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

각시탈 - 오히려 일본인들을 위한 이야기, 그들에게 묻다!

까칠부 2012. 9. 7. 09:52

어쩌면 이 또한 지독한 역설일 것이다. 한국인을 위한 드라마였다. 한국인이 썼고, 한국인이 연출했고, 한국인이 출연했다. 그러나 정작 드라마가 전하는 메시지는 일본인을 향한 것이다. 제작 초기 캐스팅 문제로 곤란을 겪은 데 따른 분발이었던 것일까?

 

하기는 장르에서 말하는 영웅이란 정의를 실천하는 존재일 것이다. 정의란 상식이다. 옳은 것이다. 바른 것이다. 한 마디로 당연한 것이다. 모두다 그것을 옳다고 여기고 바르다고 여기기에 그것은 정의가 되는 것이다. 한국사회에서 정의란 무엇일까? 그리고 드라마 <각시탈>에서 주인공이 추구하는 정의란 과연 무엇일까?

 

바로 그렇기 때문에 장르로서의 영웅물이란 두 가지 정형화된 스타일을 갖는 경우가 많다. 악역이 얼마나 악한가를 부각시키거나, 악역이 보여주고 있는 악 그 자체를 파헤치려 한다. 그에 비하면 영웅의 고민이란 인간적인 매우 사소한 것들에 불과하다. 최소한 이미 영웅이 되어 있다면 그는 더 이상 정의를 가지고 고민하거나 갈등해서는 안된다. 고뇌하는 대표적인 영웅인 배트맨조차 악역을 앞에 두고서는 길고 복잡한 고민따위는 하지 않는다. 악은 응징해야 하고 정의는 지켜져야 한다. 그것이 바로 영웅의 정의다.

 

드라마 <각시탈>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독립투사를 때려잡던 일본의 앞잡이 이강토(주원 분)가 일본제국주의에 맞서는 조선인의 영웅 각시탈이 되었다. 아버지는 대한제국 황제 고종의 마지막 충신이었다. 형 또한 독립운동에 투신했다가 일본경찰에 체포되어 그만 정신을 놓아 버리고 말았다. 그런 이들의 아들이며 동생인 이강토가 일본의 앞잡이가 되어 조선총독부 경무국 경부보의 자리에까지 오르고 있었다. 마침내 정신을 놓아버린 줄 알았던 형 이강산이 이강토가 그토록 잡고 싶어하는 각시탈이었다는 사실이 밝혀지며 갈등은 고조된다. 조선과 조선인을 위해 일본에 맞서려는 혈연과 바로 그 가족을 위해 이강토 자신이 선택한 현실이 그렇게 서로 부딪히며 비극적인 파열음을 내고 만다. 이강토가 형 이강산을 자신의 손으로 죽이고 마는 것이다.

 

어머니가 죽임을 당했다. 그리고 자신의 손으로 직접 형을 죽이고 말았다. 자신이 선택한 현실이 어머니를 죽이고, 바로 그 현실을 위해 자신은 혈육인 형을 죽였다. 태어난 자궁인 모성을 약탈당하고, 자신은 아버지를 죽이고 그 자리를 대신한다. 비상하게 신화적 코드를 갖는다. 형인 이강산은 이강토에게 있어 마치 아버지와도 같은 존재다. 그로부터 이강토는 형인 이강산을 제물로 삼아 각시탈로 다시 태어나게 된다. 각시탈로 태어나려는 순간 기무라 슌지의 총에 맞아 강에 빠지게 된 것은 인간이라면 누구나 갖는 양수에 대한 기억일 것이다.

