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

각시탈 - 착한 일본인 기무라 슌지, 강토야 나 어떻게 하냐?

까칠부 2012. 7. 6. 10:31
존재란 인식이다. 관계며 작용이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방안에 누군가가 있다. 보이지도, 들리지도, 느껴지지도, 냄새를 맡을수도 없지만 어쨌거나 방안에 누군가가 있다. 하기는 누군가가 있다고 하는 인식을 전제로 그 안에 누군가 사람이 있다는 것을 인지하게 된다.

 

나는 누구인가? 나란 어떤 존재인가? 당장 이름을 말할 수 있겠다. 그러나 어떤 이름을 말하겠는가? 이강토인가? 사토 히로시인가? 아니면 이영인가? 목단(진세연 분)에게 과연 이강토란 어떤 의미일까? 이강토(주원 분)의 형 이강산에게는 사토 히로시란 어떤 의미를 가질까? 기무라 슌지(박기웅 분) 역시 이강토의 앞에서 목단에게 이영의 존재를 묻고 있었다.

 

어차피 사람이란 자기의 모습을 볼 수 없다. 거울을 통해야 한다. 다른 매개를 통해야 겨우 자신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하다못해 자기가 자신을 인식함으로써만이 자기에게 자신이란 존재할 수 있다. 그래서 데카르트도 그리 말하고 있지 않던가.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존재한다."고. 사유함으로써 비로소 인간은 자신의 존재를 확인하고 증명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경찰이 되었다. 일본인으로써 대일본제국의 경찰이 되었다. 종로경찰서장 기무라 타로의 아들로써 조선총독부 경무국 경부가 되었다. 안타깝게도 기무라 슌지는 무척 성실한 타입의 인간이었을 것이다. 어떤 역할이 주어지더라도 주어진 역할에 최선을 다한다. 비록 목단을 지키기 위해 경찰이 되기는 했지만 경찰이 된 이상 경찰로서의 역할에도 최선을 다하려 한다. 설사 목단을 희생시키더라도.

 

한국인으로 태어나는 것이 아니다. 한국인으로 살아가는 것이다. 일본인으로 태어나는 것이 아니다. 일본인으로 살아가는 것이다. 남성으로 태어나서가 아니라 남성으로 살아가려 하니 남성다운 것이다. 여성으로써 타고나서가 아니라 여성으로서 살아가려 하니 여성다운 것이다. 답다는 건 그런 것이다. 자기의 역할이 주어지고 그 역할에 충실하려 한다. 그래서 과거 그런 실험도 있지 않았던가. 평범한 보통의 사람들에게 간수와 죄수로 나누어 역할극을 하도록 설정했더니 어느새 서로 자신의 역할에 몰입해 극단적인 상황까지 연출되고 있었다. 사회적인 존재이기 때문이다. 특히 다른 누군가의 존재를 의식하게 될 때 더욱 강하게 자신의 역할에 몰입하게 된다.

 

기무라 슌지에게 있어서도 바로 그와 같은 역할을 하는 것이 다름아닌 각시탈일 것이다. 형을 죽이고 아버지로 하여금 눈물흘리게 만든 적, 그래서 자신으로 하여금 더 이상 조선과 조선인을 전과 같이 생각하지 못하도록 만든 원망스러운 상대, 그렇기 때문에 간절히 믿게 된다. 각시탈만 사라진다면. 각시탈만 자신의 손으로 잡아 제거할 수 있다면. 그럴 수만 있다면 모든 것은 다시 원래대로 돌아가게 될 것이다. 그가 돌아가고 싶은 가장 아름답고 행복하던 시절로. 그를 위해 그는 더욱 대일본제국의 경찰로서의 자신의 역할에 충실하려 한다. 각시탈을 잡기 위해 목단을 희생시키려 하는 자신을 혐오하면서도 끝내 목단에게 총을 겨누면서까지. 그는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그런 점에서 기무라 슌지와 대비되는 인물이 바로 주인공 이강토일 것이다. 흥미롭다. 형을 대신해 각시탈이 된 지가 언제인데 아직도 그는 조선인으로 돌아와 있지 않는 것 같다. 단지 일본에 충성하던 원래의 이강토에서 각시탈만 하다 덧씌워진 듯한 모양새다. 일본에 대한 감정도, 일본인에 대한 태도도, 더구나 조선과 조선인에 대한 입장도, 아마 목단이 아니었다면 목담사리(전노민 분)이 꾸미고 있는 합방기념식에서의 의거에 동참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에게는 아직 그만한 사명이 없어 보이니까. 조선인이라기보다는 아버지와 어머니니의 아들이며, 형의 동생이며, 목단을 사랑하는 남자로 남아 있는 듯 보인다. 지금 그가 의거에 대해 갖는 사명이라는 것도 그를 대신해 죽은 사람에 대한 의리이지 조선에 대한 애정이나 집착 때문으로는 보이지 않는다.

