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에게는 항상 선택지가 주어진다. 왼쪽이냐? 오른쪽이냐? 왼쪽으로 간다는 것은 오른쪽을 포기한다는 것이다. 오른쪽으로 간다는 것은 왼쪽을 버리는 것이다. 그렇다고 왼쪽으로 가려던 것을 오른쪽으로 갈 수는 없다. 오른쪽으로 가려 한다면 오른쪽으로 가야 한다. 미련만 남긴다.
사랑하는 여인이 있다. 그리고 아버지가 있다. 사실 기무라 슌지(박기웅 분)에게 자기가 일본인이라는 사실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은지도 모른다. 그보다는 아버지의 눈물을 보았다. 형의 죽음을 보았다. 조선인이 형을 죽이고 아버지를 눈물짓게 했다. 아이가 처음으로 세상을 인지하듯 비로소 기무라 슌지도 자신이 일본인이며 조선인과는 다르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조선인이 일본인이 될 수 없듯 일본인도 조선인이 될 수 없다.
그런 점에서 기무라 슌지와 이강토(주원 분)의 사이가 참으로 미묘하다. 어쩌면 그는 믿고 있었을 것이다. 조선인 이강토도 스스로 노력하고 주위에서 배려한다면 훌륭한 일본인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자신이 조선인이 될 수 있으리라 믿었던 것처럼. 조선의 문화를 사랑하고, 조선의 자연을 사랑하고, 조선의 사람을 사랑하고, 조선의 여인을 사랑하고, 그러나 그는 일본인이었다. 그토록 사랑하던 여인 목단(진세연 분)에게서 그 사실을 듣고 그는 절망하고 만다.
아무리 스스로를 사토 히로시라 말해도 주위에서는 여전히 그를 이강토라 부른다. 기무라 슌지 역시 그를 이강토라 부른다. 스스로 일본인이 되고자 사토 히로시라 바꿔부르도록 했지만 경무국장 콘노 코지를 제외한 어느 누구도 그를 사토 히로시라 불러주지 않는다. 기무라 슌지가 어쩔 수 없는 기무라 슌지이듯 이강토는 단지 이강토일 뿐이다. 그동안 기무라 슌지와 이강토의 사이가 서먹해진 이유였을 것이다. 그저 친구로서가 아닌 조선인 이강토가 기무라 슌지에게는 많이 어색하다.
선택의 순간이 온다. 아버지인가? 목단인가? 이미 조선을 버리고 일본을 선택했다. 조선인을 저버리고 일본인이기를 선택했다. 그리고 아버지가 곧 일본이고 일본인이다. 목단이 조선이거나 조선인이어서는 안된다. 차라리 포기하라 말한다. 각시탈도 아버지 목담사리(전노민 분)도 모두 포기한다면 자기가 지켜줄 수 있노라고. 그러나 그 전에 이미 그는 선택했다. 아버지를. 일본과 일본인을. 그래서 그는 목단을 잡아들이고 그녀를 고문했다. 그는 일본인이며 아버지의 아들이다.
이강토도 선택해야 한다. 아버지의 복수를 해야 한다. 그보다는 형의 유지를 이어야 한다. 각시탈을 지켜야 한다. 물론 목단도 지켜야 한다. 기무라 슌지가 목단을 향해 칼을 뽑을 때, 그리고 기무라 슌지의 명령에 의해 목단을 고문해야 했을 때도, 과연 각시탈을 지키기 위해 목단을 자기 손으로 고문하는 것이 옳은가? 그럼에도 이강토는 각시탈이고자 했기에 기무라 슌지의 명령을 받들어 목단에게 채찍을 휘두른다. 기무라 타로(천호진 분)의 적절한 등장이 아니었다면 그는 또 한 번 후회할 일을 만들고 말았을 것이다. 이미 한 번 후회할 일을 만들고 말았다.
대의멸친과 같은 대단한 이유에서가 아니었다. 사실 이강토가 각시탈이 된 것도 조선의 독립과 같은 거창한 명분을 쫓아서가 아니었다. 아버지와 어머니의 복수를 하겠다. 형이 못 다 이룬 뜻을 대신 이루겠다. 이강토가 목담사리를 도우려 하는 것 역시 조선의 독립을 위해서라기보다는 단지 그가 목단의 아버지이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아버지 목담사리를 위해 목단이 직접 그에게 부탁했다. 그래서 더 절실하다. 이강토에게 목단이란 마지막 남은 가족과도 같다.
이강토는 외롭다. 아버지는 오래전에 만주에서 마적떼의 습격을 받고 목숨을 잃었다. 어머니와 형에 의지해 살았는데 그 어머니와 형마저 일본 경찰의 손에, 그리고 자신의 손에 목숨을 잃고 말았다. 같은 조선인에 의해 어머니와 형의 시신이 집과 함께 불타버렸다. 세상에 혈육이라고는 한 사람도 없이, 그는 여전히 일본인도 조선인도 아니다. 일본인에게는 조선인이라는 이유로 경멸당하고, 조선인에게는 일본인의 앞잡이라는 이유로 증오의 대상이 된다. 그나마 유일한 친구이던 기무라 슌지마저 각시탈을 사이에 두고 대립하는 사이가 되었다. 남은 것은 목단 한 사람 뿐이다. 가장 오랜, 가장 아름답던 순간의 기억이 가리키는 그의 첫사랑.
