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이 사람이게 된 것이 그리 오래지 않다. 사람이라고 다 사람이 아니었다. 사람다워야 비로소 사람이라고 인정되었다. 출생이나 직업, 종교, 신념, 사상, 문화, 혹은 그 행위에 대한 도덕적 판단에 대해서. 사람이 아닌 것에 사람으로서의 존중이란 있을 수 없었다.
천부인권이라는 것이 바로 여기에서 출발했다. 누가 사람을 판단하는가? 누가 사람을 결정하는가? 태어나는 순간 누구나 사람이다. 사람으로서 존엄과 권리를 갖는다. 하지만 현실이 그러한가? 천부인권을 탄생시킨 프랑스조차 식민지를 경영하며 원주민에 대한 잔인한 인권유린을 일상적으로 저지르고 있었다. 천부인권조차 프랑스인, 나아가 유럽인을 넘어서지 못하고 있었다.
그래서 다시 민족주의가 나타난 것이다. 원래의 민족주의는 지배계급이 피지배계급을 단결시키기 위한 구호였다. 지배계급의 전쟁을 위해 피지배계급이 자발적으로 나서라. 지배계급은 국가와 동일시되고, 국가는 다시 피지배계급과 동일시된다. 재벌의 이익이 곧 국가의 이익이며, 국가의 이익이 곧 국민의 이익이다. 피지배계급에 국가라는 정체성을 강요하며 국민이라는 신분을 부여한다. 같은 독일어를 쓰더라도 알사스로렌은 프랑스의 영토이며 알사스로렌의 사람들은 프랑스의 국민이다. 그들은 마땅히 독일과 전쟁이 일어났을 때 프랑스를 위해 총들고 맞서 싸워야 한다.
그리고 그같은 민족주의의 배타성은 강대국에 의해 침탈당하며 압제에 신음하던 수많은 약소종족들과 만나며 새로운 양상을 띄게 되었다. 한 마디로 우리도 사람답게 살아보자. 프랑스대혁명이 탄생시킨 천부인권조차 프랑스의 국경을 넘지 못했다. 프랑스의 국경을 넘고 나서도 유럽을 넘어서지는 못했다. 그들만이 사람이었다. 제국주의 시대 제국주의 열강에 속한 이들만이 오로지 사람으로 대우받고 행세할 수 있었다. 그 이외의 열강에 속하지 못한 모든 이들은 사람이 아니었다. 가축보다 조금 낫거나, 아니면 가축보다 오히려 못한 열등한 존재가 바로 그들이었다. 그같은 현실을 바꿔보자.
그러면 무엇이 사람을 정의하는가? 바로 권력이다. 당연하다. 사람을 정의한다는 것은 사람이 아닌 것들에게 사람이 아닌 것을 강요할 수 있다는 뜻이다. 그 반발을 힘으로 누를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그것은 사람에 속한 이들의 동의 아래 보편이라는 이름의 질서로 확정된다. 다수가 권력의 결정에 동의한다. 이를테면 에도시대 농민들의 반발을 억누르기 위해 히닌이라는 천민을 인위로 만들어 불만을 발산하도록 한 정책이 그에 속할 것이다. 농민의 동의 아래 히닌에 대한 차별은 보편적인 상식이 되어 21세기인 지금에 이르기까지 뿌리깊게 남아있다.
원주민에 대한 차별을 정의한 것은 제국주의 열강이라는 권력이다. 그 권력을 뒷받침하고 있는 것이 그같은 제국주의 체제 아래 사람으로서 권리를 누리는 다수의 사람들이다. 원주민들이 사람으로서 존엄을 되찾고 대우받기 위해서는 그들의 의지를 꺾어야 한다. 무엇으로 그들의 의지를 꺾을 것인가? 그래서 단결을 외친다. 자신들도 하나가 되어 저들에 대항하자고. 저들에 대항하여 자신들의 당연한 권리를 되찾자고. 그러기 위해서는 힘을 가져야 한다. 권력이다. 그 권력을 구체화한 것이 바로 국가다. 국가의 주권이란 가장 강한 힘이다. 누구로부터도 차별받지 않는 자신들만의 나라를 만들겠다. 그 안에서는 어느 누구도 다른 누군가로부터 차별받지 않고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약소민족에게서 민족주의란 바로 그같은 해방운동으로 이어졌다.
