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

각시탈 - 달걀이 바위를 깨는 이유, 영웅이 죽지 않는 이유...

까칠부 2012. 8. 31. 08:34

아일랜드가 영국인들에 침략당하기 시작한 것이 12세기, 그리고 16세기 마침내 핸리 8세에 의해 완전히 정복당하여 지배당하게 된다. 그로부터 1919년 영국으로부터의 독립을 선언하기까지 무려 400년 가까운 시간을 아일랜드는 영국의 식민지로 남아있었던 것이다. 아니 지금도 아직 영국정부의 통치를 받고 있는 북아일랜드에서는 영국에 대한 저항운동이 끊이지 않고 일어나고 있다.


스페인의 바스크 지방이 외국의 지배를 받기 시작한 것은 무려 13세기부터였다. 그러나 18세기 이후 오히려 바스크 민족주의가 강해지기 시작한 이 지역에서는 특히 프랑코의 군사독재 아래에서 가혹한 탄압을 받으며 '바스크 조국과 자유(ETA)'라고 하는 결사를 만들어 지금까지 분리를 허락하지 않는 스페인 정부에 대해 가열찬 투쟁을 전개해가고 있는 중이다. 당연히 주권을 가진 정부를 가지지 못한 그들이기에 국제사회로부터 테러집단으로 규정되어 있지만, 그래서 수많은 구성원들이 테러리스트로서 세계의 여러 감옥에 수감되어 있는 상황에서도 그들은 아직까지도 바스크의 분리독립에 대한 의지를 포기하지 않고 있다.


세계최대의 소수민족이라 불리우는 2500만 쿠르드인들의 독립국가를 세우기 위한 노력도 사실 20세기 이후에나 나타난 현상이었다. 이전까지 쿠르드인들은 부족단위로 뿔뿔이 흩어져 살고 있었다. 그러나 20세기 들어 열강의 자의적인 국경분할로 쿠르드인들은 터키와 이란, 이라크로 나뉘어 살게 되었고, 여기에 각 나라의 강화된 민족주의에 의해 쿠르드인들에 대한 차별이 심해지면서 오히려 외부의 압력에 의해 쿠르드인들은 자치독립국을 세우고자 하는 의지를 가지게 되었다. 그리고 그러한 그들의 의지는 여전히 현재진행형에 있다.


지금은 오키나와라 부른다. 하지만 불과 19세기 말까지도 그곳은 류큐라 불리는 독립국가였다. 이미 17세기부터 사츠마 번의 지배를 받고 있기는 했지만 일본과 다른 자신들만의 고유한 문화와 언어, 그리고 왕조를 가지고 있었다. 태평양 전쟁 이후 미국의 점령지가 되면서 류큐공화국의 독립을 추진하는 움직임이 있었다가 1972년 미국이 오키나와라는 이름으로 다시 일본에 반환하면서 류큐독립운동은 현재진행형이 되었다. 지금도 오키나와 주민의 40% 이상이 스스로를 류큐인으로서 일본인과 다르다고 생각하고 있고, 그나마 36%의 주민들이 류큐인이면서 오키나와인이라 대답하고 있었다. 독립운동을 지지하는 여론이 20%를 상회한다.


조선이 그대로 일본의 지배를 받았다면 영원히 일본의 일부로 남아 있었을 것이다. 자칫 그대로 일본에 의한 민족말살정책 아래 있었다면 조선인이라고 하는 민족적 정체성을 완전히 사라져 있었을 것이다. 차라리 일본의 일부가 되어 일본의 번영을 함께 나누어 누리는 것이 더 낫지 않았겠는가 주장하는 일부 탈민족주의자들의 주장에 대한 반박이다. 탈민족이 마치 현대사조의 대세가 되면서 민족을 부정하는 것이 마치 지식인의 요건인 양 여기는 이들이 많아진 탓이다. 민족주의를 부정하기 위해 일본의 제국주의를 긍정한다. 어설픈 지식인의 함정을 여기에서 본다.


