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이란 이기다. 탐욕이다. 그래서 사람은 사랑을 한다. 그리고 어느새 사랑이 식어 헤어지기도 한다. 사랑이 식어 잔잔해졌을 때 그 자리를 대신하는 것이 바로 의리다. 책임이고 이타이다. 나를 위해서 사랑하고 상대를 위해 끝까지 함께 한다.
그래서 문제다. 탐욕이란 상대에게 다가가고자 하는 힘이다. 이기란 상대를 자기의 곁에 두고 싶은 동기다. 그런데 거꾸로 간다. 책임을 먼저 느낀다. 먼저 상대를 배려하고자 한다. 착한 사람은 사랑을 못한다. 위대한 짝사랑의 법칙이다. 하물며 사랑을 미처 느끼기도 전에 의리에 익숙해 있다. 차마 자신의 이기와 탐욕을 강요하기가 차라리 죄스럽기까지 하다.
과연 최인혁(이성민 분)이 신은아(송선미 분)에 대해 느끼는 감정이 이와 같은 이성에 대한 사랑의 감정인가? 하지만 굳이 사랑한다고 해서 그것이 상대의 성적인 부분일 필요는 없다. 누군가는 상대가 가진 돈을 더 사랑하고, 누군가는 상대의 배경에 더 호감을 느낀다. 여성이라는 성별을 지닌 신은아가 아닌 믿고 의지할 수 있는 동료 신은아라 해도 좋다. 인간에 대한 신뢰와 존경이 그와 계속 함께 있고 싶은 욕망으로 이어진다. 사랑과 같다. 무엇보다 이제 막 태동을 시작한 '중증외상센터'에 있어 그녀와 같은 경험많고 실력까지 겸비한 자원은 매우 중효다가. 그녀가 끝까지 함께 새로 시작하는 '중증외상센터'를 이끌어가 주었으면 싶다.
그러나 그렇기 때문이다. 그같은 최인혁의 이기적인 욕심 이전에 그동안 신은아와 함께 해왔던 시간들이 있다. 그동안 고맙고 미안했던 마음의 빚들이 헤아릴 수 없이 가득 쌓여 있다. 그래서 더욱 못할 짓이다. 결코 편한 길이 아니다. 어렵고 힘든 길이다. 그렇다고 대단한 영광이 기다리고 있는 것도 아니다. 사명과 보람이란 오로지 자기의 이기다. 오래도록 보아왔고 또 팰로우로서 그동안 고생해 온 것 역시 알고 있기에 박성진(조상기 분)에게도 그래서 최인혁은 함께 하자는 말을 하지 못한다. 스스로 자신이 선택해서 하는 일이 아니면 원망이 남고 후회가 남는다. 결혼이라는 행복까지 포기하고 이대로 남아 자신과 함께 그 길을 끝까지 같이 가자고 최인혁은 신은아에게 말할 수 있겠는가?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또 역시 신은아도 기다리고 있다. 자기를 필요로 한다고 말해주기를 바란다. 자신이 곁에 있어주었으면 좋겠다고 최인혁 자신의 입으로 솔직하게 말해줄 수 있기를 바란다. 역시 사랑인가는 모른다. 의사로서의 최인혁에 대한 존경과 신뢰일 것이다. 그와 함께 하고 싶다. 그와 끝까지 가고 싶다. 하지만 과연 자신이 그에게 그렇게 필요한 존재인가는 모르겠다. 확신을 가지고 싶다. 자기가 최인혁에게 없어서는 안되는 중요한 인물이라는 것을. 최인혁과 마찬가지로 신은아 역시 단지 의리만으로 짐처럼 그의 곁에 남아있기는 싫다. 지난주 최인혁에게 가운을 입혀주려 했을 때 최인혁의 무심한 대응에 상처입은 표정을 지은 것이 그래서다. 어쩌면 자신은 최인혁에게 그런 정도밖에 되지 않는가?