 

그리고 끝났다. 어른이 되기 전 질풍노도의 시기였을 것이다. 세상이 창조되기 전의 혼돈이 바로 그것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말씀이 있었고 세상은 창조되었다. 아이는 어른이 되었다. 이강토는 각시탈이 되었다. 각시탈이란 얼굴이다. 페르소나다. 역할이며 존재다. 이름이 곧 기호이며 존재일 것이다. 각시탈이 되고자 하는 순간 이강토는 각시탈이 될 수밖에 없다. 각시탈로서 살아갈 수밖에 없다. 그것을 회의하는 것은 자신이 추구해야 하는 정의를 회의하는 것이다. 그는 과연 조선의 자주와 독립이라는 정의를 회의할 수 있는가?

 

그래서 대신해서 기무라 슌지(박기웅 분)가 고뇌한다. 갈등하며 번민한다. 그는 악역이다. 그러나 악인이 아니다. 그래서 기무라 슌지는 더욱 거대한 시대의 악을 설정한다. 착하고 순수하기만 하던, 그래서 모두의 사랑을 받던 일개 소학교 교사가 어떻게 모두가 저주해마지않는 괴물이 되어가는가를 보여준다. 목숨과도 같던 가장 친한 친구를 스스로 죽이려 한다. 그리고 그 친구는 자신을 원망하며 죽이기 위해 찾아온다. 친구의 손에 아버지와 형이 죽었다. 자신의 아버지와 형에게 친구는 아버지와 어머니를 잃었다. 친구의 아내를 죽였다. 자신이 가장 사랑하던 여자였다. 그녀로부터 일본인이라는 이유로 거부와 원망을 들었다. 차라리 친구의 아내로서라도 행복하게 웃는 모습을 뒤늦게 바라게 되었다. 무엇이 잘못되었는가?

 

착해서다. 성실해서다. 순수해서다. 그래서 이강토도 사토 히로시가 될 수밖에 없었다. 어머니를 위해서. 형을 위해서. 가족을 위해서. 그것이 현실이었으니까. 그리고 그렇기 때문에 어머니와 형의 죽음 앞에 그는 조선인 이강토가 되었다. 형을 대신해 각시탈이 되었다. 오목단(진세연 분)의 앞에서는 어릴적 이름 영이로 돌아갈 수 있었다. 양백(김명곤 분)의 앞에서 조선의 많은 아들들 가운데 하나가 될 수 있었다. 그리고 마찬가지 이유로 기무라 슌지는 기무라 타로(천호진 분)의 아들로 돌아갔다. 일본인이 되었고, 일본의 경찰이 되었고, 일본제국주의의 의도와 의지를 실천했다. 그래서 남은 것이 무엇인가?

 

묻고 있는 것이다. 일본인들에게. 그래서 당신들이 얻은 것이 무엇인가고. 전쟁이란 가장 아름다운 것이라며 찬양하던 우에노 히데키(전국환 분)는 허무하게 각시탈의 손에 목숨을 잃었다. 그는 심판받아야 했다. 오히려 일본인 자신들에게 그런 우에노 히데키는 지금 어디에 있는가고. 일본의 젊은이들이 전장으로 나가 죽어가는 그 순간 우에노 히데키는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있는가고. 우에노 히데키 자신에 의해 죽은 콘노 코지(김응수 분) 역시 일본인이었다. 그렇게 같은 일본인마저 죽여가며 이루려 한 끝이 무엇인가?

 

목숨과도 같이 사랑하던 여인을 죽였다. 자신의 일부와도 같던 친구와는 원수가 되었다. 이제는 서로를 용납할 수 없다. 그래도 연인은 되지 못했어도 어릴적 가장 친했던 친구이기도 했었다. 한때 일본은 아시아의 중심이었다. 아시아의 모든 나라들이, 심지어 조선과 중국의 지식인들조차 일본을 믿고 그들에 의지하려 했었다. 그러나 지금 일본의 위치란 어떠한가? 기무라 슌지에게 오목단과 이강토가 둘도 없는 친구였듯 일본에게도 아시아는 그들의 가장 친한 친구가 될 수 있었다. 그 선택을 저버린 것은 일본 자신이었다. 일본을 가장 경계하고 꺼려하는 것이 바로 그들 가장 가까운 이웃나라들일 것이다.