이토 히로부미가 조선을 합병하는 것을 부담스러워한 이유였다. 일본 역시 조선을 지배하기 위해 생각 이상의 비용과 노력을 조선에 들이지 않으면 안되었다. 이미 오래전부터 조선인들은 일본인들을 왜놈이라 비하해 부르고 있었다. 소중화란 중화보다는 작지만 다른 야만족들보다는 문화적으로 우월하다는 자긍심의 표현이었다. 일본인의 지배를 받는다는 것은 조선인들에게 있어 쉽게 받아들이기 힘든 현실이었다. 잠재되어 있다가도 6.10만세나 광주학생운동 등 기회만 되면 조선인들의 독립의지가 불길처럼 피어오르곤 했던 이유가 바로 그것이었다. 그러나 단지 사람은 비겁하기에 무시무시한 폭력을 행사하는 일본제국주의 앞에 굽힐 수밖에 없었던 것이었다.


조금 다르게 묘사되고 있지만 드라마에서 친일파들이 오히려 구일본제국의 조선인 징병에 환영의 뜻을 표했던 부분은 매우 옳다. 아니 조선인 민족주의자들조차 그것을 반기고 있었다. 일본이 패망한다면 모르지만, 만일 일본이 승리한다면 - 중일전쟁은 물론 태평양전쟁의 초기전황은 그렇게 오판하기에 충분한 근거가 되었다. 조선내 독립에 대한 의지가 결정적으로 꺾이게 된 계기였다. - 차라리 일본인과 더불어 전쟁에 참여함으로서 조선인의 역할과 가치를 인정받는 것이 낫지 않겠는가? 조선인의 기개를 보여주고 조선인의 권리를 인정받자. 그래서 장준하 선생과 같은 이들도 최남선 등의 선동에 이끌려 일본군에 자원하고 있었다. 


과연 그렇다고 해서 그것이 조선인이 조선인임을 포기한 증거가 될 수 있는가? 인도인들도 영국인의 전쟁에 스스로 자원해서 참전하고 있었다. 인도인 민족주의자들이 인도인들을 영국의 전장으로 내보내고 있었다. 인도인의 권리를 인정받기 위해서였다. 1차세계대전 당시는 배신당했지만 2차세계대전이 끝나고 나서는 영국도 힘이 빠져 마침내 인도의 독립을 인정해 줄 수밖에 없었다. 


그것밖에는 다른 방법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여전히 일본제국주의는 강하고, 그로부터 조선인이 스스로 독립을 얻어낼 수 있는 가능성은 작아만지고 있었다. 상해임시정부도 장개석 정부를 쫓아 일본군에게 쫓겨 충칭으로 옮겨가야만 했었다. 말이 의거지 과연 아랍의 누군가가 미군이나 서방의 장교들이 모인 연회장에 폭탄을 떨어뜨렸다면 우리는 그것을 무엇이라 평가했을까? 바스크 독립주의자나 북아일랜드를 해방시키고자 하는 아일랜드인이 스페인이나 영국의 군인들이 모인 자리에 폭탄을 터뜨렸다. 그나마 그것이 중일전쟁 도중이었고 중국 내에서 중국과의 전쟁에서 승리한 것을 자축하기 위해 일본의 장교들이 모인 자리였기에 장개석의 인정을 받았다. 열강의 일원으로서 장개석의 지지가 조선이 독립하는 계기가 되어 주었다. 그러나 그런 만일을 기대하기에는 당시 식민지 조선의 현실이 너무나 열악했다. 그것을 민족을 버렸다 매도할 수 있겠는가?


일제강점기 일제에 저항하지 않은 모두는 친일파다. 실제 나라를 팔고 민족을 팔아 영화를 누린 이들이 스스로를 변명하며 하는 말이다. 모두가 같지 않다. 친일파로 분류된 이들 가운데도 태평양전쟁의 전범이기는 할지언정 민족을 팔아먹은 배신자라고는 말할 수 없는 이들이 적지 않다. 그들은 단지 어리석었을 뿐이다. 아니 그들의 현실이 그리 각박하고 가혹했던 때문이다. 목숨을 걸고 싸우는 것도 희망이 있기 때문이다. 양백(김명곤 분)이나 동진(박성웅 분)이 봉기에 뜻을 둘 수 있었던 것도 일본의 패망을 예견했기 때문이 아니던가.


