생각한다. 법이란 단지 도구이기 때문이다. 얼마나 유용하게 도구를 확보하고 그것을 활용하는가? 하지만 그것을 가리기 위해 기득권은 악법도 법이라는 거짓말을 만든다.

 

법이 정의를 지키는 것이 아니다. 법을 수단으로 정의를 지키는 것이다. 사람이 정의를 지킨다. 사람이 정의롭지 못하다면 법도 정의롭지 못하다. 사람이 정의롭지 못한데 법으로 정의를 지키는 법은 없다. 그리고 정의롭지 못한 사람들은 대개 능력도 좋다. 아니 정의롭지 못한 사회에서 능력이 좋다는 것은 정의롭지 못하다는 뜻과도 통한다. 그럼에도 법이 자신을 지켜주리라 믿는 소시민이란 얼마나 가련한 존재인가? 하필 백홍석의 직업도 그래서 형사다.

 

경찰이란 법을 지킨다. 질서를 지킨다. 체제를 지킨다. 정치와 권력, 법과 정의, 가치와 질서, 그러나 정작 자신이 그토록 지키고자 했던 그것들에 의해 배반당하고 마는 현실이란 얼마나 참혹한가. 역설일 것이다. 법을 지키는 경찰이 법에 배반당하고, 권력을 지켜야 하는 경찰이 권력에 능멸당한다. 가치와 질서로부터도 조롱당하고 모욕당한다. 작가의 의도가 자칫 악의적이기까지 하다.

 

어찌되었거나 우습기 짝이 없는 장면이었을 것이다. 사고를 당했다. 그래서 목숨을 잃었다. 그런데 그 목숨을 잃은 피해자의 사생활이 도대체 무슨 상관이던가? 마약을 하고, 원조교제를 하고, 그렇다고 사고를 당해 죽어야 하는 어떤 당위가 되던가? 세상에는 지켜야 할 목숨도 지킬 가치가 없는 목숨도 없다. 그런데도 아직 전근대에 머물러 있는 사고는 목숨의 가치를 계량한다. 정조의 가치를 계량하고, 권리의 가치를 계량하고, 그로써 판단하려 노력한다. 모르긴 몰라도 백수정이라고 하는 억울하게 희생된 어린 영혼을 가장 모욕주고 상처주는 이들은 대중들 자신이 아닐까? 마약과 원조교제는 억울한 죽음마저 묻어버리기에 충분한 도덕적 소재다.

 

유능하다. 바로 그것이 유능하다는 것이다. 법을 이용할 줄 안다. 그리고 사람의 심리를 이용할 줄 안다. 그래서 기득권이다. 지배하는 자리에 있는 것이다. 백홍석은 그것을 못한다. 황반장(강신일 분)조차 일개 반장에 불과하다. 최정우(류승수 분)는 그래서 그것을 안다. 그의 뿌리깊은 절망과 체념은 그로부터 비롯된다. 그러나 그것을 받아들이기에는 그는 아직 너무 순수하다.

 

강동윤 자신의 이야기다. 존엄하고 싶다. 구차해지고 싶지 않다. 비굴해지고 싶지 않다. 당당해지고 싶다. 어쩌면 그것은 자신에 대한 모멸이기도 하다. 자기연민이다. 자기를 가엾이 여기고 그로써 의지를 일깨운다. 전형적인 정치인이고 권력자다. 자기를 불쌍하게 여기되 다른 이를 불쌍하게 여기지는 않는다. 그래서 그의 앞에 대중이란 단지 숫자에 불과하다. 자신을 위해 존재하는 하나하나의 숫자에 불과하다. 올곧지만 다른 이를 전혀 배려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그는 확실히 정치인이다.

 

서지수(김성령 분)가 상처입고 마는 이유다. 그는 자신만을 사랑한다. 자신만을 연민한다. 서지수가 어떻게 해도 그는 서회장(박근형 분)의 딸일 뿐이다. 서회장과의 사이가 틀어진 이상 더 이상 서지수는 그의 아내가 아니다. 어차피 신혜라(장신영 분)는 그의 사랑을 기대하지 않는다. 필요로써만 대한다. 약속이 아니라 계약이다. 단지 관계란 비즈니스로서만 존재한다.

 

어째서 인간은 슬픈가? 어째서 인간의 사회란 모순과 부조리 속에 있는가? 오랜세월 수많은 지식인, 학자, 사상가들이 고민해 온 문제일 것이다. 백홍석의 슬픔이 바로 우리의 슬픔이다. 그의 좌절과 분노가 우리 자신의 좌절과 분노다. 그를 둘러싸고 있는 모든 모순과 부조리가 우리가 맞닥뜨리고 있는 것들이다. 그래서 드라마는 슬프다.

 

비극을 기대한다. 희망조차 없는 극단의 절망과 좌절의 마지막을 기대한다. 희망이란 분노조차 갖지 못하게 만드는 마약과도 같을 것이다. 분노하여 일어나고 분노하여 싸운다. 세상을 바꾼다. 너무 큰 적이다. 이길 수 없는 적이다. 하지만 이길 것이다. 그것이 또한 슬프다. 몰입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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