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간의 5분을 위해 영광의 10년을 버리지 마십시오!"
아마도 그것은 앤서니 김(김명민 분)이 자신에게 들려주곤 하던 이야기이기도 했을 것이다. 순간의 만족을 위해 더 오랜 즐거움을 포기하지는 말라. 순간의 쾌락을 위해 영원한 행복을 놓쳐서는 안된다. 그래서 이고은(정려원 분)에게도 앤서니 김은 말한다.
"네 꿈을 포기하지 마라!"
그는 꿈을 꾼다. 어린 시절 그에게 드라마란 고단한 현실로부터 잠시나마 도망칠 수 있도록 해주는 유일한 탈출구였을 것이다. 앞을 보지 못하는 어머니와 그런 어머니와 아버지조차 없이 세상에 내던져진 현실, 가난과 무력감이 그를 절망과 좌절로 내몰고 있었다. 그런때 TV속 드라마는 그에게 작으나마 큰 위로가 되어주었을 터다. 어린 시절의 앤서니 김이 낡은 흑백TV로 보고 있던 드라마가 하필 <수사반장>인 것도 바로 그래서다.
자기는 잘못한 것이 없다. 그 아이가 먼저 자신과 어머니를 놀리고 모욕했다. 그래서 혼내주었다. 그러나 어머니는 앞을 보지 못했고, 가난한데다 자신을 지켜줄 아무것도 갖지 못했다. 자신의 아이조차 지키지 못했다. 사과를 강요받고 그것을 거부하는 자신에게 아이의 어머니는 경찰서에 신고하겠다는 협박을 남기고 돌아갔다. 하지만 경찰은 그런 존재가 아니다. <수사반장>속 경찰들은 세상의 어느 누구보다도 정의롭고 지혜로운 이들이라서 억울한 일을 당한 사람을 돕고 잘못을 저지른 사람을 찾아내어 반드시 그 댓가를 치르도록 한다. 드라마속에는 정의가 있다. 합리가 있고 진실이 있다. 아마 드라마속 경찰들이라면 아이의 어머니가 자신을 신고하더라도 누가 잘못했는가를 엄정히 가려주리라. 아이를 대신해 혼내주리라.
그래서 지금도 그는 꿈을 꾼다. 드라마가 자신을 행복하게 만들어줄 것이다. 드라마만 성공한다면. 이번 드라마만 성공시킬 수 있다면. 굳이 복수를 하려면 드라마가 아니어도 좋았을 것이다. 사람들에게 자기를 과시하고 인정받는 것이 목적이었다면 굳이 드라마가 아니어도 상관은 없었을 것이다. 방법은 많았다. 비록 '제국'에서는 밀려났지만 그동안 벌어놓은 재산이 결코 적은 것이 아니었다. 앤서니 김 자신 또한 그렇게 무능한 편도 아니었다. 머리가 좋고 수완이 좋다. 굳이 드라마만 아니라면, 더구나 그동안 모은 재산까지 모두 날려가며 드라마에만 집착하지 않았더라면, 그러나 지금 이 순간에도 그는 남운형(권해효 분) 국장의 앞에 무릎까지 꿇어가며 드라마를 성공시키고자 발버둥을 친다. 왜일까?
그것은 어쩌면 주문이기도 할 것이다. 이 드라마만 성공한다면! 하지만 드라마가 성공해서 뭐가 어떻게 달라진다는 것일까? 100억의 투자금 가운데 돈을 남기려 하는 것도 다음 드라마를 만들기 위해서다. 벌써부터 다른 드라마를 염두에 두고 준비에 들어가고 있다. 더 강한 힘을 가지게 되어서. 더 강한 영향력으로 사람들 위에 군림하게 되어서. 그래서 앤서니 김이 하고자 하는 것이 무엇일까? 과거 '제국' 시절 제왕이라 불렸던 그가 결국 손에 넣은 자신의 지위와 힘으로 하고자 했던 일이 무엇이었을까?
