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리 봐도 기무라 슌지(박기웅 분)에게는 어떤 반전이 숨어있는 듯 보인다. 분명 그는 일본인이다. 일본인을 부모로 두고 일본에서 태어나서 지금껏 일본인으로서 자라왔다. 일본인의 이름을 가지고 일본인의 교육을 받았으며 지금도 일본인이로서 충실한 삶을 살아가고 있다. 그러나 한 편으로 그의 삶의 많은 부분은 바로 조선에 닿아 있다.
죽은 이해석(최대훈 분)은 이강토(주원 분)와 함께 그의 오랜 친구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그저 심통이었을 것이다. 애꿎은 화풀이였다. 어쩌면 응석이었는지도 모른다. 화가 났다. 불만이 차올랐다. 어째서 저들은 조선인인가? 이강토며 오목단(진세연 분)이며 어째서 그들은 하나같이 조선인이었던 것일까? 하다못해 자신에게 협력하던 계순(서윤아 분)조차 조선인이 되어 자신을 속이려 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해석도 조선인이었다.
그러나 사람이 죽고 사는 문제를 과연 누가 알겠는가? 그것이 하나의 계기가 되어주었다. 오랜 친구라 믿었던 이로부터 받은 모욕이 그의 나약한 자존심에 방아쇠를 당겨주었다. 평소 호감을 가지고 있던 여인 타샤(지서윤 분)로부터의 경멸도 남자로서의 그의 마지막 자존심에 불을 지폈을 것이다. 그래서 죽었다. 조선인으로서. 조선의 지식인으로서. 그러나 여전히 나약하고 비겁한 한 남자로서. 그에게 주었던 모욕만이 기무라 슌지의 뇌리에 깊이 남아 있다. 사과할 틈조차 없이, 용서를 구할 기회조차 주지 않은 채, 그는 그렇게 세상을 등져 버렸다.
각시탈에 의해 형 기무라 켄지가 죽었다. 복수를 다짐했다. 그리고 마침내 각시탈의 정체를 알아낼 수 있었다. 자신의 가장 친한 친구인 이강토가 바로 각시탈이었다. 이강토에 대한 우정과, 그리고 형을 죽인 원수에 대한 복수, 그러나 바로 그 이강토의 어머니를 죽인 것이 자신의 형 기무라 켄지였다. 악연이다. 복수를 위해 끝내 이강토를 적대시하게 되었지만 복수가 끝나고 나면 과연 이강토와의 오랜 기억은 어디로 가게 되는 것일까? 자신의 손에 잡혀 피투성이가 된 채로도 이강토는 그나마 자신의 손으로 기무라 슌지를 죽이지 않아도 되어 다행이었다 말하고 있었다. 분노한 눈으로 그는 우정을 말하고 있었다.
사람의 의식에는 관성이라는 것이 있다. 당연히 가속도, 반작용도 있다. 하기는 관성이 지나쳐 가속이 된다. 물리법칙과는 다르다. 고집하게 된다. 자신은 틀리지 않았다. 자신은 잘못하지 않았다. 옳았다. 바른 선택이었다. 그것을 확인하려 한다. 확신시키려 한다. 그래서 오히려 더 과격하게 고집을 세우고 집요하게 집착한다. 그것이 거짓임을 알기에 더욱 지독스럽게 그것을 감추고 가리려 든다. 기무라 슌지가 매번 다짐을 일깨우듯 굳기 이를 앙다무는 모습을 보이는 것은 어쩌면 그래서일 것이다.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스스로 견딜 수 없다.
그러고 보면 만화 <각시탈>과 더불어 드라마의 원작을 이루고 있는 같은 작가의 또다른 만화 <쇠퉁소>의 경우 처음 가면을 쓰고 나타나 쇠퉁소를 휘두르며 일본제국주의에 항거하던 '쇠퉁소'의 정체는 다름아닌 주인공 이강토의 오랜 친구이기도 한 경찰고관의 아들이었다. 정작 조선인인 이강토는 현실에 영합하여 일본경찰의 앞잡이 노릇을 하고 있는데, 다름아닌 일본인 경찰고관의 아들이 조선과 조선인을 위해 가면까지 쓰고 항일투쟁에 나서고 있었던 것이다. 그 지독스런 역설에서 출발한 만화는 전작인 <각시탈>보다 몇 배는 더 암울하다. 비록 순서가 뒤바뀌기는 했지만 기무라 슌지의 복잡한 내면과 어떤 연관이 있지 않을까?
악순환일 것이다. 일본인 경찰 기무라 켄지가 조선인인 이강토의 어머니를 총으로 쏴 죽이고 말았다. 그래서 복수를 하고자 이강토가 그 기무라 켄지를 죽였다. 기무라 켄지의 동생인 기무라 슌지는 다시 그 복수를 위해 가장 친한 친구인 이강토를 잡으려 한다. 아니 이미 잡았다. 어머니를 죽인 원수와, 형과 아들을 죽인 원수, 바로 한국과 일본의 현실을 비유하듯 보여주고 있을 것이다. 가장 가까이에 있으면서도 가장 멀리 있을 수밖에 없는 두 나라의 현실이다.
