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

드라마의 제왕 - 앤서니와 이고은의 입맞춤, 울지 못하던 아이가 울다.

까칠부 2013. 1. 2. 08:54

아이가 있었다. 부모에게 기대어 응석을 부릴 나이에 아이는 세상에 내던져졌다. 부모의 품은 그리 크지도 넓지도 않았으며 따뜻하지도 않았다. 거친 세상에서 아이는 혼자 사는 법을 배워야 했다. 누구도 의지하지 않고, 누구에게도 기대지 않고, 그러면서 오히려 아이는 다른 누군가를 지키는 법을 알아야만 했다. 아이는 아파도 차마 누가 볼까 눈물을 보이는 법이 없었다.

 

아이가 우는 것은 그 울음소리를 들어줄 누군가가 있기 때문이다. 아무도 듣지 않는다면 아이는 결코 울지 않는다. 아무도 자신의 울음에 반응하지 않는다면 차라리 혼자서 울음마저 삼키고 만다. 아이는 그렇게 혼자 울음을 참는 법을 배워왔다. 혼자 자란 아이는 그래서 우는 방법을 모른다. 어떻게 울어야 하고 어떻게 울음을 그쳐야 하는지 모른 채 그냥 혼자서 운다. 차라리 화를 낸다. 화를 내고 욕을 한다. 싸움을 걸기도 한다. 그렇게 아이는 혼자 자라왔다.

 

이번에도 앤서니(김명민 분)는 혼자 울고 있었다. 드라마 제작자다. 드라마 제작의 전반이 그의 책임 아래 있다. 작품을 고르고, 필요한 배우와 스태프를 섭외하고, 드라마 제작에 쓰이는 모든 자본과 물자를 조달하고, 드라마가 만들어지면 그것이 방송에 편성되도록 노력을 아끼지 않는다. 물론 흥행에도 성공해야 한다. 그래야 드라마 제작에 들어간 비용을 회수하고 배우와 스태프, 작가들에게 약속한 댓가를 지불할 수 있다. 능력이 부족했든 아니면 운이 따라주지 않았든 만일 드라마가 흥행에 실패해서 투자자와 드라마 제작에 참여한 모두에게 손해를 끼쳤다면 그것은 전적으로 제작자 자신의 책임이다. 그래서 드라마의 제목도 <드라마의 제왕>이다. 그런데 앤서니 자신이 제작자로서의 자신의 책임을 놓아버리려 하고 있다.

 

원래 이고은(정려원 분)이 대본을 쓸 때면 앤서니가 항상 곁에 있으면서 대본의 내용을 검수하고 보완하거나 수정을 지시하고 있었다. 작가가 자칫 자기 작품에 도취되어 중심을 잃을 수도 있는 것을 철저히 드라마의 성공만을 책임지는 제작자로서 객관적인 입장에서 균형을 잡아준다. 작가의 자의식보다 드라마 제작에 참여한 모두를 위해서 보다 높은 시청률을 보장할 수 있는 내용이 될 수 있도록 비판하고 견제한다. 그런데 정작 드라마의 연장이 결정되면서 더욱 바뀐 대본의 완성도에 신경써야 할 시점에 앤서니는 고작 자신이 대본을 볼 수 없게 되었다는 이유만으로 그 중요한 역할과 책임을 포기해 버리고 만다. 대본을 볼 수 없게 되었다는 사실을 알리고 도움을 받으면 될 것을 단지 이고은에게 알리고 싶지 않아서 그는 적당히 그냥 넘어가고 만다. 이고은을 믿어서가 아니라 자신의 개인의 사정으로.

 

도움을 청하는 방법을 모른다. 응석을 부리는 방법을 모른다. 도와달라 말하면 된다. 곁에 있어달라 부탁하면 된다. 들어주지 않으면 떼라도 쓴다. 다리를 붙잡고 사정이라도 한다. 울고불고 차라리 죽겠다 억지를 불려 볼 수도 있다. 하지만 그럴 수 없다. 그래서 차라리 모두에게 사실을 숨기고 악역을 자임하려 한다. 무슨 죄인가? 아무것도 모른채 오해로 인해 앤서니를 미워하고 원망하게 된 다른 사람들은. 누군가를 미워하는 것도 죄다. 누군가를 원망하는 것도 어떤 사람들에게는 고통이다. 하물며 그것이 배신감과 함께 찾아왔다. 진실이 아니었기에 그 순간 가졌던 감정들이 헛되고 허무하다. 그건 선의가 아니다. 자기만족일 뿐.