 

무언가 서늘한 바람이 머릿속으로 스치고 지나가는 느낌이었다. 조선이 아니다. 조선인이 아니다. 조선과 조선인을 억압하고 차별하는 것이 일본인의 민족주의라면, 각시탈이 내세우는 것은 지극히 개인적인 인간으로서 당연히 가질 수 있는 분노이고 바람이었을 것이다. 아주 평범한 바람이었다. 어머니와 형과 가난하더라도 큰 걱정없이 오순도순 행복하게 살 수 있었으면. 목단과도 서로 감추거나 속이는 것 없이 솔직하게 마음을 털어놓고 만날 수 있었으면. 하지만 그것이 되지 않는다. 유일한 친구였던 기무라 슌지와의 우정에도 일본인과 조선인이라는 큰 벽이 생겨나고 말았다. 여전히 친구로써 서로를 의식하지만 더 이상 전과 같을 수는 없다. 보이지 않는 골이 그 깊이를 더해간다. 벽이 그 높이와 두께를 더해간다.

 

아무튼 그러고 보면 조선의 독립을 말하는 목담사리도 어떤 민족주의적인 가치나 주장을 입에 담거나 한 적이 없었다. 그저 개인적인 분노였다. 불의하고 부당한 지배에 대한 솔직하고 순수한 분노였다. 종로시장의 상인들처럼. 그들이 일본과 일본인을, 이강토를 미워하는 것이 단지 어떤 민족주의적인 사고의 발로였을까? 그보다는 그들의 삶을 강제하고 억압하는 조선총독부의 지배가 마음에 들지 않는 것 뿐이다. 식민지 조선의 백성에게는 인권이 없다. 어쩌면 목담사리나 이강토나 설사 일본의 지배가 그와 같이 계속 이어지더라도 차별과 억압이 사라지고 사는데 어려움만 없다면 그다지 크게 반대하거나 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기 어렵다는 것이 바로 문제일 테지만 말이다.

 

조선인은 조선인이다. 일본인은 일본인이다. 그같은 구분을 둔다. 그리고 구별한다. 구별하는 순간 이미 차별은 시작되는 것이다. 주도권은 일본과 일본인이 쥐고 있다. 일본과 일본인을 정의하고 조선과 조선인을 정의한다. 조선인이 되도록 하고 일본인이 되도록 한다. 내선일체라 해서 조선인으로 하여금 일본인이 되도록 강요하던 시절도 있었지만, 그때에도 단지 외형만 일본인이었을 뿐 본질적으로 차별받고 억압받는 식민지백성인 것은 다르지 않았다. 오히려 내선일체를 강조하던 시절 반일감정을 가장 극에 달하고 있었다. 어려운 것이다. 기무라 슌지가 어느새 빠르게 일본인이 되고 일본의 경찰이 되어 가는 것처럼 말이다.

 

보다 근본을 건드리려 한다. 의도적인가는 모르겠다. 단지 한국형 히어로물을 만들고 싶었을 뿐인가. 각시탈에게서 조로가 보인다. 원작과는 달리 각시탈이 조로의 가면과도 많이 닮아 있다. 하필 말을 타고 나타나는 것도 그렇다. 각시탈이 타는 말은 총을 쏴도 맞지 않는다. 히어로물의 영웅이란 사적인 폭력을 수단으로 자신의 정의를 관철하려는 존재일 것이니, 결국 한국형 히어로 각시탈의 영웅적 활약도 사적인 폭력에 의지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그 덕에 보다 근본적인 어떤 것을 살피고 깨닫게 한다. 어쩌면 모두가 무심코 지나쳤을 그것을 새삼 보게 만든다.