드라마를 만드는 것이 즐겁다. 행복하다. 오로지 그것만이 보람이다. 물론 앤서니 김 자신도 작품성 있는, 누가 봐도 감탄할만한 그런 대단한 드라마를 만들고 싶었던 때가 있었을 것이다. 이고은에게 들려주는 한 마디 한 마디는 앤서니 김 자신이 겪은 냉혹한 현실에 대한 아픈 경험이었는지도 모른다. 어떤 형태로든, 설사 그로 인해 주위로부터 어떤 비난을 듣든, 그러나 단지 드라마를 만들 수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얼마든지 만족할 수 있게 만들어버리는 그런 기억이 그에게는 있을 것이다. 아마 앞으로 하나씩 모습을 드러내게 될 것이다. 앤서니 김의 과거에 대해 조금이나마 보여진 것인 이번이 처음이다. 앞을 보지 못하는 어머니와 아버지가 부재한 가난한 가정, 그리고 세상에 대한 분노와 증오로 가득한 어린 그가.
이번 한 번으로 만족할 것이라면 얼마든지 가진 모든 것을 쏟아부어 자신이 만족할 수 있는 대단한 작품을 만들어도 좋을 것이다. 유작이라 생각한다면 가능하다. 인생에 이 작품 하나 뿐이라면 그다지 어려운 일도 아니다. 하지만 앞으로도 계속 드라마를 만들고 싶다. 계속해서 드라마를 만들고 그것을 방송을 통해 내보내 사람들에게 보이고 싶다. 사람들로 하여금 자신의 드라마를 보도록 만들고 싶다. 어찌해야 하는가? 100억의 제작비 가운데 10억을 들인다면 이제까지 없었던 최고의 5분을 만들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 5분을 양보한다면 100억의 제작비는 20부작 드라마의 전반에 골고루 유용하게 쓰일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앞으로 10년 동안 자신이 만들게 될 드라마로 이어진다.
설득은 통한다. 물론 항상 통하는 것은 아니다. 앤서니 김의 좌절을 받아들이기에는 이고은은 아직 젊고 아직 너무 순수하다. 그녀는 앤서니 김의 방식으로 앤서니 김을 속여가며 끝내 자신의 의도를 관철하고 만다. 그녀에게는 아직 기회가 많다. 작가로서도, 아니면 생활인으로서도. 드라마가 전부는 아니다. 그러나 구영목 감독이나 앤서니 김이나 드라마에 너무 많은 것을 걸고 있다. 이대로 포기할 수는 없다. 드라마는 앤서니 김과 이고은이라는 서로 전혀 반대편을 바라보고 있는 두 남녀의 어색한 동거를 그리고 있다. 서로 반대편을 보던 눈이 만나면 눈이 맞게 된다. 이번만은 이고은 역시 앤서니 김의 편에 서고 있었다. 드라마가 제대로 만들어지기 위해서도 구영목 감독은 스스로 양보할 필요가 있다.
어느새 더럽혀진 꿈, 어느새 방향을 잃은 어린 시절의 꿈과 목표, 하지만 그럼에도 앤서니 김은 올곧게 한 길만을 뚜벅뚜벅 걸어가고 있다. 자기만의 방식으로. 바람이 불면 부는대로, 비가 내리면 내리는대로, 길이 굽으면 굽은대로, 혹시라도 낭떠러지가 나오면 엉금엉금 기어서라도, 온갖 먼지에 더러운 오물이 묻었어도 그는 결코 포기하지 않는다. 그러나 희망이 있을 것이다. 그의 무의식이기도 하다. 그가 이고은에게 집착하는 한 이유이기도 할 것이다. 지금은 잊어버린, 그가 원래 가고자 했던 그곳에 갈 수 있으리라는 한 가닥 미련이 그를 살아있게 한다. 이고은의 한 마디에 과거의 자신을 떠올리고 바로 구영목을 찾아가는 장면에서는 그의 숨은 속내 한 자락을 엿볼 수 있게 한다. 그것이 아직 사람들에게 보여지지 않는 그의 진심일 것이라고. 그럼에도 그는 멈추지 않고 걸어가고 있다.
