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

넝쿨째 굴러온 당신 - 그들이 가족인 이유, 방일숙 차윤희에 의지하다...

까칠부 2012. 7. 2. 11:05

역시 어른이라는 것일 게다. 그토록 얌체스럽고 한심한 듯 보여도 어른은 어른이었다. 방말숙(오연서 분)이 차윤희(김남주 분)의 동생인 차세광(강민혁 분)을 좋아하는 것을 알고 그것을 약점으로 잡으려는 야비한 모습을 보이더니 차세광을 만나 나누는 대화는 진지하기 이를 데 없다.

 

자기도 그런 과정을 거쳤다. 우연으로 만났고, 운명으로 느꼈으며, 필연으로 함께 살게되었다. 친구의 복수를 하려다가 사랑에 빠지고 이제는 그녀와 모든 어려움을 이기고 함께 하려 한다. 응원해주고 싶다. 하지만 정작 그로 인해 놀라게 될 이들이 다름아닌 자신의 형수이고 어머니다. 자신 역시 가족을 책임져야 하는 남자의 입장에서 형수와 어머니를 이대로 내버려둘 수 없다.

 

결혼이란 비단 개인과 개인의 어우러짐만은 아니다. 특히 한국사회에서는 개인과 개인이 맺고 있는 관계가 무엇보다 중요하다. 그리고 그런 가운데서도 가장 중요한 것이 바로 가족이라는 것이다. 한국 사람들은 아직도 가족을 떠나 홀로 살아갈 수 없다. 누군가를 사랑하고 결혼해 함께 살아가는 것이 당사자의 개인의 일이더라도 가족인 이상 남의 일처럼 무심하게 지켜보고만 있을 수는 없다. 그래서 방말숙 자신도 다시 만났을 때 이미 결혼한 채이던 방귀남(유준상 분)과 차윤희(김남주 분)에 대해 악역을 자처하면서까지 개입하려 드는 것 아니던가 말이다. 입을 열 때마다 나오는 말이 방귀남과 같은 완벽한 남편감이 차윤희에게는 너무 아깝다는 것이다.

 

하필 사돈총각이다. 하필 며느리의 동생이다. 남편의 여동생이다. 사돈처녀다. 법으로야 문제가 없다고 하지만, 사실 도덕적으로 전혀 문제가 없다. 다만 현실적인 문제가 걸린다. 관계가 꼬인다. 사돈총각이 사위가 되고, 사돈처녀가 며느리가 된다. 시누이가 올케가 되고 올케가 시누이가 된다. 물론 다른 가족을 배제할 때 그것은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러나 전통적인 가족관계에서 주위는 결코 남이 될 수 없다. 그래서 촌수가 있다. 얼마나 가깝고 먼가를 계량하는 단위다.

 

오히려 방말숙이 진심인 것 같아 걱정스럽다는 방정배(김상호 분)의 말이 그래서 뭉클하게 다가온다. 진심으로 걱정하고 있는 것이다. 어머니를 걱정하고, 형수를 걱정하고, 그로 인해 상처입을 방말숙을 걱정한다. 그래서 더 방말숙에게 심하게 대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방말숙을 시험하고, 그녀의 진심이 걱정이 돼서 차세광을 만나 넌즈시 권유한다. 모두를 위해 양보하면 어떻겠느냐고. 그편이 방말숙이 받을 상처도 줄일 수 있다. 가족의 반대보다는 차세광의 포기 쪽이 방말숙이 받을 상처를 보다 최소화할 수 있다. 가족들이 받을 상처도 막을 수 있다. 이기적이지만 원래 지킨다고 하는 자체가 지극히 이기적인 이타적 행위다. 차세광의 받을 상처보다 조카인 방말숙의 상처가 우선이다.

