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

넝쿨째 굴러온 당신 - 가족의 의미,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남 아니냐?

까칠부 2012. 7. 1. 10:47

"톡 까놓고 말이 가족이지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남 아니냐? 저절로 친해지고 좋아지고 그런 관계는 아닌 거야. 피나는 노력이 필요하지."

 

어쩌면 방일숙(양정아 분)의 이 말이 정답일 것이다. 시월드란 어디에서 비롯되는가? 어째서 며느리들은 시집식구들과 갈등을 빚을 수밖에 없는가?

 

원래 소통이란 쌍방향적인 것이다. 어느 한 쪽만 말하고 듣는 경우란 없다. 이해할 수 있게 말하고, 들은 것을 이해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아무런 노력 없이 소통이 이루어지는 경우란 없다. 다만 그 과정이 결코 쉽지만은 않기에 사람들은 곧잘 그 노력을 포기하고는 한다.

 

바로 그것이 문제인 것이다. 비단 시월드의 경우만이 아니다. 일상에서 흔히 쓰이는 말로 신고식이라는 것이 있다. 개인이 특정집단에 속하려 할 때 반드시 치러야 하는 통과의례를 일컫는 것이다. 집단이 새로운 구성원을 받아들이려 할 때도 새로운 구성원에 대해 강제하는 의식이다. 그리고 대개는 집단의 폐쇄성과 비례해서 매우 폭력적이고 억압적인 수단들로 이루어진 경우가 많다. 당연히 기존의 집단이나 구성원 개개인에 비해 새로운 구성원의 경우 약자의 입장에 있기 쉽기 때문이다.

 

같이 방청소를 하려 해도 상대적으로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이 그렇지 못한 사람을 부리려 하는 경우가 많다. 편하기 때문이다. 자기가 원하는대로 상대를 움직임으로써 자기에게 유리하게 일을 처리하게 된다. 더 어렵고, 더 힘들고, 더 가치없고 하찮은 일은 아랫사람의 몫이다. 더 쉽고, 덜 힘들며 가치있고 중요한 일은 윗사람의 차지다. 관계에서 주도권을 갖는다는 것은 그런 뜻이다. 자기에게 유리하도록 일방적으로 선택할 수 있다.

 

소통 역시 마찬가지다. 두 사람이 있다. 누가 더 소통을 위해 노력해야 하는가? 정답은 둘 다이겠지만, 현실은 그 가운데 상대적으로 약자의 위치에 있는 사람이다. 그래서 약자인 것이다. 그럴 힘이 있으니 강자다. 그것을 확인시켜주는 것이 바로 신고식이다. 과연 강자의 일방적인 요구를 거절하거나 그에 저항하려 할 때 어떤 댓가가 돌아가는가? 폭력과 억압은 공포를 각인시키고, 공포는 자발적인 복종을 유도하게 된다. 두려움에 감히 거부나 저항은 생각조차 할 수 없다.

 

시월드도 다르지 않다. 원래 남이다. 피 한 방울 섞이지 않는 전혀 타인이다. 그런데 가족이 되었다. 며느리는 한 사람이지만 시댁식구는 한 집단이다. 과거에는 혈족중심이라 며느리는 이방인으로서 기존의 혈족의 구성원으로 받아들여지는 것이었다. 남성의 지위 또한 여성보다 높았다. 남편에게 복종하도록 강요당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그 가족에게도 복종할 것을 강요당한다. 그같은 일방적 구조가 소통에 있어서도 나타난다. 이해를 위해 노력해야 하는 것은 며느리이며, 시댁식구는 단지 시련으로써 며느리가 스스로 그것을 받아들일 수 있도록 돕는다. 일종의 신고식이다. 가혹한 학대를 통해 복종을 체화시켜가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흔히 말하는 시집살이의 정체다.

 

나는 이해할 생각이 없다. 그러나 너는 이해해야 한다. 가족이라는 강제가 붙는다. 가족이지만 타인이다. 과거에는 남성의 지위가 더 높았고, 지금도 아내와 남편의 관계는 서로에 대한 상호신뢰를 전제하고 있다. 가만히 있어도 서로 친해지고 좋아지는 혈연이 아닌 노력이 필요한 관계다. 관계유지를 위한 절박함이 그래서도 더욱 여성으로 하여금 남편의 가족을 의식하게 만든다. 당연히 거꾸로 남성이 여성에게 더 아쉬움과 간절함을 느끼게 된다면 남편이 오히려 처가식구를 의식하게 되기도 한다. 같은 맥락이다.