어쩌면 구영목이 말하는 허세야 말로 앤서니 김의 본질 그 자체일 것이다. 허세란 꿈이다. 꿈에 자신을 맞추는 것이다. 꿈이 목표가 아니라 현재가 된다. 그렇게 믿는다. 그렇게 믿고 살아간다. 드라마 제작자로서. 드라마의 제왕으로서. 모든 것을 잃은 순간에도 그는 결코 자신의 꿈만은 놓지 않는다. 꿈을 현실에 붙잡아 놓은 채 오히려 꿈에 맞춰 현실의 자신을 만들어간다. 가장 현실적이지만 가장 몽상가적인 존재, 그래서 그의 지독한 이기주의와 천박한 현실주의가 그렇게 밉지만은 않다. 그는 항상 현실을 말하면서도 꿈을 말한다. 꿈을 말하면서도 현실을 말한다. 딜레마일 것이다. 영원하지는 않다. 그러나 지금 이 순간에 최선을 다한다.
상당히 복합적인 캐릭터다. 얼핏 속물적이다. 비열하고 야비하기까지 하다. 악당의 전형적인 모습 그대로다. 하지만 그것으로 끝나지 않는다. 단순하기는 이고은 쪽이 훨씬 단순하다. 그린 듯하다. 순수하고 열정에 가득한 신예 드라마작가.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이고은은 앤서니 김을 비추는 거울이 된다. 앤서니 김 역시 거울이 되어 이고은을 비춘다. 욕먹기 딱 좋은 독한 캐릭터에 살짝 여지를 남기는 김명민의 연기는 과연 칭찬할 만하다. 김명민의 반대편에서 정려원 역시 균형을 맞춰주고 있다. 그것이 전형적인 캐릭터와 상황 가운데서도 드라마가 생명력을 얻는 이유다. 앤서니 김이 아니었다면 흔한 드라마가 될 뻔했다. 그가 주인공이다. 그와 이고은이 드라마의 중심이다. 드라마가 재미있다.
강현민(최시원 분)에게 위기가 찾아온다. 스스로 자초한 위기다. 하지만 동기가 마련됐다. 한겨울에 바다에서 헤엄은 못치겠다 말했다. 하지만 위기를 타개하기 위해서는 무엇이든 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래서 만일 강현민이 진정한 배우로 거듭나게 된다면 이 또한 지독한 역설이며 반전일 것이다. 아니면 여전히 강현민 자신인 채로 그같은 이미지로 대중에 보이게 된다. 그것은 더한 역설이 될 터다. 앤서니 김이 강현민을 위험을 감수해가면서까지 드라마에 남기게 되는 이유가 벌써부터 궁금해진다. 이번에도 앤서니 김의 숨은 참모습일까?
우여곡절이 많다. '제국'이라고 하는 감당하기에는 버거운 상대가 그의 앞을 막아선다. 앤서니 김만이 아니다. 이고은과 구영목, 강현민 역시 그들과 악연을 쌓아간다. 드라마가 재미있는 이유다. 배후의 회장까지 등장하며 오진완에게는 동기가 더해진다. 마지막 웃는 이는 과연 누구일까? 물론 드라마임을 안다. 하지만 과연 어떻게 그는 마지막에 웃을 수 있게 될까? 그 웃음이 의미하는 바는 무엇일까? 뻔한 듯 그래서 흥미롭기만 하다.
작가나 배우의 입장과 제작자의 입장과는 상당히 다를 수밖에 없다. 전혀 새로운 관점에서 색다른 이야기를 만들어간다. 음모와 배신과 배경을 통해 드러나는 수많은 악의들. 드라마는 아름답지만 그것을 만드는 사람마저 아름답지는 않다. 그것을 만드는 현장마저 아름다운 것은 아니다. 뻔히 아는 이야기지만 풀어놓는 방식이 남다르다. 재미있다. 기대가 커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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