 

드라마 자체는 상당히 허술하다. 그렇게 자신하더니만 수녀로써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가조차 제대로 알아보고 준비하지 않았었다. 목단이 어려서 성당에서 자랐다는 사실조차 몰랐다. 그 결과 성당에서 자란 목단에게 바로 정체를 들키고 거꾸로 역이용당하게 된다. 각시탈이 나서서 경찰들을 유인하려 했건만 우에노 리에(한채아 분)의 개입으로 인해 오히려 한결 쉽게 경찰서로 잠입해 무기고에서 폭탄을 빼돌리고 있었다. 우에노 리에가 아니었으면 다시 한 번 치열한 싸움이 있어야 했을 테니 드라마를 보는 입장에서는 아깝다고 해야 할까?

 

목담사리의 분장도 어설프기는 마찬가지다. 그나마 목담사리를 의심하여 가방을 뒤져본 기무라 타로의 신중함은 칭찬해 줄 만하다. 그러나 그조차도 목담사리의 안경을 벗겨볼 생각을 못했다. 각시탈이 나타났다는 소식에 마음이 급한 것도 있었지만 역시 많이 허술한 부분이었다. 그런 주제에 목단이 각시탈을 위해 떠나려 할 때는 공교롭게도 선화(손여은 분)가 나타나 그녀의 발목을 붙잡고 있었다. 때마침 각시탈이 나타나 그녀를 구한 것도 절묘하다. 하지만 히어로물이란 바로 그같은 유치하지만 직관적인 구조위에 있는 것이다. 어렵거나 복잡해서는 영웅이 될 수 없다. 총을 든 경찰들에 둘러싸였어도 쇠퉁소 하나면 빠져나올 수 잇는 것이 바로 영웅물인 것이다.

 

어쨌거나 결국 기무라 슌지는 목단에게 총을 겨누고, 목단 역시 기무라 슌지의 총을 빼앗아 그녀에게 겨누게 된다. 돌이킬 수 없게 되었다. 이미 목단에게 총을 겨눈 순간 기무라 슌지는 다시 목단에게 돌아갈 수 없게 되었다. 목단 역시 기무라 슌지에게 총을 겨눈 순간 그들의 우정은 이미 끝난 것이나 다름없다 할 것이다. 기무라 슌지는 절망한다. 모든 것이 자신이 자초한 결과이기에. 그가 그렇게 만들었다. 상황이 그렇게 만들었다. 목단이 그렇게 만들었다.

 

경계다. 자신의 탓인가? 상황의 탓인가? 목단의 탓인가? 반성은 인간이 앞으로 나아가는 힘이다. 자신을 반성하는가? 현실을 반성하는가? 아니면 목단에게 반성케 하는가? 그러나 말했듯 기무라 슌지는 무척 성실한 사람이다. 바보같을 정도로 착하고 좋은 사람이다. 그는 좋은 일본인이 된다. 좋은 경찰이 된다. 목단이 그를 일컬어 왜놈일 뿐이라 말한 이유다. 당시에 있어 좋은 일본인이란 바로 그런 일본인을 뜻한다. 목단은 좋은 조선인이 아니다.

 

거사를 일으키려 한다. 거대서사에 각시탈이 얽힌다. 아직 조선도 조선민족도 나오고 있지 않다. 지극히 개인적인 이유다. 개인으로써 일본제국주의라고 하는 거대한 적과 맞서려 한다. 과연 어떻게 되려는가? 계기가 되어줄 것이다. 영웅으로서의 각시탈의 정체를 확인해준다.

 

기무라 슌지가 슬프다. 목단이 역시 슬프다. 목단의 비장함이 그래서 더욱 슬프다. 이강토는 아직 비장해지지 않았다. 목단과 기무라 슌지 앞에 비감해진다. 그에게서 주제를 본다. 일본인도 조선인도 아닌 인간 이강토로서. 각시탈조차 아닌 자신으로써. 새로운 영웅을 본다. 재미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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