일제강점기 자치론에 대한 재평가가 필요한 이유다. 자치운동 또한 목적은 같다. 조선인도 사람답게 살아보자. 조선인도 사람으로서 존엄하게 인정받으며 살 수 있도록 해보자. 그래서 독립운동가들은 조선인이 조선인으로서 살아갈 수 있는 독립국가 대한민국을 꿈꾸었고, 독립에 대한 실현성에 의문을 품은 또다른 민족주의자들은 일본제국주의의 지배를 인정하면서 그 안에서 조선인의 지위향상을 꿈꾸고 있었다. 지금이야 자치론자나 적극적인 부일배나 같은 친일파로 매도당하고 있지만 당시 식민지조선에서 이들 자치론자들은 독립운동가들이 떠난 조선에서 조선의 인민들을 이끄는 지도자적 위치에 있었다. 장준하 선생과 같은 이들도 그래서 육당 최남선의 글을 읽고 일본군에 자원입대하고 있었다. 일본의 전쟁에 자발적으로 동참함으로써 일본정부로부터 조선인의 존재를 인정받아보자. 일본이 전쟁에서 패배했으니 물론 당연히 그들은 전범이다. 그 책임은 피할 수 없다.
어째서 독립운동인가? 어째서 항일투쟁인가? 어째서 계란으로 바위를 치는가? 그것이 옳기 때문이다. 바로 눈앞에 일본제국주의 경찰의 고문에 의해 만신창이가 되어 버린 목담사리(전노민 분)의 모습처럼. 고결한 이상을 품은 민족의 영웅이건만 일본에 의한 사법질서 아래 그는 단지 사회질서를 해치는 불령한 범죄자에 불과할 뿐이다. 그것도 일본인도 아닌 2등 신민인 조선인이다. 사람이 아니다. 매질을 하고 심지어 못을 박은 상자에 넣어 짐승처럼 굴린다.
몸의 고통도 고통이지만 그보다 견디기 힘든 것이 바로 인간적인 모멸감이다. 조단장(손병호 분)이 끝내 기무라 슌지(박기웅 분)의 고문에 굴복하고 만 이유였다. 인간 이하가 되었다. 그리고 인간 이하가 되어 끝내 고문에 굴복하고 말았다. 과연 기무라 슌지가 조단장을 같은 사람으로 보았다면 그같은 고문을 태연히 자행할 수 있었을까? 자신을 선생님이라 부르는 조선인 아이를 그는 못 본 척 무시하고 있었다. 그토록 마음을 기울이던 목단(진세연 분)조차 단지 불령한 아비를 둔 조선인 계집에 불과할 뿐이다. 비로소 훌륭한 일본인이 되어간다.
이강토(주원 분)를 부르는 그의 호칭마저 미묘하게 바뀌었다. 공식적으로 존중해 부를 때는 사토 히로시, 아직까지 친하게 부를 때는 이강토, 그러나 어느새 이강토란 모멸의 뜻으로 불려지고 있었다. 이강토를 그토록 싫어하는 고이소(윤진호 분) 또한 한 번도 그를 사토 히로시라 부른 적 없었다. 그에게 이강토란 단지 천박한 조선인 이강토일 뿐이었다. 사토 히로시란 사람에 붙는 이름이다. 조선인인 이강토는 사람이 아니다. 그것이 더욱 고이소를 분노케 만든다.