바위는 죽은 것이다. 달걀은 살아있다. 닭은 달걀을 낳는다. 바위는 가만 있어도 세월에 의해 깎이고 부서진다. 닭이 처음 세상에 나왓을 때 어떤 곳은 커다란 바위산이었겠지만, 그러나 닭이 알을 낳고 병아리가 자라 닭이 되어가는 사이 바위는 깎이고 부서져 언덕이 되고 평지가 되었다. 존엄이란 존재다. 곧 삶이다. 인간이 존엄하고자 하는 것은 그것이 바로 인간이기 때문이다. 과연 탐욕에 대한 의지가 그와 같은 인간이고자 하는 의지보다 더 강한가? 의지가 남아있는 한 - 다시 말해 인간이 인간으로 있는 한 결코 그것은 끝이 아닌 것이다.


양백이 죽으면 어떤가? 동진이 죽으면 또 어떤가? 무엇이 옳은가를 아는 아이가 있다. 무엇이 멋진가를 볼 줄 아는 아이가 있다. 그것이 이성이다. 인간의 양심이다. 현실에서도 백범이 죽임을 당했다면 또다른 백범이 그 자리를 대신했을 것이다. 몽양이 죽임을 당했어도 몽양이 아닌 누군가가 그 자리를 대신해 맡았을 것이다. 일본이 조선인 모두를 죽이지 못하는 한. 최소한 조선인의 양심과 의지를 모두 꺾어버리지 못하는 한. 그리고 단 한 사람만 있어도 인간의 존엄은 깨어난다. 탐욕과 집착은 스스로를 부끄럽게 만들 뿐이지만 존엄은 스스로를 존귀하게 만든다. 


죽어가면서도 담사리(전노민 분)는 웃을 수 있지만 그것을 지켜보는 기무라 슌지(박기웅 분)는 웃지 못하는 이유다. 그나마 기무라 슌지는 부끄러움을 안다. 우리에게는 다행이다. 당시 일본인들은 부끄러움을 몰랐다. 그래서 끝내 패망하고 말았다. 죽은 바위였던 것이다. 무엇도 생산해내지 못하는, 누구도 설득하지 못하는 죽은 바위에 불과했던 것이다. 서구제국으로부터 아시아를 해방시킨다고 하는 명분은 많은 아시아의 민족지도자들을 현혹시켰지만 이내 일본인들이 보여준 모습에 바로 고개를 돌려버리고 만 것이 그래서였다. 그것이 일본의 한계였다.


각시탈이 죽으니 새로운 각시탈이 나타난다. 이강산(신현준 분)이 죽으니 그의 동생 이강토(주원 분)가 각시탈이 되었다. 이강토가 죽으면 각시탈은 사라지게 될까? 드라마의 마지막을 문득 상상해 보게 된다. 이강토가 죽고 누군가는 살아남는다. 그리고 각시탈은 여전히 죽지 않고 살아있다. 이강토가 죽는 엔딩일 경우다. 설사 비극이더라도 그것은 비극이 아니다. 의지는 살아있다.


각시탈이 마침내 마지막 싸움을 위해 나선다. 형의 유지를 잇기 위한 싸움이다. 아버지의 한을 갚기 위한 싸움이다. 그리고 자신의 의지를 지키기 위한 싸움이기도 하다. 그는 죽을까? 군자는 죽지 않고 영원히 산다. 영웅도 죽지 않고 영원히 산다. 그래서 영웅이다. 죽은 이들은 여전히 살아 신이 된다. 남자는 나아가 싸우고 여자는 남는다. 전형적인 영웅물의 구도다. 그래서 달걀은 바위를 깨뜨린다. 아이가 남자의 성을 잇는 이유일 것이다. 달걀이었다는 증거다. 


자꾸 안좋은 결말을 생각하게 된다. 그래봐야 10년 남짓. 하지만 그 10년 남짓을 버티지 못하고 끝내 한을 품은 채 세상을 떠난 이들이 얼마나 되던가. 그렇다고 그들을 불행했다 말하기에는 우리들 자신이 그들을 기억하고 있다. 그들을 기억하는 한 그들은 영원히 죽은 것이 아니다. 아이가 태어나 자란다. 그 아이가 다시 아이를 낳아 기른다. 역사는 흐른다. 기억도 흐른다. 아마 그 기억의 어느 지점일 것이다. 기무라 슌지를 본다. 그는 무엇을 말하려는가. 무겁다. 한 주가 너무 길다.