 

방말숙(오연서 분)이 새삼스럽게 올케 차윤희(김남주 분)에게 친하게 굴려 하는 이유인 것이다. 아쉬우니까. 차세광(강민혁 분)을 사랑한다. 차세광에 대한 자신의 사랑이 결실을 보려면 차윤희의 최소한 용인이 필수적이다. 차윤희가 반대한다면 차세광과의 사랑은 이루어질 수 없다. 그래서 먼저 차윤희에 대해 묻는다. 차윤희와 친해지려고. 차윤희가 남편 방귀남(유준상 분)을 위해 방귀남의 가족들에 노력하는 것과 같은 이유다. 그러나 차윤희는 방말숙을 이해하려 하지 않고, 그럴수록 방말숙은 차윤희를 이해하려 하고, 초기 차윤희도 그래서 방말숙을 이해하려 했고, 방말숙은 그녀를 이해하려 하지 않았다. 시어머니 엄청애(윤여정 분)가 차윤희를 이해하려 노력할 때는 차윤희가 그토록 꺼려하던 시월드란 존재하지 않았다.

 

가족이란 비단 혈연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보다는 관계다. 노력이다. 신뢰이며 유대다. 인식이며 관념이다. 가족이라 여기고 노력하기에 가족이다. 노력이 없다면 제아무리 피가 이어졌고 가까운 사이라 할지라도 가족이라 할 수 없다. 과연 자신의 자식을 잃어버리고 30년 넘게 속여온 동생 방정훈과 그의 아내 장양실(나영희 분)에 대해서도 방장수(장용 분)는 가족의 정을 느낄 수 있을 것인가? 아니 그 전에 방정훈에게 방장수와 방정배(김상호 분) 등의 형제와 그 가족이란 어떤 의미인가? 30년만에 찾은 조카인 방귀남에게도 그는 가족의 정을 느끼지 못하는 것 같다.

 

방귀남이 입양을 진지하게 고민하는 이유다. 임신한 아내가 있다. 곧 있으면 그의 유전자를 받은 진짜 혈육이 아내에게서 태어난다. 그러나 또다른 자식을 계획하고 있다. 사랑으로써 얻는 자식이다. 신뢰와 유대를 전제한다. 가족이라고 서로 인식하고 확인하고 다시 노력함으로써 그들은 가족이 된다. 혈연에 의해 자연스럽게 주어진 가족보다 어쩌면 더 크고 무거운 관계일 것이다. 다만 그러기 위해서는 혈연으로 이어진 가족을 찾자마자 그동안 자신을 친자식처럼 돌봐준 양부모와의 관계를 단절하다시피했던 방귀남에 대한 설명이 필요하다. 아니라고는 하지만 최소한 지금까지 양부모와 다시 만나거나 연락하는 장면이 중요하게 등장한 적이 없다. 머리검은 짐승은 키우는 게 아니다.

 

친부모를 찾으니 당연히 친부모에게로 돌아간다. 그런 것이 바로 부모의 정이기는 하지만 그렇더라도 그것이 한국의 그렇지 않아도 입양문화에 끼치게 될 영향이란 어떠한가? 기른 정보다 낳은 정이다. 어떻게 해도 천륜을 따른다. 평생을 함께 살아도 자식이 아니게 된다면 누가 그를 자식으로 여기고 삼으려 하겠는가? 방귀남의 양부모가 중요한 이유다. 방귀남의 양부모와 방귀남의 관계를 이번의 입양을 통해 보다 선명하게 보여준다. 가족이란 그런 것이 아니다.

 

남남구 역시 의외로 가족에 대한 또다른 정의를 말한다. 부부였다. 그러나 이혼했다. 하지만 이혼했어도 내 아이의 엄마다. 민지는 남남구의 자식이다. 방일숙은 민지의 엄마다. 그러니 이혼했어도 방일숙은 그의 가족이다. 방일숙에 대한 미련이라기보다는 가족에 대한 집착이다. 자기 것에 대한 집착이다. 다만 그럼에도 방일숙을 마치 소유하려는 듯 강제하려는 모습은 남남구가 갖는 한계를 보여준다 할 것이다. 방일숙이 길을 잘못 들였다. 방일숙의 희생을 어느새 당연한 듯 받아들인다. 방일숙의 입장을 전혀 이해하려 하지 않는다.