 

그는 가장이다. 그리고 아들이다. 그렇게 길러진다. 더구나 형의 딸이다. 막내아들이다. 장남이 집안을 잇는다. 형제들이 그 뒤를 받친다. 전형적인 가부장적 전통사회의 남자의 모습일 것이다. 가장으로서의 권위와, 또한 가장으로서의 책임과, 남자로서의 체면과, 그리고 남자로서의 의무와, 고루하고 촌스럽지만 그런 방정배가 밉지 않은 이유다. 고옥이 그를 사랑하며 방장군(곽동연 분)이 그런 아버지를 존경하며 따르는 이유일 것이다.

 

아무튼 바로 지난회 방일숙(양정아 분)가 말한 그 다음일 것이다.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남이다. 가만 있어도 서로 가까워지거나 좋아질 수 없는 사이다. 그러나 가족이 된다. 가족이 되기 위해 서로 노력을 한다. 그래서 방일숙은 차윤희에게 의지한다. 차윤희의 친정엄마 한만희(김영란 분) 또한 때로 자신의 아들과 딸보다 오히려 사위인 방귀남에게 더 크게 의지한다.

 

가만히 있어도 서로에 대해 너무 잘안다. 그다지 크게 노력하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모르려야 모를 수 없는 사이가 된다. 그것이 부담스럽다. 지나치게 잘 알다 보니 쉽게 결론내린다. 너무나 잘 알고 있다고 하는 자신감에 쉽게 단정지으려 한다. 그것이 언제적 일인가? 하지만 이미 한 번 단정지어진 결론은 쉽게 바뀌지 않는다. 방일숙이 장차 어떻게 자신의 모습을 바꾸어가든 엄마인 엄청애(윤여정 분)에게 방일숙이란 아주 어렸을 적부터 알고 있던 자신의 딸 방일숙일 뿐이다. 그래서 아무리 나이를 먹어도 부모 앞에서 자식이란 어릴 적 그 모습 그대로라 하는 것 아니던가.

 

한만희 또한 마찬가지다. 그동안 부모로서 자식들에게 보여줘 온 모습들이 있다. 오래전 일이지만 워낙 항상 얼굴을 마주하고 서로 부대끼며 살아오다 보니 그것이 뇌리에 각인되어 있다. 굳이 노력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기억들이 차곡차곡 쌓이며 어느새 흔들림없는 하나의 이미지로 굳어져 버린다. 그에 비하면 사위인 방귀남은 그같은 선입견으로부터 자유롭지 않겠는가. 한만희가 보여주고자 하는, 그리고 보아주었으면 하는 모습을 방귀남은 보아줄 수 있다. 설사 아니더라도 좋다. 오히려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남이기에 그렇가 보아주려 노력하게 된다.

 

과연 방일숙이 말이 잘 통하는 것일까? 당당하고 말을 잘하는 것일까? 그러나 그렇게 보려 노력한다. 시누이니까. 남편의 누나니까. 그런 노력이 방일숙에게 잠재되어 있던 또다른 가능성을 눈치채게 만든다. 방일숙을 이루고 있는 수많은 모습 가운데 방일숙이 보고자 하는 숨겨진 모습을 오히려 먼저 찾아내기도 한다. 사람은 자기를 인정하는 사람을 따른다. 차윤희가 최근 임신으로 인해 고립감을 느끼는 이유이기도 하다. 자신을 인정해주는 사람이 있는데 어찌 의지하려 하지 않을까.

 

노력이다. 오히려 서로 남이기에 노력함으로써 더 가까워지는 것이다. 서로 노력하기에 오히려 원래의 가족보다 더 가까워지기도 한다. 사위사랑은 장모이고, 며느리 사랑은 시아버지이고, 시누이를 이해해 주는 것도 바로 올케다. 올케의 편을 들어주는 것도 바로 시누이다. 오빠인 차세중(김용희 분)에게는 함부로 대하면서도 차윤희 또한 올케인 민지영(진경 분)에게는 항상 존중하는 자세를 잃지 않는다. 어려서부터 항상 가까이서 지켜보았기에 아무렇지도 않게 방일숙을 무시하는 엄마 엄청애와 그런 방일숙의 다른 모습을 보아주는 차윤희, 과연 누가 진정한 가족인가?