아일랜드가 영국인들에 침략당하기 시작한 것이 12세기, 그리고 16세기 마침내 핸리 8세에 의해 완전히 정복당하여 지배당하게 된다. 그로부터 1919년 영국으로부터의 독립을 선언하기까지 무려 400년 가까운 시간을 아일랜드는 영국의 식민지로 남아있었던 것이다. 아니 지금도 아직 영국정부의 통치를 받고 있는 북아일랜드에서는 영국에 대한 저항운동이 끊이지 않고 일어나고 있다.


스페인의 바스크 지방이 외국의 지배를 받기 시작한 것은 무려 13세기부터였다. 그러나 18세기 이후 오히려 바스크 민족주의가 강해지기 시작한 이 지역에서는 특히 프랑코의 군사독재 아래에서 가혹한 탄압을 받으며 '바스크 조국과 자유(ETA)'라고 하는 결사를 만들어 지금까지 분리를 허락하지 않는 스페인 정부에 대해 가열찬 투쟁을 전개해가고 있는 중이다. 당연히 주권을 가진 정부를 가지지 못한 그들이기에 국제사회로부터 테러집단으로 규정되어 있지만, 그래서 수많은 구성원들이 테러리스트로서 세계의 여러 감옥에 수감되어 있는 상황에서도 그들은 아직까지도 바스크의 분리독립에 대한 의지를 포기하지 않고 있다.


세계최대의 소수민족이라 불리우는 2500만 쿠르드인들의 독립국가를 세우기 위한 노력도 사실 20세기 이후에나 나타난 현상이었다. 이전까지 쿠르드인들은 부족단위로 뿔뿔이 흩어져 살고 있었다. 그러나 20세기 들어 열강의 자의적인 국경분할로 쿠르드인들은 터키와 이란, 이라크로 나뉘어 살게 되었고, 여기에 각 나라의 강화된 민족주의에 의해 쿠르드인들에 대한 차별이 심해지면서 오히려 외부의 압력에 의해 쿠르드인들은 자치독립국을 세우고자 하는 의지를 가지게 되었다. 그리고 그러한 그들의 의지는 여전히 현재진행형에 있다.


지금은 오키나와라 부른다. 하지만 불과 19세기 말까지도 그곳은 류큐라 불리는 독립국가였다. 이미 17세기부터 사츠마 번의 지배를 받고 있기는 했지만 일본과 다른 자신들만의 고유한 문화와 언어, 그리고 왕조를 가지고 있었다. 태평양 전쟁 이후 미국의 점령지가 되면서 류큐공화국의 독립을 추진하는 움직임이 있었다가 1972년 미국이 오키나와라는 이름으로 다시 일본에 반환하면서 류큐독립운동은 현재진행형이 되었다. 지금도 오키나와 주민의 40% 이상이 스스로를 류큐인으로서 일본인과 다르다고 생각하고 있고, 그나마 36%의 주민들이 류큐인이면서 오키나와인이라 대답하고 있었다. 독립운동을 지지하는 여론이 20%를 상회한다.


조선이 그대로 일본의 지배를 받았다면 영원히 일본의 일부로 남아 있었을 것이다. 자칫 그대로 일본에 의한 민족말살정책 아래 있었다면 조선인이라고 하는 민족적 정체성을 완전히 사라져 있었을 것이다. 차라리 일본의 일부가 되어 일본의 번영을 함께 나누어 누리는 것이 더 낫지 않았겠는가 주장하는 일부 탈민족주의자들의 주장에 대한 반박이다. 탈민족이 마치 현대사조의 대세가 되면서 민족을 부정하는 것이 마치 지식인의 요건인 양 여기는 이들이 많아진 탓이다. 민족주의를 부정하기 위해 일본의 제국주의를 긍정한다. 어설픈 지식인의 함정을 여기에서 본다.