이강토가 목단에게 집착하는 이유일 것이다. 목단을 사랑해서이기도 하겠지만, 그보다는 사랑할 대상이 필요했다. 사랑할 누군가가 필요했다. 그것이 비록 자신에 대한 혐오와 경멸을 노골적으로 드러내며 저주와 증오를 쏟아내는 그녀라 할지라도 말이다. 그조차도 너무 고마워서 목단의 곁에 있을 때 그는 가장 순수하던 시절로 돌아가고 만다. 누군가에 설레고 누군가를 만나는 것만으로 기쁘던. 하지만 그조차도 결국 이강토에게 씌워진 사명 앞에서 힘겹게 물러나고 만다. 그럼에도 목단을 희생해서라도 지켜야 하는 것이 있다.
그래서 슌지도 아버지의 지시에 따라 목단을 각시탈을 잡기 위한 미끼로 내놓는다. 그러면서도 목단을 지키려 한다. 어느새 목단을 마음에 품고 있는 이강토를 질투한다. 목단을 사랑하여 질투하고, 목단을 사랑하기에 이강토로 하여금 대신 그녀를 고문하게 만들고, 그러면서도 자신의 선택을 위해 목단을 여전히 각시탈을 잡기 위한 수단으로서 잡아놓고, 묶어놓고, 가둬놓는다. 목단을 위해서라도 각시탈을 반드시 잡아야 한다. 기무라 슌지가 이강토에게 손을 내민다.
가장 친한 친구였다. 유일한 친구였다. 어머니와 형이 죽었을 때 가장 가까이에서 그를 위로해주던 친구였다. 그러나 그는 일본인이었다. 다시 한 번 확인했다. 그는 일본인이었다. 아니더라도 일본인이어야 한다. 친구를 속인다. 목단의 말 그대로다. 기무라 슌지는 일본인이며, 조선인에게 일본인이란 왜놈일 뿐이다. 목단도 포기했는데 친구라고 포기하지 못할 것이 무에 있을까? 기무라 슌지의 폭주는 차라리 이강토에게 기회가 되어주었다. 명분이 되었다. 선택해야 한다. 역시 친구인가? 아니면 사명인가? 일본인가? 아니면 조선인가?
물론 지금에야 그렇게 비장할 필요없는 단순한 고민일 것이다. 일본인이면 어떻고 조선인이면 어떤가? 다시 말하지만 기무라 슌지의 형 기무라 켄지가 각시탈에게 죽었다. 이강토의 아버지와 어머니와 형이 모두 일본인에게 죽었다. 선택하지 않으면 안된다. 일본인인가? 조선인인가? 그 사이는 없다. 다시 돌아올 수 있는 길도 없다. 그래서 드라마는 재미있다. 그렇게 당연한 사랑과 우정의 감정마저 서로 엇갈린 채 선택을 강요당하는 현실. 어느 한 쪽을 선택하면 다른 한 쪽은 당연히 포기해야 한다. 항상 절박한 극단에서 선택을 강요당하며 살아야 한다.
감정이 서로 얽힌다. 각시탈을 잡으라고 키쇼카이에서 파견한 우에노 리에(한채아 분)였을 것이다. 그러나 원래의 채홍주(우에노 리에)는 과거의 인연으로 이강토에게 남다른 호감을 가지고 있다. 그녀 역시 외롭다. 키쇼카이의 회장 우에노 히데키(전국환 분)를 아버지로 여기고는 있지만 그가 진짜 아버지가 아니라는 사실을 안다. 아버지와 어머니도 죽고, 가족이라고는 하나도 남은 사람이 없는데 그 원인을 제공한 것이 조선의 독립군이었다. 가족이 독립군에 의해 희생당하고 그녀는 기생이 되어 우에노 히데키와 만난다. 그 자리에서 이강토와도 만났다.
분명 악녀일 것이다. 조선인으로서 일본을 위해 일한다. 같은 조선인으로써 일본과 일본인을 위해 조선과 조선인에 위해를 가하려 한다. 주인공과도 맞설 것이다. 그런데도 주인공과 사랑에 빠진다. 그것도 일방적인 짝사랑이다. 이루어지지 않을 사랑이다. 어쩌면 마지막 남은 순수이기에 그것을 지키고자 하는 우에노 리에의 노력도 필사적이다. 파국이 찾아온다. 과연 그녀를 동정할 수 있을까? 이강토에게는 이미 목단이 있다. 이강토를 사랑하자면 지금의 자신도 포기해야 한다.
잔인한 시대일 것이다. 고작해야 사랑이다. 고작해야 우정이다. 그러나 그조차 그들에게는 사치다. 그런 시대를 살아간다. 선택해야 한다. 어느 한 가지를 버릴 것을. 슬픔에 잡아먹히고 만다. 그들의 독기어린 표정은 후회조차 먹혀버린 가련한 흔적일 것이다. 누구의 잘못일까? 화가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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