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형제를 반대하는 두 가지 가장 큰 이유는 다름아닌 인간의 존엄과 그리고 오판의 가능성이다. 다른 것도 아닌 법이라고 하는 공공의 규범을 통해 한 사람의 생명을 빼앗는다. 더구나 만에 하나라도 그것이 잘못된 근거에 의한 잘못된 판단이었을 때 이미 죽고 없다면 최소한의 보상조차 돌려줄 수 있는 가능성이 완전히 사라져 버린다.
그러나 사형제 존치론자들은 그같은 주장들에 대해 이렇게 반박하고는 한다. 사람같지 않은 짓을 저질렀는데 어찌 사람이라 할 수 있겠는가? 그들에게도 존엄과 인권은 있는가? 더구나 명명백백히 아주 작은 의혹조차 없이 사실로 확정된 범죄에 대해서만 사형을 집행하면 된다. 단 한 점의 오류조차 없는 판결에 대해서만 사형을 집행한다면 오심으로 인한 피해는 줄일 수 있다. 그나마 아예 없을 것이라 말하지 않는 점이 그들의 정의와 통하는 부분일 것이다.
드라마는 바로 이러한 사형제에 대한 가장 중요한 두 가지 논의 가운데 추상적이고 난해하기까지 한 인간의 존엄에 대한 부분보다는 보다 직접적이고 현실적인 오심의 가능성과 그 돌이킬 수 없는 비극적 결과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고자 의도하여 만들어진 듯하다. 과연 인간의 인지와 인식에 있어, 인간의 판단이라는 영역에 있어 명백한 객관적이고 절대적인 사실이란 존재할 수 있는가. 단지 부분지문검색의 기술이 미비했다는 이유만으로 90년대에는 정작 단서로부터 진범의 지문을 찾아내는데 실패하고 있었다. 미숙한 기술이 찾아낼 수 있었던 것은 진범들이 의도적으로 남긴 엉뚱한 무고한 희생자의 지문이었다.
어쩔 수 없이 인간의 인지란 지금 당장 가능한 영역 이상은 파악할 수 없다. 인지가 있어야 인식이 있다. 인식이 판단을 유도한다. 잘못된 정보는 당연히 잘못된 결론을 이끌어낸다. 더구나 판단이란 전적으로 인간 자신에 속한 행위다. 어떤 선입견이나 다른 의도가 없다고 누가 장담할 수 있겠는가? 당시 강춘구와 피해자 고민정이 다투는 장면을 목격했다는 동급생 이선규의 증언이 담당경찰의 선입견에 의해 무고하게 살인죄를 뒤집어쓴 희생자 이준성과 고민정이 싸우는 장면을 목격했다는 내용으로 터무니없이 바뀌고 말았다. 주어진 정보들이 경찰로 하여금 어떤 특정한 결론을 내리도록 유도하고 있고, 그같은 관성이 어떤 특정한 결론에 대해 다른 가능성을 제기하는 증거와 증언마저 묵살하거나 바꾸도록 만들고 있었던 것이다. 거기에는 뛰어난 법의학자였던 조정현(이경영 분)마저 예외가 아니었다.
그것은 지금도 마찬가지다. 과연 지금의 과학기술은 완벽한가. 먼지 한 톨 만큼의 오류조차 없을 만큼 완전함을 확신하는가? 단지 지금의 인지다. 지금 수준의 인지다. 인간의 눈은 적외선도 자외선도 보지 못한다. 20헤르츠 이하와 2만 헤르츠 이상의 주파수도 듣지 못한다. 빛이 없으면 역시 보지 못하고, 빛에 의해 색은 왜곡된다. 더구나 그것을 다루는 것이 사람이다. 그같은 증거와 증언들을 취합해 사실을 재구성하는 주체가 바로 사람인 것이다. 그런데도 완벽을 말한다. 명백함을 말한다. 확실한 것을 말한다. 당시에는 그것이 너무나도 확실해 보였기에 유죄라 판결했고 사형을 선고했다. 그리고 마침내 사형까지 집행했다.