 

방이숙(조윤희 분)의 상태가 심각하다. 그녀의 영혼에 뿌리깊게 박혀 있다. 누가 자신을 좋아하겠는가? 누가 자신과 같은 여자를 좋아해 주겠는가? 어려서부터 그렇게 길러졌다. 누구의 사랑도 받지 못하고 누구의 관심도 받지 못한 채, 도리어 한 번 얼굴도 보지 못한 오빠를 잃어버린 날 태어났다는 원죄가 씌워졌다. 규현과의 관계에서도 그녀가 한 발 앞으로 나서기를 주저하는 이유가 바로 그것이다. 천재용(이희준 분)만이 아니다. 그녀는 자기를 포함한 모두를 두려워한다. 두려워하지 않는 상대는 단 하나, 아무도 아닐 때. 아무 관계도 아닐 때다.

 

슬금 천재용을 의식하기 시작한다. 그런데 그것이 천재용에게 마냥 좋지만은 않다. 자기를 의식하기 시작했으니 가능성이 보이기 시작했다고 좋아해야 하는가? 그나마 더 다가가기 어렵게 되었다고 아쉬워해야 하는가? 그러나 그 역시 한 걸음 전진이다. 그리고 천재용의 진심을 알게 된다면, 그리고 그것을 인정하고 받아들이게 된다면, 방이숙 역시 자신에 대해 한 걸음 전진하게 될 것이다. 참 어려운 사랑을 한다. 천재용이나, 그리고 아직 자신의 감정을 모르는 방이숙이나. 방이숙과 같은 타입에게는 천재용 같은 바보가 어울린다. 그는 진짜 바보다.

 

과연 믿었던 배우의 소속사 관계자마저 차윤희를 외면하려 한다. 임신은 죄다. 오죽하면 자신을 임신케 한 방귀남에게마저 화가 나려 한다. 그런데도 임신을 하라 한다. 아이를 낳으라 한다. 손발을 다 꺾고 날개마저 뽑으려 하면서. 더 이상 드라마 제작PD로서 현업에서 일하기 힘들게 되었다. 임신이 죄인 때문이다. 임신으로 삶의 방향이 바뀐다. 이제까지의 자신의 삶이 모두 부정당한다. 드라마속 이야기만이 아닌 현실에 실제 일어나고 있는 이야기라는 것이 더 무겁고 아프다.

 

엄청애와 방장수의 사랑이야기가 정겹다. 그렇게 사랑을 했다. 그렇게 결혼을 했다. 그런 달콤하던 시절도 있었다. 지금이야 추억이지만, 그렇기 때문에 후회이고 아픔이다. 그런데 어째서 그렇게밖에 해주지 못한 것일까? 더 잘해주고 싶었고, 더 잘해주마 약속도 하고 다짐도 했었는데. 부모님 세대에서는 흔히 있는 모습이다. 서로 사랑해서 결혼했는데 막상 결혼하고 난 이후의 삶은 여전히 전근대의 삶 그대로였다. 그렇게 엄청애도 엄청애에 대한 방장수의 사랑도 시들어갔다.

 

방일숙의 매니저로서의 첫일은 아무래도 실패로 돌아가려는 듯하다. 윤빈(김원준 분)은 다시 한 번 더 큰 굴욕을 맞는다. 차윤희가 나설 때일 것이다. 아니 방일숙 스스로 헤쳐나갈 때가 되었다. 그녀는 매니저다. 자신의 가수 윤빈의 매니저다. 윤빈의 재기와 그녀의 홀로서기를 본다.

 

며느리도 가족이다. 올케도 가족이다. 당연히 시누이도, 시부모도, 시형제도 모두 가족이다. 그러나 타인이다. 어떻게 서로 남에서 가족이 되는가? 입양을 통해 전혀 남에서 부모와 자식이 되기도 한다. 가족에 대한 근본을 묻는다. 시월드의 이유를 묻는다. 답이야 누구나 안다. 실천의 문제다. 재미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