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

골든타임 - 깊고 단 한여름밤의 꿈, 조금은 어른이 되어 있다.

까칠부 2012. 9. 26. 09:09

여름이 되어 방학을 맞은 아이들이 여행을 떠난다. 친척을 찾아 시골로, 혹은 바다 건너 먼 다른 나라로, 조금 더 나가면 현실을 벗어난 미지의 판타지를 경험하게 된다. 그리고 여름이 끝났을 때 엔딩크레딧과 함께 이런 대사가 흘러나온다.

 

"긴 여름이 끝났을 때 그들은 조금 더 어른이 되어 있었다."

 

여행은 인간을 성장케 한다. 정확하는 여행을 통해 겪는 많은 미지의 사건들이 세상을 보다 넓게 깊게 이해할 수 있도록 만들어준다. 이제까지 닫혀 있던 세계의 문을 열고 벽을 부수고 더 넓고 다양한 세계를 경험하며 껍질을 깨는 계기를 만나게 된다. 기껏 대학에서 배운 지식을 바탕으로 미국드라마 자막이나 만들며 소일하던 이민우(이선균 분)가 어느새 의사가 되어 4년 뒤를 기약하며 떠나는 그 모습처럼.

 

어른이 되어 있었다. 이민우도 강재인(황정음 분)도. 마치 그들을 위해 준비된 무대와도 같았다. 어느 판타지영화속 던전과도 같았을 것이다. 꿈인지도 몰랐다. 환상인지도 몰랐다. 지나고 나면 사라지는 아련한 기억처럼 그렇게 이민우는 모두로부터 멀어진다. 엔딩도 그렇게 몽환적이다. 환상처럼. 꿈결처럼. 그렇게 모두는 행복해진다. 오랜 동화의 마지막 지문처럼.

 

하기는 어떤 의미에서 그곳은 이민우가 이제껏 경험해보지 못한 별세계였을 것이다. 이제껏 컴퓨터 모니터 너머의 미국드라마를 통해 보던 세계가 그곳에서 현실로 적나라하게 펼쳐보여진다. 더 열악하고 더 치열하고 그러면서 더 한심스런 모습들로. 이것이 이민우 자신이 딛고 있는 세계다. 이민우 자신이 의사가 되고자 했을 때 살아가야 할 세계일 것이다. 모험에 이끌리는 아이처럼 이민우는 자신에게 주어진 고난과 역경에 충실이 이끌리고 만다. 고통들이, 그리고 성취감과 사명이 그를 살아있게 만든다. 그는 비로소 의사가 되어 살아 있다.

 

자기를 발견한다. 타인을 통해서, 주위와의 관계를 통해서, 주위의 모든 것들과의 상호작용을 통해서, 스스로 존재를 찾아간다. 나는 누구인가? 고통이 현실을 자각케 한다. 좌절과 분노가 그를 현실에 머물게 한다. 간절한 바람과 희망이 그로 하여금 현실을 부여잡도록 만든다. 그를 위한 커다란 만화경이었을 것이다. 거울에 부딪혀 만들어지는 수많은 군상들이 기기묘묘한 색을 칠하며 그를 에워싼다. 물론 그 안에서 무엇을 찾고 무엇을 얻는가는 순전히 이민우 자신의 선택이다. 그래서 그는 주인공이다.

 

아쉽다면 강재인의 선택이다. 그녀는 과연 그동안의 긴 꿈을 통해 무엇을 얻었는가? 여름 결코 짧지 않은 그 경험들을 통해 무엇을 찾았으며 무엇을 선택하려 하는가? 마지막이 모호하게 처리되어 있다. 그녀는 의사가 되고자 할까? 뒤늦게 의사가 되고자 하는 열정을 이민우처럼 가지게 되었을까? 그도 아니면 할아버지를 대신해 앉았던 병원재단 이사장으로서의 행정업무에 대한 새로운 가능성을 발견하게 되었을까? 역시 다음을 기약한다. 다음에 다시 조금 더 성장한 그녀를 볼 수 있으리라.

 

시청자 자신에게도 그것은 꿈이었다. 어째서 흔한 사랑이야기조차 없이 무미건조하기까지 한 이 드라마가 그토록 시청자들로부터 깊은 애정과 관심의 대상이 되었겠는가. 이제까지 없었던 드라마였다. 마치 전쟁터와도 같은 치열함과 정돈되지 않은 절박한 생과 사의 경계가 TV화면 너머로 적나라하게 펼쳐보져이고 있었다. 그곳은 전장이었다. 주인공들의 생과 사의 대결에 숨을 멈춘 채 손에 땀을 쥐고 마는 액션영화처럼 죽음조차 아무렇지 않은 그 치열하고 절박한 현장이 사람들의 시선을 잡아끌고 만다. 그런 세계도 있다. 그런 현실도 있다. 이런 드라마도 있다. 이민우는 성장했고 그렇다면 시청자들에게는 무엇이 남았을까?

 

거의 끝무렵 과장들이 요트여행을 떠났다가 사고로 돌아오는 장면은 드라마를 위한 의도된 장치였을 것이다. 그래도 해운대 세중병원에서 최고의 실력을 자랑하기에 과장의 자리에까지 올랐을 것이다. 그런 최고의 의사들이 모여서 환자를 진단하고 치료하는데 전혀 정리가 되어 있지 않고 어수선하기만 하다. 환자를 치료하는 실력만 뛰어나서는 안된다. 어떤 응급상황에서든 빠르게 적잘한 판단을 내리고 조치를 취할 수 있어야 한다. 그것을 중증외상센터에서 한다. 황세헌(이기영 분) 정형외과장의 외상외과에 대한 조금은 달라진 태도는 그것을 말해준다. 직접 겪고 보니 어째서 중증외상센터가 필요하고 전문인력이 필요한가를 알겠다.

