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의 소설가 루이자 메이 올컷의 유명한 소설 <작은 아씨들>에서 작가를 투영한 듯 둘째 조는 소설가를 지망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녀의 소설들은 처음 하나같이 출판사로부터 거절당하고 있었다. 진심이 느껴지지 않는다. 그러다가 어느날 자신과 자매들, 가족들의 이야기를 소설로 써서 가지고 가자 바로 출판계약을 맺고 일약 소설가로 데뷔하게 된다.
벌써 90년대다. 당시 장안의 화제가 되었던 최고의 인기드라마 <아들과 딸>에서도 이란성 쌍동이 후남과 귀남 가운데 누나인 후남은 작가를 지망하는 것으로 설정되어 있었다. 그러나 역시 매번 작품을 써가도 거절당하자 이번에는 자신의 인생역정을 작품으로 녹여내 담당자를 찾아간다. 그녀가 일약 스타작가로 데뷔하게 되는 계기였다.
소설이든 시나리오든 어떤 작품을 쓰려 할 때 선배작가들이 하나같이 해주는 충고가 있다. 네가 할 수 있는, 네가 진정 하고 싶은 이야기를 쓰라. 남의 이야기를 쓰려 하지 말고 자기 이야기를 쓰라. 단편부터. 소소한 이야기부터. 설사 나중에는 전혀 상관없는 시간과 공간, 전혀 알 수 없는 미지의 세계의 이야기를 쓰더라도 그것은 결국 자신의 이야기여야 한다. 그래서 원래 작가의 작품을 이해하려 할 때 작가가 살아온 역정이나 놓인 현실에 중요하게 관여하곤 한다. 작가는 도대체 어떤 배경에서 무슨 생각으로 무엇을 전하고자 지금의 작품을 썼는가?
그리고 그같은 작가의 진심에서 작가 자신의 이야기를 통해 대중은 그로부터 자신의 이야기를 찾아내게 된다. 아주 같지는 않다. 그러나 비슷하다. 드라마 <아들과 딸>에서는 아들에게 차별받던 딸들의 설움이 있었고, 얼마전 종영한 <넝쿨째 굴러온 당신>에서도 시월드라고 하는 많은 며느리 앞에 놓인 만만치 않은 현실이 있었다. 현재 방영중인 드라마 <내 딸 서영이>에서는 이 땅의 수많은 작아진 아버지들의 모습이 보인다. 다만 그것이 얼마나 대중 자신들로부터 깊은 공감을 이끌어낼 수 있는가에 드라마의 성패가 달렸을 것이다.
작가와 대중이 서로 만나게 되는 지점일 것이다. 그래서 나오는 것이 바로 기호라는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달을 보고 방아찧는 토끼를 찾아내곤 한다. 어떤 사람들은 같은 달을 보면서도 전혀 엉뚱한 미인의 모습을 보곤 한다. 다만 그럼에도 결국 달이 있고, 달 표면에 사람들로 하여금 연상하게 만드는 얼룩이 있기에 그같은 서로 다른 입장이 존재할 수 있는 것이다. 어떻게 사람들로 하여금 작품에 집중하고 공감과 감동을 찾아낼 수 있도록 하는가.
때로 전혀 엉뚱하게 모두가 형편없는 작품이라고 말하는데 자기에게만 명작인 경우도 있다. 그러나 대중예술이라면 더 많은 사람들이 공감하고 감동받을 수 있도록 해야 한다. 그것이 기술이다. 프로라면 항상은 아니더라도 의도해서 사람들이 관심을 가지고 볼 수 있도록 만들어야 한다. 물론 그런 기술보다 더 중요한 것이 비슷한 상황을 겪어본 사람이라면 모를 수 있는, 자연스럽게 공감하고 감동할 수밖에 없는 진심, 진정성일 것이다. 아무리 형편없는 작품이라도 그 안에서 자신이 공감할 수 있는 진심과 진정을 느낄 수 있다면 그것은 자기에게 무엇과도 비교할 수 있는 최고의 명작이다.
유정인(이영아 분)이 극중 영화감독 정재준이 만드는 영화에 자신을 이입한 이유였다. 전혀 다른 동기였다. 정재준이 뱀파이어를 주인공으로 설정한 것은 인간으로 살고자 해도 전혀 그럴 수 없는 뱀파이어의 처지를 여전히 3류감독의 딱지를 떼지 못한 자신의 한심한 처지에 빗대고자 한 것이었다. 소매치기 출신의 여자캐릭터 역시 에로배우였다는 이유로 배우로서 전혀 인정받지 못하고 있는 연인 박선정의 처지를 빗댄 것이었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그같은 정재준의 의도가 실제의 민태연(연정훈 분)과 유정인의 처지와 절묘하게 맞아떨어지고 있다.
