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

그 겨울, 바람이 분다 - 또다른 비극, 사람이 사람을 길들인다는 것

까칠부 2013. 2. 21. 08:51

그것은 차라리 깊은 수렁과도 같았을 것이다. 자기도 모르게 어느새 빠져들고 만다. 빠지는 줄도 모르고 점점 깊이 들어가다가 어느 순간 더 이상 돌이킬 수 없는 지경에 이르고 만다. 어린왕자와 처음 만났을 때 여우에게 어린왕자는 아무것도 아닌 존재였을 테지만, 그러나 일단 '길들여진' 뒤로는 이별과 기다림이라는 시린 아픔을 견디지 않으면 안되었다.

 

의도된 장치였을 것이다. 오영(송혜교 분)이 오수(조인성 분)에게 숙제를 내준다. 지난날 오영의 친오빠인 오수가 부모의 이혼으로 인해 어쩔 수 없이 헤어지면서 다음에 만날 때 사가지고 오겠다고 약속했던 그것이 무엇이었는가. 단서라고는 아무것도 없이, 더구나 그 숙제를 풀지 못하면 그녀로부터 얻고자 하는 것을 얻어내지 못할 것이고, 그렇게 되면 그는 조무철(김태우 분)에 의해 죽임을 당하게 될 것이다. 어떻게 해서든 알아내야 했기에 오수는 실제 오영의 오빠가 되어 더욱 그녀를 깊이 이해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더 이상 그저 필요에 의해 이용만 하고 마는 타인이 아니게 된 것이다.

 

문제는 그럼에도 오수와 오영은 전혀 남일 뿐이라는 사실이었을 것이다. 아무리 그녀를 이해해도, 아무리 그녀를 친오빠처럼 가까이 여겨도, 아니 그녀에게 이성으로서의 감정을 느끼게 되더라도 그는 그녀와는 아무 상관없는 전혀 남일 뿐이었다. 오빠도 될 수 없고, 그렇다고 그녀를 이성으로 여길 수도 없다. 그런데 오영은 그를 친오빠 오수라 여기고, 오영을 더 깊이 알고 이해하게 될수록 인간적인 연민은 남다른 감정으로 발전하고 만다. 아니 벌써 그러고 있다. 이율배반의 모순이 더욱 오수를 수렁으로 빠뜨리고 만다.

 

돈을 얻어내야 한다. 오영을 속여 철저히 그녀의 오빠가 됨으로써 그녀로부터 필요한 돈을 얻어내야 한다. 그래야 산다. 그런데 더 이상 그녀를 이용대상으로만 보지는 못하겠다. 그녀로부터 필요한 돈을 얻어내야 하지만 그녀를 더 이상 속이는 일도 그녀를 다치게 하는 일도 이제는 하지 못하게 되었다. 그의 뒤를 조무철이 쫓는다. 조무철에 의해 그가 있는 곳을 알아낸 진소라(서효림 분)가 그를 찾으려 하고 있다. 그를 사랑하면서도 오영을 대하는 그의 태도에 질투를 느끼고 마는 문희선(정은지 분) 또한 불안요인이다. 시한장치처럼 위기는 그를 에워싸고 가쁘게 다가오고 있는데 그는 여전히 망설이고만 있을 뿐이다. 어떻게 해야 하는가? 가장 좋은 방법은 오영이 말한대로 그녀를 죽여주는 것 뿐이다. 하지만 그럴 수 없다.

 

어쩌면 상징적인 장면이었을 것이다. 스스로 강으로 걸어들어가는 오영을 구하기 위해 강으로 뛰어드는 오수의 모습은. 강으로 뛰어들어 오영을 안고 강가로 걸어나온다. 흠뻑 젖은 채 진심이 되어 오영의 뺨을 때리고 만다. 마치 오수가 알지 못하는 과거에 오영의 친오빠인 오수가 그랬던 것처럼. 마지막 오수가 짓고 있던 무서운 표정은 그런 자신에 대한 두려움이 아니었을까? 오도가도 못하는 막다른 궁지로 스스로 걸어들어가고 만 자신에 대한 자각이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그의 앞에는 그의 얼굴을 만지고 싶어하는 오영이 있다. 그를 진심으로 오빠로 믿기 시작한 오영의 손이 그의 얼굴을 더듬고 있다. 그의 진심을 더듬고 있다.

 

오영은 죽으려 한다. 그것이 가장 행복하기 때문이다. 더 이상 그녀의 삶에 행복이란 없다. 기억속의 그때처럼 행복하게 웃을 일이란 그녀에게는 더 이상 없어 보였다. 그래서 죽으려 했다. 그리웠던 기억을 쫓아 강물로 걸어들어가던 그 순간처럼. 그리고 그때 오수가 달려들어 그녀를 구해준다. 매서운 따귀와 함께. 아픔이란 실감이기도 하다. 내가 살아있구나. 그리고 자기의 곁에 오빠 오수가 있구나. 그것은 그녀가 그토록 바라고 기다리던 구원의 순간이었다. 강물에서 꺼내졌을 때 그녀는 오수로 인해 절망으로부터 구해진 것이었다.