사람이 사람이 아니게 된다. 그렇기에 사람으로서 사람답게 살아보려 한다. 철도를 놓고, 도로를 닦고, 학교를 세우고, 전기를 들이고, 그래서 누군가는 일본제국주의에 의해 비로소 한반도가 근대화되었다 말하기도 한다. 일본제국주의의 식민지가 됨으로써 조선시대보다 더 살기 좋아졌노라고. 하지만 중요한 것은 그런 것이 아니다. 사람이 동물과 다른 이유다. 사람에게는 이성이 있다. 이성은 곧 존엄이다. 존엄하지 않은 사람은 사람이 아닌 짐승에 불과하다.
마찬가지로 많은 이들이 사람 이하의 대우를 받으며 무참히 고문당하던 시절이 있었다. 죄가 없는데도 끌려가 죄인이 되고, 아무 죄도 없는데 고문 끝에 법까지 동원해 형장의 이슬로 만들었다. 연좌로 고통받고 평생을 국민 아닌 국민이 되어 감시와 차별 속에 살아야 했었다. 민주화의 이유였다. 국이 일본제국주의가 대한제국을 멸망시키고 식민지로 삼지 않았더라도 우리 자신의 손으로 대한제국을 멸망시켰어야 하는 이유였다. 조국이 아니다. 민족도 아니다. 단지 존엄이다. 그 존엄에 대한 분노다.
고문으로 만신창이가 된 목담사리의 모습에 이강토가 분노하는 이유다. 그런 목담사리를 심지어 대못상자에 넣어 다시 고문하려 한다. 참지 못한다. 그는 사람이다. 목담사리도 사람이다. 조선인도 사람이다. 기무라 슌지는 그를 조선인이라 부른다. 고이소도 그에게 조선인을 말한다. 그는 일본인이 아니다. 비로소 자각하는 것이다. 자신은 조선인임을. 어머니의 아들도, 형의 동생도 아닌, 목담사리와 같은 조선인임을. 기무라 슌지가 자신을 일본인이라 자각했듯.
민족을 말하지 않고서도 항일을 말할 수 있다. 반일이 아니다. 일본인을 거꾸로 차별하자는 것이 아니다. 일본인도 존엄하다. 한국인도 존엄하다. 단지 그 존엄을 해치는 행위에 반발하고 분노한다. 애국심이 아닌 순수한 인간의 존엄에 대한 외경이며 자각이다. 그리고 그것은 지금에도 계속 이어진다. 굳이 일본과 일본인이 아니더라도 우리는 과연 존엄한가 하는 질문에.
아무튼 결국 그같은 결코 감출 수도 양보할 수도 없는 존엄에 대한 댓가로 이강토는 기무라 슌지로부터 더 큰 의심을 사고 만다. 이제는 거의 확신이다. 이강토가 목단의 원래 이름인 '분이'를 알고 있다. 그런 분이의 이름을 외쳐부르며 목담사리에게 그녀를 살려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거꾸로 그것이 이강토가 각시탈이라는 사실을 가릴 수 있는 단서가 될지도 모른다. 이강토가 각시탈이어서가 아니라, 단지 목단과의 어릴 적 인연 때문에 그녀를 돕고 있는 것이다. 기무라 슌지에게도 목단에 대한 미련이 남아 있다면 다시 한 번 계기가 되어줄 수 있다. 그러나 이미 기무라 슌지는 일본인이다.
차마 보기 안좋다. 목담사리라면 분명 조선의 영웅일 것이다. 조선의 독립을 위해, 정확히 조선인의 존엄을 위해 싸우는 그에게, 그러나 가해지는 무참한 폭력이라는 것은. 한 인간의 양심에 가해지는 모멸적인 대우라는 것도 역시. 그러나 불과 십수년 전까지 우리 자신의 모습이기도 했다. 많은 이들이 그리며 아쉬워하는 시절이다. 아직 현실인 것이다. 드라마는.
무엇을 위해 싸워야 하는가? 무엇을 위해 분노해야 하는가? 각시탈은 그것을 말해준다. 단지 일본이어서가 아니다. 일본인이어서도 아니다. 조선인이기 때문도 아니다. 사람이기 때문이다. 사람으로서 살아가고자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람으로 죽고자 한다. 마음이 무겁다. 몹시 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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