 

윤빈(김원준 분)이 방일숙에게 의지하는 이유일 것이다. 마침내 다시 재기를 위한 무대에 설 수 있게 되었을 때 윤빈은 기꺼이 방일숙에게 다가와 그녀를 끌어안는다. 여성으로서가 아니었을 것이다. 그것은 신뢰할 수 있는 동지였다. 비록 윤빈에게 가혹한 말을 퍼붓기는 했지만, 그럼에도 그런 윤빈을 가장 인정해주고 믿어주고 있는 것은 방일숙 자신이었을 것이다. 방일숙 역시 자신을 매니저로써 믿고 의지하는 윤빈에게서 잊고 있던 자존감을 회복하게 된다. 사랑보다 더 깊은 유대다. 아마도 드라마이기에 둘 다 남자이고 여자이게 되기 쉽겠지만 말이다.

 

가족이란 그저 가족으로 태어났기에 가족이 아니다. 노력을 통해 가족이 된다. 오히려 피가 이어지지 않았기에 더 편한, 그렇다고 완전 남보다는 더욱 거리낌없이 대할 수 있는 그런 대상으로써. 완전 남이라면 차윤희에게 하듯 모든 것을 털어놓고 의논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가족이니까. 올케다. 동생의 아내다. 시누이다. 그래서 그들은 가족이 된다. 피가 전혀 이어지지 않은 그들이 가족이 되는 이유다. 결혼의 이유이며 시월드의 이유다. 가족이란 스스로 노력하여 완성하는 것이다.

 

방이숙(조윤희 분)이 흔들린다. 천재용(이희준 분)의 고백이 결정적이었다. 누군가 자신을 사랑해주는 사람이 있다. 누군가 진심으로 자신을 좋아해주는 사람이 있다. 한 번도 경험해 보지 못한 일이라 두렵고 당황스럽다. 그래서 일단 도망치려고부터 하게 된다. 그러나 정작 천재용이 다른 예쁘고 잘난 여자와 소개팅을 하려 한다니 마음이 불편하다. 그것을 의식하지 못하는 천재용도 천재용이다. 누가 재벌아들 아니랄까봐 다른 사람의 입장을 헤아리는 것이 영 서툴다. 하지만 바로 그런 천재용이기 때문에 방이숙의 입장을 깡그리 무시한 채 일방적으로 고백을 질러버릴 수 있다.

 

상황이 역전된다. 천재용은 일단 한 번 포기했다. 일단 다시 한 발 물러서려 한다. 방이숙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천재용에게 관심이 생기기 시작했다. 관심보다는 동요일 것이다. 천재용이 전처럼 무심히 보이지 않는다. 그렇다고 방이숙 또한 자신의 감정을 솔직하게 표현하는 타입이 아니다. 이 두 커플이 서로 이어지는 순간이 바로 드라마가 끝나는 순간이다. 한없이 답답한데 그것이 또한 한없이 귀엽다. 이런 커플이 있는 것도 제법 재미있을 것이다. 사랑이란 어렵다.

 

아무리 국민남편 방귀남이라 할지라도 결국은 아내 앞에서 마냥 이타적이고 배려심깊은 존재로만 남아 있을 수는 없다. 결국은 타인인 때문이다. 아무리 사랑하는 사이더라도 서로를 완전히 이해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분명 선의에 의한 것이고, 신중하게 생각해서 상의하듯 꺼낸 말이기는 하지만 그것은 정작 아내의 입장을 전혀 고려하지 않은 것이었다. 임신으로 인해 바로 직전까지 수많은 절망과 좌절을 쌓아두고 있던 아내 차윤희에게 이제는 아이를 입양하는 이야기마저 꺼내려 하다니. 뱃속의 아이마저 원망하게 되는 현실 앞에 또다른 짐을 차윤희에게 지우려 한다.