 

하기는 그녀 스스로가 쌓아올린 벽이었다. 그녀 스스로 파고 들어간 함정이었다. 조금만 더 당당했더라면. 조금만 더 자기를 믿고 주위에 대해서도 마음을 열 수 있었더라면. 그녀를 뒤에서 험담하며 상처주었던 그 아이도 이제는 진심으로 그녀에게 미안해하고 있었다. 애써 포기하고 외면했던 그녀의 첫사랑은 그녀를 잊제 못해 스스로 봉사활동에 나섰다가 그녀와 크게 다르지 않은 청각장애인과 결혼하고 있었다. 어리석은 것은 자신이었다. 자신을 외부로부터 고립시키고 좌절 속에 살게 한 것은 다른 누구도 아닌 자신이었다. 그것을 오수가 가르쳐주었다. 친구들이 서로 프로포즈하고 키스하는 모습을 실시간으로 중계하듯 그들의 진심을 오수가 오영에게 가르쳐주었다.

 

오수는 오영에게 또 화장도 시켜주었었다. 옷도 골라주었다. 오영은 앞을 보지 못한다. 자기가 화장한 모습을 보지 못한다. 자기가 차려입은 옷들도 보지 못한다. 그러나 말한다. 자신을 위해서 그래줄 수 없느냐고. 자기는 보지 못하지만 오수는 그것을 볼 수 있다. 자신은 전혀 그것을 느끼지 못하지만 오수는 그런 자기를 예쁘다고 말해준다. 무채색의 오영의 세계에도 색이 칠해진다. 그녀 자신을 위한 것은 아니지만 오수가 그것을 원하고 기뻐해주니 그를 위한 그녀의 마음을 위한 것은 되어준다. 아무 의미도 가치도 없던 그녀 자신의 모습이 그렇게 그녀에게 의미와 가치를 부여하며 돌려진다.

 

자존감일 것이다. 나는 가치있는 존재다. 나는 반드시 필요한 존재일 것이다. 인정받고 존중받는다. 왕비서 왕혜지(배종옥 분)의 배려에는 그런 것이 없었다. 그녀를 구속히고 속박하는 지독한 이기만이 있을 뿐이었다. 오영의 엄마이고자 하지만 왕혜지의 세계에 오영의 존재란 없다. 단지 그녀에게 딸의 대신이 되어줄, 이루지 못한 그녀의 욕망을 대신 이루어질 대상만이 있었을 뿐이었다. 차라리 눈이 머는 것이 좋다. 차라리 눈이 멀어 자기 없이는 아무것도 못하는 것이 더 낫다. 아니 간절하다. 그녀의 사랑은 지독한 자기애다. 진소라가 오수에게 그런 것처럼 그녀의 맹목과 이기는 타인의 희생을 전제한다.

 

무례하기까지 한 문희선의 돌발적인 행동에도 오영이 웃을 수 있었던 이유였다. 그녀가 장애인이어서가 아니었다. 앞을 보지 못하는 신세라서 그런 것이 전혀 아니었다. 대기업의 상속녀라는 신분 또한 문희선에게는 전혀 아무런 의미도 되지 못한다. 오빠와의 사이를 질투한다. 오빠와 사귀었던 여자의 동생이라고 한다. 그런 그녀의 투정이 오히려 귀엽기까지 하다. 그렇게 격의없이 진심으로 감정을 담아 부딪혀 온 이가 과연 그동안 몇이나 되었던가. 모든 것이 생소하고 신선하기만 하다. 그녀는 비로소 살아있음을 느낀다. 물론 그런 오영의 모습에서 오수는 어느새 친오빠인 오수를 대신해 그녀를 지켜줘야 한다는 책임감을 느낀다. 오영의 곁에 있을 때 오수 또한 누구보다 간절히 필요한 존재가 된다.

 

비극일 것이다. 사랑하지만 사랑해서는 안되는 사이라는 것은. 사랑해서는 안되는데 어느새 사랑에 빠져버리고 말았다. 사랑해서도 안되고 이루어질 수도 없는데 자신도 모르게 사랑이라는 수렁에 빠져들고 말았다. 출구란 없다. 하지만 해서는 안되는 사랑이다. 오수의 뒤를 쫓는 그들이, 그리고 오영을 둘러싸고 있는 그들 또한 그래서 더욱 보는 이들의 마음을 답답하게 만든다. 그들은 행복해질 수 있을까? 그들의 비극적 관계는 행복으로 끝날 수 있을까?

 

담채화처럼 투명하게 웃는 오영의 모습이 시리도록 아련하다. 후기인상파의 강렬한 색채가 느껴지는 오수의 모습은 처절하고 치열하다. 극단적이지만 그것이 사람이 살아가는 모습이다. 사람이 사람을 사랑하는 모습이기도 하다. 그것을 자신조차 알지 못한다. 오영도, 그리고 오수도. 그들은 간절히 서로를 필요로 하고 그리고 서로에게서 자신의 존재를 느낀다. 그들은 살아갈 수밖에 없다. 해피엔드를 기대해 본다.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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