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아마 톨스토이는 그렇게 정의했을 것이다. '사랑'으로 산다고. 그러나 때로 사람은 사랑으로 인해 죽기도 한다. 어째서일까?
인간세상의 모든 불행이 들어있었다는 판도라의 상자에서 가장 마지막까지 남아 있던 것은 다름아닌 희망이었다. 불행을 견디는 힘이기도 하겠지만 사실상 희망 자체가 불행의 시작이기도 한 때문일 것이었다. 차라리 희망이라도 없으면 포기라도 한다.
황반장(강신일 분)이 오랜 동료인 백홍석(손현주 분)을 배신하고자 마음먹은 이유였다. 그리고 서회장(박근형 분)이 아들 서영욱(전노민 분)을 위해 유상증자를 통해 불법을 저지르고, 사위인 강동윤(김상중 분)과 심지어 딸인 서지수(김성령 분)마저 내치려한 이유이기도 했다. 어째서 강동윤은 이름조차 한 번도 들어보지 못한 한 소녀를 죽일 결심을 하게 되었을까?
가난이란 체념이다. 절망조차도 없는 포기이며 만족이다. 차라리 그 10억만 없었다면. 그 10억이라는 돈으로 인해 허튼 기대나마 가지지 않을 수 있었더라면. 그랬더라면 그는 여전히 황반장이었을 것이다. 백홍석과의 의리를 지키려 모든 것을 포기하려 하는 당당한 황반장으로서 남아 있을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이미 절대 포기할 수 없는 희망을 보았다. 다른 무엇도 아닌 아내와 자식들을 위한 희망이었다. 그는 가장이기도 했다.
서회장은 자신을 향해 손을 흔들던 어린 서영욱에게서 어떤 울컥하는 감동을 받았었다고 했다. 아등바등 어떻게든 더 많은 돈과 더 힘을 가지려 애쓰던 그에게 자신을 향해 웃어주는 서영욱이란 그가 존재하는 이유였다. 짐승이 아니었다. 단지 먹이를 탐하는 짐승이 아니었다. 그것은 단지 본능을 넘어선 추악한 탐욕이 아니었다. 아들을 위한 것이었다. 저 웃는 모습을 위한 것이었다. 비로소 살아갈 힘을 얻는다. 자신의 행동에 의미와 존엄을 부여한다. 더 탐욕스러워도 좋다. 더 비열하고 잔인해도 좋다. 교활하고 난폭해도 좋다. 자신은 서영욱의 아버지이며 모든 것은 아들 서영욱을 위한 것이다. 그리 만들 것이다. 그래서 서회장은 기꺼이 아들을 위해 자존심까지 꺾어가며 강동윤에게 협상을 시도하게 된다. 아들에 대한 사랑이 자존심보다 강했다. 물론 딸에 대한 사랑보다도 더 강했다. 그를 존재하게 한 이유일 테니까.
강동윤 역시 백수정(이혜인 분)의 존재만 아니었다면 이미 그 단계에서 모든 꿈을 접고 패배를 받아들이고 말았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오히려 친아들 강민성(남다름 분)보다 백홍석의 딸 백수정 쪽이 강동윤과 더 가깝다. 백수정이 희망이었다. 그래서 그녀를 죽였다. 희망을 부여잡기 위해. 그리고 백수정의 어머니 송미연(김미연 분)까지 불행하게 목숨을 잃고 말았다. 자신의 꿈을 위해. 이제 그는 더 이상 멈출수조차 없는 지경에 이르고 말았다. 이제 그가 모든 것을 포기한다면 이제까지 자신의 꿈을 위해 희생시켜온 모든 것이 의미를 잃게 된다. 그는 아버지와 누이의 죽음마저 밟고 여기까지 왔다. 앞으로 계속 나아가지 않으면 안된다.
사랑이란 희망이다. 꿈이다. 그래서 백홍석도 아내 송미연과 딸 백수정과 함께 가난할 수 있었다. 그들과 함께라면 소박하나마 보다 나은 내일을 꿈꿀 수 있었다. 과거에도 그랬었고, 지금도 그러하며,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그래서 사람은 살아간다. 아니 과거가 슬프고 현재가 고단하더라도 미래에 대한 희망이 있다면 사람은 어떻게든 살아갈 수 있다. 강동윤이 애써 과거의 아버지와 거리를 두려하는 이유다. 현재의 서회장의 가족들과, 심지어 자신의 아들 강민성과도 거리를 두고 있는 이유다. 그녀의 곁에는 신혜라(장신영 분)만이 자리하고 있다. 그녀에게서 강윤성은 여성을 거세할 것을 주문한다. 그에게 필요한 것은 함께 미래를 만들어나갈 파트너다. 이제 백홍석은 그런 딸 수정과 아내 송미연을 위해 테러리스트가 되고자 한다. 악을 품고 죄를 짓고자 한다. 그것은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정당화된다. 사랑이 죄가 되고 희망이 악을 머금는다.