 

상황이 공교롭다. 차라리 임신하기 전이었다면 크게 문제는 없었을지 모른다. 입양이란 이미 다 자란 아이를 자식으로 들이는 것이니까. 아이를 낳을 때까지 임신한 채로 있어야 하고, 아이를 낳고 나서도 어느 정도 아이가 자랄 때까지 엄마로써 가까이에서 지켜봐야 한다. 일을 해야 하는 입장에서 그것은 큰 패널티다. 배려하기 싫어하는 한국사회에서 그것은 따돌림의 원인이 된다. 그나마 차윤희는 나은 경우다. 임신을 했다는 이유로 자동적으로 일을 그만두어야 하는 경우도 허다하다. 그런데 이제 아이로 인해 스트레스를 받는데 아이를 입양하라 말한다.

 

마냥 선의로만 말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다. 외로운 처지의 아이를 입양해서 가족이 되어준다. 말은 아름답지만 현실까지 아름답지는 않다. 아이는 귀엽고 사랑스럽지만 아이를 낳기까지의 과정은 결코 귀엽지도 사랑스럽지도 않다. 이제까지 유쾌한 가운데 갑자기 드라마에 어두운 그늘이 드리워지기 시작한다. 그만큼 차윤희가 처한 처지가 외롭고 어렵다.

 

능력있은 여자가 무엇하려 결혼을 하는가? 능력이 있는데 무엇하려 아이를 낳으려 하는가? 혼자 살아도 된다면 혼자 사는 쪽이 오히려 낫다. 나이 지긋한 어느 여성분께 들은 이야기다. 그것이 현실이다. 누가 아이들을 죽이는가? 태어날 아이들을 거부한다.

 

차세광도 마침내 현실의 복잡함을 인정하게 된다. 그렇지 않아도 누나와 매형의 일로 자신의 어머니와 방말숙의 어머니의 신경전이 보통이 아니다. 그런데 자신과 방말숙의 일까지 더해지게 된다. 자신들만의 일이 아니다. 자기들만 좋아서 해결될 일이 아니다. 헤어질 것을 결심한다. 이제까지의 방말숙의 모든 노력을 부정하는 말이다. 방말숙이 분노한다.

 

하여튼 작가도 짓궂다. 그리 방말숙의 의도를 부정하고 거부하더니 방일숙이 전한 말로 인해 차윤희도 조금은 방말숙에 대해 달리 생각하려는 상황이었다. 방말숙을 인정하고 지켜보아도 좋겠다 생각한 순간이었다. 그런데 그 순간 차세광에게 절망한 방말숙이 차윤희에게 분노를 쏟아낸다. 참으로 어렵고 힘든 것이 시누이와 올케일 것이다. 어쩌면 이리도 매번 상황이 꼬이기만 하는지.

 

이대로 끝나지는 않을 것이다. 의외로 구원의 손은 가까이에 있을지 모른다. 차세광의 절망을 희망으로 바꾸려면 누나 차윤희가 필요하다. 방말숙의 선의와 이번의 분노를 차윤희는 직접 정면에서 맞는다. 차윤희가 드라마의 주인공이다. 시련이 인간을 강하게 만든다. 고난이 인간을 다시 한 번 돌아보도록 만든다. 그리고 시련의 끝에 구원도 있다. 계기가 되어주지 않을까?

 

장양실(나영희 분)이 방장수(장용 분)에게 용서를 구하는 모습이 아름답다. 용서란 그렇게 구하는 것이다. 용서해줄 것을 바라서 용서를 구하는 것이 아니다. 용서해주지 않더라도 용서를 구해야 하기에 구하는 것이다. 그 과정이 아무리 힘들고 고통스럽더라도 결코 외면해서는 안된다. 욕을 하면 욕을 먹고, 비난을 하면 비난을 듣는다. 모든 원망과 분노를 받아들인다. 경멸도 달갑다.

 

시어머니이기에 최선을 다한다. 손윗동서이기에 자신의 할 도리를 다한다. 용서해주지 않아도 어쩔 수 없다. 그것이 자신의 죄갚음이다. 평생을 다해도 모자르다. 용서보다 더 힘든 것이 용서를 구하는 것일 텐데. 그녀의 진심을 느낀다. 그래서 슬프다. 쉽게 가시지 않을 아픔이다. 흥미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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