 

스스로 목숨을 끊는 순간에야 기무라 슌지는 비로소 인정할 수 있게 된다. 그동안도 그는 물론 알고 있었다. 그는 바보가 아니다. 어리석은 사람이 아니다. 그러나 인정할 수 없었다. 인정해서는 안되었다. 그리고 함게 끝까지 달려간 결과 후회조차 할 수 없는 최악의 절망만이 그를 맞을 뿐이었다. 그리 오기를 부려가며 안간힘을 다해 지금껏 달려왔건만 그에게 남은 것은 이제 아무것도 없었다. 일본은 자살했다. 자멸했다.

 

우에노 리에가 채홍주(한채아 분)라고 하는 자신의 이름을 되찾는다. 그녀에게서 우에노 리에라고 하는 일본이름을 빼앗은 것은 다름아닌 우에노 히데키 자신이다. 조선인으로 하여금 스스로 조선인임을 끊임없이 자각하도록 한 것이 바로 우에노 히데키와 같은 일본내 강경파들이었다. 심지어 일본인이고자 했던 이들마저 일본인인 그들 앞에 열등감과 적대감을 내재하게 되었다. 이제 우에노 히데키가 죽임을 당하는 순간 우에노 리에는 더 이상 쫓을 권력마저 사라진 채 다시 채홍주로 돌아가고 만다. 원래의 자신으로 돌아간다.

 

역시나 주인공이 고뇌하는 드라마가 아니다 보니 정의에 대한 고뇌 또한 없다. 조선의 자주와 독립이라는 당위 앞에 갈등이나 다툼도 존재할 수 없다. 조선인이라면 모두가 조선의 자주와 독립을 바란다. 일본경찰의 끄나풀 노릇을 하던 계순(서윤아 분)조차 어느새 동진결사대를 모으는데 앞장서고 있다. 담사리의 말처럼 모두가 각시탈이고 담사리다. 모두가 각시탈이고자 하고 담사리이고자 한다. 그래서 모두가 각시탈을 쓰고 각시탈이 되어 나선다. 조선의 독립은 바로 이들로부터 쟁취되었다.

 

물론 사실이 아니다. 역사상 그런 일은 실제 있지도 않았다. 없었다. 하지만 후련하다. 하지만 통쾌하다. 그것은 해방이 되고도 수십년간 우리들 자신을 억누르고 있던 마음의 빚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판타지다. 꿈이다. 간절한 바람이다. 드라마속 영웅이 그 간절함을 이루어준다. 그래서 영웅이다. 그래서 각시탈이다.

 

서툴지만 의미심장한 엔징이었을 것이다. 거칠지만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만큼은 분명하게 전해졌다. 모두가 각시탈이다. 모든 것을 잃은 기무라 슌지는 스스로 이강토의 뒤에서 목숨을 끊고 만다. 기무라 슌지가 걸어온 길. 그리고 각시탈 이강토가 걸어갈 길. 멋지다.

 

기대 이상이다. 원작과는 다르다. 원작을 좋아해서 우려했다. 달라서 실망했던 점도 있다. 그러나 달랐기에 더 만족한 부분도 있다. 주원이라는 배우를 다시 발견했다. 진세연이라는 매력적인 배우도 보았다. 무엇보다 박기웅이 있었다. <각시탈>을 흔한 반일영웅물로 끝나지 않게 한 주역이다. 그를 주목한다. 젊은 배우들이 만들었다. 그것에 주목한다. 무척 소중하다.

 

숨가쁘게 달려온 시간들이었다. 어느샌가 시간이 이렇게나 흐르고 말았다. 아쉬운 만큼 만족도 진하다. 만족하는 만큼 아쉬움도 짙다. 어쩌면 동화와도 같았을 것이다. 꾸미거나 가리지 않은 이야기가 바로 마음으로 전해진다. 이것이 옳다. 이것이 바른 것이다. 당연한 것이다. 당연한 것을 너무나 당연하게.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