이를테면 지금도 한국과 한국인을 불편하게 여기는 많은 일본인들이 한국인들의 맹목적이다시피 한 일본인에 대한 적대적 감정을 그 이유로 들고 있는 것과 같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결국 거슬러올라가면 그 이유는 다름아닌 일본제국주의가 대한제국을 강제로 합병하려 한데서부터 시작되고 있는 것이다. 아버지가 일본인에 의해 죽고, 어머니마저 일본인에 의해 목숨을 잃었는데, 자식이 되어서 가만히 있어야 하겠는가? 기무라 타로(천호진 분) 역시 죽은 아들의 복수를 하려 하고 있다.
여전히 이강토를 친구라 여기고 심지어 연민하고 있으면서도 일본인이기를 고집하는 기무라 슌지를 보라. 애써 복수심을 일깨우며 각시탈에 대한 증오를 곱씹는다. 이강토에 대한 증오를 애써 다짐한다. 알고 있지만 이해하려 않는다. 이해하고 있지만 공감하려 하지 않는다. 공감하고 있으면서도 그것을 내면화하지 않는다. 철저히 타자이고자 한다. 일본인이고자. 그리고 조선인일 뿐이라며. 하지만 그로 인해 가장 크게 상처입은 것은 과연 누구일까?
과연 해묵은 과거사로부터 비롯된 증오의 되새김인가? 아니면 화해와 용서의 계기가 되어줄 것인가? 70년대 그려진 <각시탈>과 80년대 그려진 <쇠퉁소>는 같은 작가에 의해 그려졌음에도 그 내용이 사뭇 달랐다. 21세기다. 21세기가 시작된지도 벌써 12년이 넘어가고 있다. 언젠가는 새로운 미래를 맞이해야 한다. 그 대안은 무엇인가? 역시 기무라 슌지를 주목할 수밖에 없는 이유인 것이다. 그에게 모든 열쇠가 있다. 여전한 증오의 답습인가? 아니면 새로운 미래에 대한 약속인가? 그는 어떤 일본과 일본인을 보여줄까?
영웅의 고난은 필연이다. 불사조는 자신을 불사른 재 속에서 다시 비상의 날개짓을 한다. 헤라클레스는 자신의 인간인 부분을 모두 불사르고서야 비로소 신이 될 수 있었다. 적에게 잡힌다. 적에게 잡혀 온갖 고통과 수모를 겪는다. 그러나 고귀한 정신은 결코 꺾이는 법이 없고, 순결한 의지는 어떤 경우에도 절대 더럽혀지지 않는다. 비참한 처지로 떨어져 참혹한 고통을 겪고 나서야 그는 영웅으로 거듭날 수 있다. 그렇게 기무라 타로와 기무라 슌지, 고이소(윤진호 분) 등이 지켜보는 가운데 모욕적인 대우를 받으며 고문을 당하는 이강토의 모습은 처참하면서도 비장하기까지 했다. 영웅의 탄생이다. 영웅에 어울리는 의지를 인정받았다. 종로경찰서 지하고문실은 불경과 신성이 교차하는 장소였을 것이다.
고작해야 조선인이다. 아무리 일본제국주의에 협력적이라 할지라도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일본인과 조선인의 구분은 일본제국주의 치하에서도 매우 엄격했다. 그래서 더 조선인 가운데서도 일본제국주의에 협력하려는 이들이 있었는지도 몰랐다. 차라리 조선의 젊은이들을 일본제국주의에 바쳐서라도 일본인과 동등한 지위를 인정받자. 어쩌면 절박함의 표현일지도 모른다. 일본제국주의 아래에서도 사람답게 살고 싶다. 결론은 전범이고 친일파다. 매국노다. 그들은 단지 일본인이 되지 못했을 뿐이다. 그것을 허락받지 못했을 뿐이었다.
영웅이 위기를 겪는다. 그리고 그 속에서 동료들에 의해 다시 구함받고 탈출한다. 그것은 알이다. 영웅을 얽매는 크고 단단한 알의 껍질이다. 그것을 깨려 한다. 그는 영웅으로 거듭난다. 영웅이었지만 그는 이제 비로소 영웅이 된다. 다만 영웅의 일생은 그리 길지 못하다. 불우한 시대일수록 가장 먼저 희생되는 것이 바로 그런 영웅의 존재인 때문이다. 과연 이강토는 해방을 볼 수 있을까? 기무라 슌지는 자신을 옭죄는 구속으로부터 솔직한 자신을 다시금 찾게 될까? 대업을 앞두고 긴장이 고조되는 가운데 영웅이 날아오른다. 각시탈이 날아오른다.
전형적인 영웅물의 공식을 따른다. 공식이란 그만큼 보편적이라는 뜻이다. 일반적이다. 다른 말로 절대적이다. 영웅의 고난에 마음을 조이며 그의 비상을 바란다. 영웅의 구원을 바라며 영웅이 구원되기를 바란다. 그렇게 영웅은 대중에 각인된다. 선지자이며 순교자이며 또한 불멸자로서. 영웅은 죽지 않는다. 죽어서도 죽지 않는다. 그것이 영웅이다. 흥미롭다. 재미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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