이토 히로부미가 조선을 합병하는 것을 부담스러워한 이유였다. 일본 역시 조선을 지배하기 위해 생각 이상의 비용과 노력을 조선에 들이지 않으면 안되었다. 이미 오래전부터 조선인들은 일본인들을 왜놈이라 비하해 부르고 있었다. 소중화란 중화보다는 작지만 다른 야만족들보다는 문화적으로 우월하다는 자긍심의 표현이었다. 일본인의 지배를 받는다는 것은 조선인들에게 있어 쉽게 받아들이기 힘든 현실이었다. 잠재되어 있다가도 6.10만세나 광주학생운동 등 기회만 되면 조선인들의 독립의지가 불길처럼 피어오르곤 했던 이유가 바로 그것이었다. 그러나 단지 사람은 비겁하기에 무시무시한 폭력을 행사하는 일본제국주의 앞에 굽힐 수밖에 없었던 것이었다.


조금 다르게 묘사되고 있지만 드라마에서 친일파들이 오히려 구일본제국의 조선인 징병에 환영의 뜻을 표했던 부분은 매우 옳다. 아니 조선인 민족주의자들조차 그것을 반기고 있었다. 일본이 패망한다면 모르지만, 만일 일본이 승리한다면 - 중일전쟁은 물론 태평양전쟁의 초기전황은 그렇게 오판하기에 충분한 근거가 되었다. 조선내 독립에 대한 의지가 결정적으로 꺾이게 된 계기였다. - 차라리 일본인과 더불어 전쟁에 참여함으로서 조선인의 역할과 가치를 인정받는 것이 낫지 않겠는가? 조선인의 기개를 보여주고 조선인의 권리를 인정받자. 그래서 장준하 선생과 같은 이들도 최남선 등의 선동에 이끌려 일본군에 자원하고 있었다. 


과연 그렇다고 해서 그것이 조선인이 조선인임을 포기한 증거가 될 수 있는가? 인도인들도 영국인의 전쟁에 스스로 자원해서 참전하고 있었다. 인도인 민족주의자들이 인도인들을 영국의 전장으로 내보내고 있었다. 인도인의 권리를 인정받기 위해서였다. 1차세계대전 당시는 배신당했지만 2차세계대전이 끝나고 나서는 영국도 힘이 빠져 마침내 인도의 독립을 인정해 줄 수밖에 없었다. 


그것밖에는 다른 방법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여전히 일본제국주의는 강하고, 그로부터 조선인이 스스로 독립을 얻어낼 수 있는 가능성은 작아만지고 있었다. 상해임시정부도 장개석 정부를 쫓아 일본군에게 쫓겨 충칭으로 옮겨가야만 했었다. 말이 의거지 과연 아랍의 누군가가 미군이나 서방의 장교들이 모인 연회장에 폭탄을 떨어뜨렸다면 우리는 그것을 무엇이라 평가했을까? 바스크 독립주의자나 북아일랜드를 해방시키고자 하는 아일랜드인이 스페인이나 영국의 군인들이 모인 자리에 폭탄을 터뜨렸다. 그나마 그것이 중일전쟁 도중이었고 중국 내에서 중국과의 전쟁에서 승리한 것을 자축하기 위해 일본의 장교들이 모인 자리였기에 장개석의 인정을 받았다. 열강의 일원으로서 장개석의 지지가 조선이 독립하는 계기가 되어 주었다. 그러나 그런 만일을 기대하기에는 당시 식민지 조선의 현실이 너무나 열악했다. 그것을 민족을 버렸다 매도할 수 있겠는가?


일제강점기 일제에 저항하지 않은 모두는 친일파다. 실제 나라를 팔고 민족을 팔아 영화를 누린 이들이 스스로를 변명하며 하는 말이다. 모두가 같지 않다. 친일파로 분류된 이들 가운데도 태평양전쟁의 전범이기는 할지언정 민족을 팔아먹은 배신자라고는 말할 수 없는 이들이 적지 않다. 그들은 단지 어리석었을 뿐이다. 아니 그들의 현실이 그리 각박하고 가혹했던 때문이다. 목숨을 걸고 싸우는 것도 희망이 있기 때문이다. 양백(김명곤 분)이나 동진(박성웅 분)이 봉기에 뜻을 둘 수 있었던 것도 일본의 패망을 예견했기 때문이 아니던가.