어떻게 보면 진부할 정도로 전통적인 멜로의 구조일 것이다. 남자는 자신이 없다. 당장 여자에게 해 줄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 그래서 남자는 머뭇거린다. 그런 남자의 모습에 여자는 확신을 갖지 못하고 불안해하고 방황하기 시작한다. 그녀의 곁에는 어느새 새로운 남자가 있다. 그 남자 앞에서조차 당당해지지 못하고 솔직해지지 못하는 그 모습이 얼마나 답답한가.
신은아의 약혼자와 함께 식사를 하는 자리에서 최인혁의 모습은 그런 흔한 멜로의 남자주인공과 닮아 있었다. 그런 최인혁을 바라보는 신은아 역시 그런 흔한 멜로의 여자주인공을 닮아 있었다. 최인혁은 그렇게 신은아의 약혼자를 소심하게 질투하고 있었고, 신은아 역시 그런 최인혁을 불만스럽게 바라보고 있었다. 그렇게 그들은 서로를 원하면서도 멀어진다. 최인혁도 신은아를 원하고, 신은아도 최인혁을 원하지만, 그러나 솔직해질 수 없기에 그들은 다음을 기약할 수밖에 없다. 영원한 헤어짐과 아련한 그리움으로 끝나거나, 혹은 후회하며 다시 돌아와 만나거나. 다만 말했듯 과연 그것이 서로에 대한 이성적인 감정에 의해서인가? 단지 인간에 대한 서로의 신뢰와 존경의 감정인가? 사람은 여러가지 다양한 이유로 사랑을 하고, 마찬가지로 사람 수 만큼이나 다양한 형태로 서로 사랑을 한다. 사랑은 사랑이다.
하기는 어쩌면 바로 이런 부분이야 말로 <골든타임>이라고 하는 드라마의 개성을 드러내는 부분일 것이다. 원래 잘난 남자들이다. 잘난 여자들이기도 하다. 매력적인 주인공들이다. 그런 매력적인 남녀가 오랫동안 함께 하는데 서로에 대한 이성적인 호감을 전혀 느끼지 않는다는 것이 과연 가능한 일일까? 하지만 남자이기 이전에 최인혁은 의사이고, 여자이기 이전에 신은아는 간호사다. 병원의 코디네이터다. 이민우(이선균 분) 역시 아직 인턴으로서 자신에게 주어진 일상조차 감당하기 버겁다. 강재인(황정음 분)에 대한 호감을 이성적인 감정으로 발전시키기에는 아직 감정적인 여유가 없다. 강재인 또한 그같은 일상을 받아들이는 것만도 바쁘다. 양다리로 일한 스캔들의 충격도 덕분에 어느새 잊고 있다.
남자와 여자로서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과 인간으로서 사랑한다. 의사이며 간호사다. 중증외상센터의 존재에 대해 간절히 느끼고 있는 외상외과의 전문의이며, 그런 의사의 이상에 동이하고 있는 파트너다. 그들의 대화는 그렇게 이루어진다. 그들 사이의 감정의 교류도 그렇게 이루어진다. 멜로이지만 멜로가 아니다. 멜로가 아닌데 절묘하게 멜로의 분위기를 풍긴다. 과연 이민우는 강재인을 사랑하게 될 것인가? 강재인은 이민우에게 이성으로서 호감을 가지게 될 것인가? 아니 그 이전에 인간에 대한 신뢰와 존경이 우선일 것이다. 그런 그들이 자신을 가질 수 있도록 그들이 지금 걷고 있는 길에 대한 확신이 주어지기를.
아마도 그래서일 것이다. 하필 신은아의 약혼자와 최인혁이 만나는 그 순간 공기총사고 환자가 실려온 것은. 치정관계였다. 옛남자친구이고 이제 곧 결혼할 약혼자라고 했다. 남자친구가 옛여자친구를 쏘았고 자살을 시도했다. 그런 옛남자친구를 원망하기보다 여자는 걱정하고 있었다. 그들 사이에도 신은아와 최인혁의 경우와 유사한 흔한 멜로가 흐르고 있었을까? 옛남자친구의 우유부단함에 실망해 새로운 남자를 찾고, 그제서야 옛남자친구는 간절함으로 옛여자친구를 찾는다. 그러나 간절함은 이내 후회로 바뀌고 후회는 다시 절망으로 바뀐다. 지금이 아니면 다음은 없다. 신은아와 최인혁에게 보내는 메시지였을 것이다. 역시나 말했듯 최인혁과 신은아의 관계는 멜로가 아니면서도 멜로와 무척 닮았다.