의도한 것이 아니었다. 그대로 자신들의 이야기를 솔직하게 털어놓기에는 아무래도 거리낌이 있으니까 굳이 뱀파이어라는 상징과 기호를 통해 자신들의 이야기를 전하고자 한 것이었다. 그런데 그로부터 누군가 실제 자신의 이야기를 발견하고 그 안에 자신을 이입하려 하고 있었다. 매순간 자신을 잃어가며 영화속 상황속에 놓인 자신을 발견하고 있었다. 그것은 유정인의 무의식이기도 했다. 반쯤은 인정하고 반쯤은 부정하던 민태연에 대한 자신의 진심이었다. 다만 유정인의 그같은 감정을 민태연은 아직 절실히 느끼지 못한다. 그래서 더욱 유아인의 마음에 남은 혼란과 갈등, 그리고 좌절감이 영화속 상황에 자신을 몰입하도록 했을 것이다. 마치 소금이 부족하면 짠 것을 찾듯 지금 그녀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 무언가 몸이 말해주듯.
이 또한 작가의 지극히 개인적인 의도이며 시도가 아니었을까? 작품이란 어떻게 쓰여지며 어떻게 대중에 이해되는가. 그리고 그것은 다시 어떻게 그 과정에서 왜곡되고 마는가? 영화는 그냥 만들어지지 않는다. 그래서 독립영화라는 것이 있다. 자본으로부터도 미디어로부터도 독립한 채 순수하게 영화적 아름다움과 완성도만을 쫓는다. 그러나 상업적 성공을 기대한다면 자본으로부터도 미디어로부터도 결코 자유로울 수 없다. 결국 기대며 그로부터 구애되고 영향을 받고 만다. 찢기고 일그러진다. 왜곡되고 부서진다. 그런 가운데 결국 인간의 욕망과 감정이 살인이라는 끔찍한 범죄를 불러일으키고 만다.
감독이 보는 영화와 유정인이 보는 영화, 그리고 뱀파이어 민태연이 보는 영화, 영화와 현실이 서로 엇갈린다. 유정인은 여전히 영화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다. 아니 현실의 자신에 도취되어 있다. 마치 영화속 한 장면처럼. 그것이 살인사건과 서로 만난다. 사람을 죽이고, 산 채로 묻고, 다시 그것을 차로 밟고 지나가는 끔찍한 현장과 만난다. 아직 사람은 죽지 않았다. 아직 사람을 죽이지 않았다. 그러나 그것은 다시 죽음으로 이어지고 만다. 우연과 관성이 만들어내는 비극이다. 인간은 비극으로 이끌릴 수밖에 없다. 모순된 현실과 모순된 인간이 죄와 악이라고 하는 비극으로 내몰리고 만다.
드라마적 재미 또한 놓칠 수 없다. 법의학자인 조정현(이경영 분)에게 괜히 친한 척 말을 놓으려 시도하는 황순범(이원종 분)과 그러나 그런 시도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어색하기만 한 그들의 관계가 드라마에 디테일한 감정의 선을 걸쳐 놓는다. 그런 황순범에게 다시 친한 척하려는 최동만(김주영 분)의 어설픔 또한 우습기는 마찬가지다. 말을 놓으려 하는데 최동만의 어머니가 황순범보다도 어리다. 역설과 엇갈림이 실없이 웃음을 터뜨리게 만든다. 리얼하면서도 우스꽝스럽다. 드라마에 활력소가 된다.
시즌1에서의 유정인은 마치 소녀와도 같았다. 성장기의 소녀처럼 성별조차 없이 무채색으로 그려지고 있었다. 그러나 이제 여자가 되었다. 짙은 화장이 조금은 어색하기도 한 어른 여자가 되어 있었다. 낯설지만 그런 유정인에게도 익숙해져야 한다. 그녀의 민태연에 대한 감정이 보다 구체화된다. 반면 원래의 유정인이 갖는 개성은 옅어져간다. 그녀는 어른이 된다.
비유적이고 상징적이다. 그것이 노골적으로 의도적이다. 작가의 의도가 저토록 선명하게 느껴지는데 부담스럽거나 거부감이 들지 않는다. 그것은 작가의 의도 가운데 필자가 의도하는 바가 숨어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려고 해서가 아니라 그것이 바로 작품인 까닭이다. 작가의 의도야 어떠하든 그렇게 필자는 작품을 자신의 이야기로서 이해한다. 멋지다. 재미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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