사람이 슬픈 이유다. 사랑하니까. 희망이라는 것이 있으니까. 누군가를 위해서. 무언가를 간절히 바래서. 그래서 서회장은 죄를 짓고 악을 저지른다. 강동윤 역시 그 희망을 위해 태연히 악을 저지르고 그 짐을 짊어지게 된다. 황반장 역시 마찬가지다. 백홍석의 오랜 친구였던 윤창민(최준용 분)은 아니었을까? 가족이라는 희망이 사라졌을 때 서지수가 오로지 강동윤만을 위해 희생하려 하는 이유일 것이다. 이제는 강동윤만이 희망이다. 자신을 포기하듯 양심도 포기한다. 아니 양심이란 필요없이 모든 것은 그를 위해 정당화된다.
모두는 선량하다. 선량한 얼굴을 하고 있다. 유일하게 악한 것이 강동윤이다. 그에게는 지금 마주할 희망이 없으니까. 사랑도 없다. 아들과 함께하는 장면이 없다는 것이 때로 서럽다. 사랑을 만났을 때 그들은 선량해진다. 희망을 만난 순간 그들은 누구보다 선한 얼굴을 하고 있다. 그러나 바로 그 순간 그들은 죄를 머금는다. 악을 품는다. 황반장의 배신과 서회장의 악이 바로 그것이다. 사람은 이기적이어서도 죄를 짓지만 이타적이어도 죄를 짓는다. 지극한 이타야 말로 지극한 이기다.
아이러니 아니겠는가? 한 여자의 남편이고 두 아이의 아버지다. 그를 위해 자신의 역할에 충실하려 했다. 그를 위해 오랜 동료에게 총을 겨누고 미안하다는 말을 읊조리며 그를 적에게 넘기려 안간힘을 쓴다. 아들을 사랑하는데 어째서 딸을 그리 잔인하게 내치는가? 아들을 위해서 불법을 저지르고 악을 퍼뜨린다. 수많은 사람을 짓밟고 희생시킨다. 사람은 사랑을 위해 살아간다. 희망을 위해 살아간다. 그래서 더 잔인해지고 난폭해질 수 있다. 그럼에도 그들은 간절하고 선량하다.
울컥 눈물이 나올 것 같았다. 우리 아버지도 그랬을까? 황반장도 그랬기에 아들을 위해 배신을 결심했을 것이다. 윤창민 역시 딸을 위해 백홍석을 뒤에서 내리치려 했다. 그나마 백홍석은 지켜야 할 딸마저 없다. 딸의 복수라고 하는 사명을 위해 그는 기꺼이 악마와 손을 잡는다. 유태진은, 어쩌면 장병호에게는 그같은 간절함이란 없을까?
최정우(류승수 분)가 서지원(고준희 분)에게 묻는 이유일 것이다. 어떤 간절함으로 너는 기자라는 일을 택했는가? 그만한 각오가 그녀는 되어 있는가. 그녀는 대답하지 못한다. 간절함이란 없는 하나의 유희였을 테니까. 그녀도 한 사람의 어른으로 조금씩 성장해간다.
판도라의 상자에 마지막까지 희망이 남아 있었던 것은 어쩌면 저주였을 것이다. 사랑이야 말로 신이 인간에게 안긴 원죄다. 사랑으로 인해 살고, 희망을 위해 살지만, 그로 인해 더 절망하고 더 잔인해진다. 더 슬퍼지고 더 가혹해진다. 그래서 모두는 그리 선량한 얼굴로 죄를 짓고 있는지도 모른다. 미워할 수조차 없이 선량한 얼굴로 악을 저지른다. 인간이란 그런 동물이므로.
성찰이었을 것이다. 황반장과 서회장의 대비라는 것은. 그리고 백홍석과 강동윤의 존재 역시. 그들은 거울의 반대편에 있다. 그들은 닮아 있다. 세상이 그러하듯. 인간은 그러하다. 무겁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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