참 애잔한 회차였을 것이다. 최인혁과 신은아 사이에 흐르는 감정이 안타까워서. 그래서 오히려 공기총사고로 실려온 남녀들의 처절하기까지 한 사연은 한 바탕 헤프닝으로 우스꽝스럽기까지 하다. 지나고 나면 그렇다. 어떤 식으로 결론이 나든 깔끔하게 정리되지 않은 감정은 남들의 이야깃거리로나 떠돌 뿐이다. 강재인 역시 그랬었다. 이제는 단지 기억으로 남았다. 신은아의 선택은, 최인혁의 결단은 과연 무엇일까? 안타깝게도 시청자들은 이미 신은아의 배역의 비중이 드라마에서 상당하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억울한 기분이다.
시작은 초라하다. 좁은 사무실에 인턴 둘에 교수 한 사람에 간호사 한 사람. 그러면 어째서 최인혁은 이민우를 선택했던 것일까? 어째서 이민우와 강재인 만큼은 다른 사람들과는 달리 거리낌없이 받아들일 수 있었던 것일까? 인턴이니까. 장차 무엇을 할 지 알 수 없다. 무엇을 하려 할 지, 무엇을 하게 될 지, 그래서 어떤 모습이 되어 있을지. 의사가 아닐 수도 있다. 전혀 다른 곳에서 다른 일을 하고 있을 수도 없다. 그래서 부담이 없다. 인턴이란 의사가 아니다. 굳이 최인혁 자신이 책임질 필요가 없다. 그는 무척 외롭다. 착한 사람은 항상 외롭다.
최인혁이 주인공이다. 최인혁이 주인공인 의학드라마이고 멜로드라마다. 지나치게 존재감이 커졌다. 그런데 또 그것이 기분이 나쁘지 않다. 그만큼 매력적인 캐릭터다. 그가 하는 사랑조차도 매력적이다. 진지하면서도 소심하고, 열정적이면서도 매우 무르다. 그래서 그는 의사를 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약하지만 강하다. 강하지만 약하다. 그는 의사다.
선택의 순간은 결국 다음주로 미뤄졌다. 중증외상센터를 만드는 것만도 이렇게 힘들다. 현실이 그렇게 힘든 때문이다. 시즌제를 제안해본다. 중증외상센터를 만드는 것이 이렇게 힘들다면 다음은 역시 그 뒤로 미뤄둬야 할 것이기 때문이다. 놓치기 아까운 소재다. 그리고 너무나 멋진 캐릭터와 이야기들이다. 배우들도 너무 멋지다. 어설픈 연장보다는 나을 것이다.
재미있었다. 시간이 가는 것도 몰랐다. 마지막에 박원국 환자의 다리가 괴사하여 자르지 않으면 안되는 상황에 몰렸을 때 담담하면서도 절박하던 최인혁의 모습이 무척 인상적이었다. 박성진의 평가가 떠오른다. 그 무서운 선택과 판단을 매순간 해야 한다. 조동미(신동미 분)도 그 의견에 동의한다. 대단한 분이라고. 의사는 신이 아니다. 의사라고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단지 자기가 할 수 있는 최선만을 다하여 노력할 뿐. 드라마 <골든타임>의 메시지일 것이다. 무력한 인간의 처절한 전장이다. 그것이 사람을 매료시킨다. 즐겁게 한다.
말이 필요없는 드라마다. 이제까지의 어느 의학드라마와도 다르다. 이제까지의 국내의 어떤 드라마와도 다르다. 아름답지도 세련되지도 않다. 이성민의 외모처럼 거칠고 투박하다. 그러나 그를 통해 진심이 전해진다. 피냄새가 진하다. 땀냄새가 진하다. 아름답다.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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