 

그것을 증명하는 것이 이고은이 사실을 알고 찾아와 따져묻자 바로 무너져 버리는 앤서니 자신의 모습이었을 것이다. 그렇게 여리고 무르다. 겉은 단단하지만 성기고 약해서 약간의 눈물에도 바로 허물어져 버린다. 사실은 앤서니도 이고은에게 기대 울고 싶었다. 엉엉 울며 떼도 쓰고 응석도 부리고 싶었다. 그것이 그의 본심이었다. 어머니에게 하고 싶었던, 그러나 어머니에게는 할 수 없었던 어린 시절의 깊은 상처였다. 문득 앞을 볼 수 없게 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 앤서니의 눈에 보인 어린 시절의 자신은 그런 의미였을 것이다. 그 아이도 차마 울지 못한 채였다. 앤서니도 울지 못한다. 그리고 마침내 앤서니는 이고은 앞에서 단단한 껍질을 벗고 여린 자신을 드러내고 만다. 그녀에 기대고 의지한 채.

 

역시나 <드라마의 제왕>에서 활력소라면 다름아닌 강현민(최시원 분)일 것이다. 이번에는 연기에 대한 욕심에 불이 붙었다. 성민아(오지은 분)의 말처럼 중간이란 것을 모른다. 모두가 괜찮다는데 혼자서 오버해서 몇 번을 같은 장면을 다시 찍으려 한다. 상대역인 성민아는 덕분에 촬영을 마치고 추위에 오들오들 떨고 있다. 드라마의 연장으로 영화와 병행하게 되면서 영화감독과도 중요하게 대화를 나누고 있는데 느닷없는 전화로 그녀를 당황스럽게 만들기도 한다. 그로 인핸 터무니없는 오해는 어찌할 것인가.

 

어쩔 수 없이 사귀는 수밖에 없다. 그렇게 운명지어졌다. 신이 아니라면 작가가 그렇게 운명지어 버렸다. 사소한 하나하나가 오해를 기정사실로 만들어 버린다. 당사자는 아니라 하는데 하나같이 오해받을만한 상황 뿐이다. 중요한 미팅에서 전화를 받고 급히 나갈 일이 달리 무엇이 있던가. 대기실에서 서로 끌어안고 입을 맞추려 하는데 과연 어떤 장면을 상상해야 하겠는가? 하필 그런 장면들만 사람들에게 보이고 들린다. 성민아에게는 저주같겠지만 팔자란 그런 것이다. 소소하게 웃게 만든다. 이러다 정말 두 사람이 사랑에 빠지면? 미운정도 정이라는데 강현민도 성민아에게 생각이 없지는 않다. 다만 성민아가 강현민보다 더 많은 개런티를 받는 부분만 뺀다면. 연기에 불타올라도 성민아에 대한 경쟁심은 사그라들 줄을 모른다.

 

코미디라면 강현민이 코미디일 것이다. 로맨틱코미디라면 강현민과 성민아의 관계일 것이다. 비극적 멜로라면 앤서니와 이고은이다. 철늦은 시한부도 아닌 드라마 제작자로서 사형과도 같은 실명이다. 아니 사형은 아니다. 단지 보지 못할 뿐 어차피 앤서니 자신이 현장에서 직접 연출을 하거나 하는 것은 아니다. 경험도 있고 실력도 어디 가는 것은 아니다. 앤서니에 대한 의리를 지키려 했던 직원들이다. 이고은도 그렇게 약하기만 한 여자는 아니다. 기대기보다는 오해려 기대게 하는 것이 더 어울릴지도 모른다.

 

신파였다. 지루하고 진부했다. 너무 전형적이었다. 남자라 하겠지만 원래 남자란 그렇게 사람들 앞에서 우는 법을 모른다. 기대는데 서툴고 의지하는게 어색하다. 결국 이고은이 드라마를 풀어간다. 이고은이 앤서니의 병을 눈치챌 수밖에 없는 이유다. 앤서니 혼자서는 드라마가 이어지지 못한다. 내일을 기대한다. 이고은이 만들어갈 결론이다. 조금은 나아지기를. 아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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