진범이 잡혔다. 과거의 잘못을 바로잡으려는 조정현의 노력에 의해. 그의 의도에 공감한 특수수사팀 멤버들의 활약에 의해. 그보다는 어떻게 해서든 자식의 억울함을 풀어주고자 했던 처참한 부정이 있었다. 15년을 억울하게 누명을 쓰고 사형까지 선고받은 아들을 가슴에 품고 살았던 아버지의 잔인한 마지막 선택이 있었다. 그나마 그런 행운조차 누려보지 못하고 여전히 죄인으로 사형수들이 묻히는 외딴 묘역에 찾아오는 이 없이 쓸쓸히 묻혀 있는 이들이 허다하다. 그 가운데 과연 억울한 이가 단 한 사람도 없다고 장담할 수 있겠는가? 더구나 그런 행운이 있었음에도 진범이 잡힌 순간 이준성은 이미 사형이 집행된 뒤였다. 진범이 잡혔다고 해서 이미 죽은 이준성을 다시 살아돌아오도록 할 수 있겠는가?
실제 해외에서도 잊을 만하면 한 번 씩 들려오는 내용이기도 하다. 과거에는 불가능했던 현대적인 과학수사의 기법으로 오래전 묻혔던 사건의 진실을 밝혀냈다. 그나마 징역형을 살고 있었다면 나중에라도 풀려나 자유를 되찾을 수 있었고, 그조차 이미 죽고 없어진 뒤에는 그저 죽은 이의 무덤에 애닲은 안타까움만을 전할 뿐이다. 조금만 더 주의를 기울였다면. 조금만 더 피의자의 말을 진지하게 들어주려 노력했다면. 조금만 더 자신의 확신에 대해 의심을 품고 냉정하게 객관적으로 판단하려 자신을 엄격히 다독였다면. 그런데도 이제는 아예 피의자의 얼굴까지 대중 앞에 노출시켜놓고 여론재판을 하려는 시도까지 나타나고 있다. 여론이 움직여 이미 피의자를 범죄자로 단정지었다. 재판에 여론이 영향을 끼치지 않으리라 누가 장담할 수 있는가? 그러나 너무 확신에 차 있다.
마지막 장면에서 차라리 먹먹함마저 느끼고 있었다. 아니 더 나를 슬프게 만든 것은 어느새 살인이라는 죄에 대해 무뎌진 진범 배지연의 존재였다. 자신들이 조작해 만든 증거에 휘둘려 법은 엉뚱한 사람을 범죄자로 만들고 말았다. 엉뚱한 사람을 범죄자로 만들어 사형을 집행하고 자신들은 여전히 자유로운 채 남을 수 있었다. 또 한 사람이 죽었다. 범죄란 들키지만 않으면 죄가 되지 않는다. 죄에 대한 댓가를 치르지 못한 사람과 짓지도 않은 죄의 댓가로 돌이킬 수 없는 길을 가야 했던 이. 그가 마지막 느꼈던 공포와 절망과 그리고 또 한 사람의 자신도 알지 못하는 도덕적 타락이 있었다. 법은 어째서 존재하는가.
단지 고기를 구워먹고 싶다고 했었다. 아버지와 그리고 아직 한 번도 보지 못한 어린 조카와. 그 소박한 꿈이 그렇게 사라져 버렸다. 마지막 죽음을 앞에 두고 떨고 있는 그의 어디에도 그같은 소박한 꿈의 자락은 남아있지 않았을 것이다. 살고자 하는 마지막 욕구조차 법은 냉정하게 짓밟아 끊어버리고 말았다. 무고해서일까? 다시 법은 무엇을 위해 존재하는가?
아흔아홉사람의 범죄자를 잡기보다는 한 사람의 무고한 이를 없게 만들라. 너무나 당연한 말이지만. 범죄사실이 입증되기 전까지 피의자는 무죄다. 하지만 그것이 쉽지 않다. 사람들은 너무 정의롭고, 그래서 너무나 악을 죄를 미워한다. 정의와 맹목은 때로 같은 뜻이기 쉬운 말이다. 사람을 죽여서까지 정의를 관철해야겠는가? 묻고 있는 것이다. 진정 그러고자 하는가?
어쩌면 케이블이기에 가능한 소재이고 주제였을 것이다. 너무 무겁다. 그리고 민감하다. 공중파에서는 섣부르게 다룰 수 없는 내용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특별하다. 그래서 소중하다. 내내 무겁게 보았다. 생각하고 고민했다. 결론을 강요하지 않는 냉정함과 담담함이 무척 고맙다. 아마 끝나지 않을 고민일 것이다. 가슴이 답답하다. 훌륭하다.
http://www.stardailynews.co.kr/news/articleView.html?idxno=168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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