 

그러나 여전히 과제는 남아 있다. 중증외상환자는 돈이 되지 않는다. 의사로서의 역량과 풍부한 임상경험, 무엇보다 환자를 살리기 위한 무제한적인 치료가 행해져야 한다. 그러나 그 가운데 상당부분은 다시 돌려받기 힘들다. 병원이 자원봉사를 하는 곳도 아니고, 병원들로 하여금 중증외상환자를 치료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는 그만안 동기가 주어지지 않으면 안된다. 처음 해운대세중병원이 중증외상센터를 설립하기로 계획을 세웠던 이유가 무엇인가?

 

탁상행정과 현실을 무시한 계획과 지원이 현장을 더욱 열악한 궁지로 내몰고 있다. 예산을 아낀다고 기껏 지원하기로 한 헬리콥터의 크기가 작아지고, 그 작아진 크기로 인해 지원의 대상이 제한되고, 결정권자의 주관적 입장에 의해 지원대상이 결정되기도 한다. 비록 MOU를 성사시키기는 했지만 소방청과 해운대세중병원과의 협상과정에서 보여진 모습들은 그 근본원인에 대해 생각케 한다. 사람의 목숨이라는 것이 한 번 뜨는데 500만원이 든다는 헬리콥터의 운용비용만도 못하다는 것인가. 사람의 목숨마저 어느새 돈으로 계량한다.

 

끝으로 최인혁의 꿈을 본다. 그동안은 무기력했다. 아무런 의욕도 희망도 없이 그저 다가오는 현실을 따라가기만 급급했다. 기대가 무산되었다는 말에도 어차피 희망이 없으니 기대도 없다. 기대가 없으면 실망도 없다. 실망조차 없는 절망 속에 지쳐 자기 안에 갇혀 살아가고 있었다. 그런데 그가 영안실 2층 한쪽 구석에 작은 방을 마련하고서 그것으로 기쁘게 웃고 있다. 애써 떠나보내려던 신은아(송선미 분)마저 기꺼이 받아들이고 있다.

 

이민우다. 이민우는 그의 제자다. 아들이가. 그의 뜻을 이어받을 사람이다. 중증외상센터에 대한 그의 열정과 의지를 물려받을 그의 후계자다. 또다른 자신이다. 비로소 희망이 생긴다. 비로소 기대가 생긴다. 기대가 현재를 견디게 만든다. 자신은 이렇게 한심해도 이민우라면 뭔가 달라질 것이다. 그는 충분한 재능과 열정과 무엇보다 올곧은 마음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사람은 아이를 가지기 위해 그토록 필사적이 되기도 하는 모양이다. 이민우만 있다면 단지 그는 현재만 버티고 견디면 된다. 미래가 있다는 건 그렇게 사람을 강하게 만든다.

 

신은아는 운이 좋다. 진심으로 그녀를 사랑해주는 사람을 만났다. 그리고 그 사랑보다 진정으로 사랑할 수 있는 일을 다시 만났다. 그런 약혼자가 있었기에 그녀는 기꺼이 그녀의 일을 선택할 수 있었다. 결혼의 안정이나 사랑의 감정보다 일을 하는 순간의 만족과 충실함을 선택할 수 있었다. 올곧게 그녀일 수 있도록 지켜봐 주었다. 오로지 그녀가 그녀 자신으로서 있을 수 있도록. 마지막까지 남자는 신은아를 신은아 자신으로서 사랑해주고 있었다. 비록 자신과 결혼은 하지 않더라도 그렇게 아름다운 신은아 자신을 사랑해주고 지켜주려 하고 있었다.

 

마지막 장면이 인상깊다. 다시 일상을 찾아가는 환자들과 그런 환자들의 모습에 이어진 이민우의 웃는 모습이. 의사의 보람이란 무엇인가? 의사의 진정한 기쁨이란 어디에 있는가? 환자와 의사는 무엇으로 이어지는가? 병원과 의사가 존재하는 이유다. 지금껏 드라마가 전해주고자 한 핵심이었을 것이다. 무엇이 의사를 의사이게 하고 병원을 병원이게 하는가.

 

긴 꿈이었다. 그리고 깊고 단 꿈이었다. 이제 꿈에서 깨었다. 아직도 비몽사몽이다. 어디선가는 최인혁이 다급하게 소리를 지르고 있을 것 같고, 그 한쪽 구석에서 이민우가 징징거리고 있을 것 같다. 강재인은 쿨하고 당당하다. 과장들은 또 어디서 어떤 한심한 이야기들을 나누고 있을까? 하지만 그들의 환자를 생각하는 마음도 진심이었을 것이다.

 

아마 꿈결이었을 것이다. 이민우가 그리 약속한 듯하다. 4년 뒤에 다시 만나겠다. 4년은 너무 길다. 드라마에서 4년은 1초만에 스쳐지나가는 시간이기도 하다. 드라마에는 드라마에 어울리는 시간이 있다. 아직 못다한 이야기가 있다. 못 들은 이야기가 있다. 간절하다. 아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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