바위는 죽은 것이다. 달걀은 살아있다. 닭은 달걀을 낳는다. 바위는 가만 있어도 세월에 의해 깎이고 부서진다. 닭이 처음 세상에 나왓을 때 어떤 곳은 커다란 바위산이었겠지만, 그러나 닭이 알을 낳고 병아리가 자라 닭이 되어가는 사이 바위는 깎이고 부서져 언덕이 되고 평지가 되었다. 존엄이란 존재다. 곧 삶이다. 인간이 존엄하고자 하는 것은 그것이 바로 인간이기 때문이다. 과연 탐욕에 대한 의지가 그와 같은 인간이고자 하는 의지보다 더 강한가? 의지가 남아있는 한 - 다시 말해 인간이 인간으로 있는 한 결코 그것은 끝이 아닌 것이다.


양백이 죽으면 어떤가? 동진이 죽으면 또 어떤가? 무엇이 옳은가를 아는 아이가 있다. 무엇이 멋진가를 볼 줄 아는 아이가 있다. 그것이 이성이다. 인간의 양심이다. 현실에서도 백범이 죽임을 당했다면 또다른 백범이 그 자리를 대신했을 것이다. 몽양이 죽임을 당했어도 몽양이 아닌 누군가가 그 자리를 대신해 맡았을 것이다. 일본이 조선인 모두를 죽이지 못하는 한. 최소한 조선인의 양심과 의지를 모두 꺾어버리지 못하는 한. 그리고 단 한 사람만 있어도 인간의 존엄은 깨어난다. 탐욕과 집착은 스스로를 부끄럽게 만들 뿐이지만 존엄은 스스로를 존귀하게 만든다. 


죽어가면서도 담사리(전노민 분)는 웃을 수 있지만 그것을 지켜보는 기무라 슌지(박기웅 분)는 웃지 못하는 이유다. 그나마 기무라 슌지는 부끄러움을 안다. 우리에게는 다행이다. 당시 일본인들은 부끄러움을 몰랐다. 그래서 끝내 패망하고 말았다. 죽은 바위였던 것이다. 무엇도 생산해내지 못하는, 누구도 설득하지 못하는 죽은 바위에 불과했던 것이다. 서구제국으로부터 아시아를 해방시킨다고 하는 명분은 많은 아시아의 민족지도자들을 현혹시켰지만 이내 일본인들이 보여준 모습에 바로 고개를 돌려버리고 만 것이 그래서였다. 그것이 일본의 한계였다.


각시탈이 죽으니 새로운 각시탈이 나타난다. 이강산(신현준 분)이 죽으니 그의 동생 이강토(주원 분)가 각시탈이 되었다. 이강토가 죽으면 각시탈은 사라지게 될까? 드라마의 마지막을 문득 상상해 보게 된다. 이강토가 죽고 누군가는 살아남는다. 그리고 각시탈은 여전히 죽지 않고 살아있다. 이강토가 죽는 엔딩일 경우다. 설사 비극이더라도 그것은 비극이 아니다. 의지는 살아있다.


각시탈이 마침내 마지막 싸움을 위해 나선다. 형의 유지를 잇기 위한 싸움이다. 아버지의 한을 갚기 위한 싸움이다. 그리고 자신의 의지를 지키기 위한 싸움이기도 하다. 그는 죽을까? 군자는 죽지 않고 영원히 산다. 영웅도 죽지 않고 영원히 산다. 그래서 영웅이다. 죽은 이들은 여전히 살아 신이 된다. 남자는 나아가 싸우고 여자는 남는다. 전형적인 영웅물의 구도다. 그래서 달걀은 바위를 깨뜨린다. 아이가 남자의 성을 잇는 이유일 것이다. 달걀이었다는 증거다. 


자꾸 안좋은 결말을 생각하게 된다. 그래봐야 10년 남짓. 하지만 그 10년 남짓을 버티지 못하고 끝내 한을 품은 채 세상을 떠난 이들이 얼마나 되던가. 그렇다고 그들을 불행했다 말하기에는 우리들 자신이 그들을 기억하고 있다. 그들을 기억하는 한 그들은 영원히 죽은 것이 아니다. 아이가 태어나 자란다. 그 아이가 다시 아이를 낳아 기른다. 역사는 흐른다. 기억도 흐른다. 아마 그 기억의 어느 지점일 것이다. 기무라 슌지를 본다. 그는 무엇을 말하려는가. 무겁다. 한 주가 너무 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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