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

그 겨울, 바람이 분다 - 그들이 죽음을 마주할 때, 살아야 해서 죄가 되는 이유

까칠부 2013. 2. 22. 09:07

사람은 누구나 죄인이다. 자의든 타의든, 혹은 고의든 실수든, 잘못을 저지르고 그 잘못을 끌어안고 짊어지고 살아가지 않으면 안된다. 더구나 그럼에도 살아가야 하기에 사람은 더욱 죄인이 되어 살아가지 않으면 안된다. 그럴 자격이 없는데 살아가려 행복해지려 한다.

 

사람이 종교를 믿는 이유일 것이다. 여러 종교에서 하나같이 공통적으로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 미천하고 죄만은 자신일 것이다. 죄를 지을 수밖에 없고, 그 죄속에 살아가 수밖에 없는 가엾은 자신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구원을 말한다. 이 지독한 속박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길을 제시한다. 그러고 보면 천국이든 해탈이든 결국 죽음을 말하고 있을 것이다.

 

행복해질 수 없을 것이라 생각했다. 행복해져서는 안된다고 생각해왔었다. 자기의 잘못으로 인해 사랑하는 그녀가 죽었다. 그녀와 그녀의 뱃속에 있던 이름조차 지어주지 못한 아이가 자신의 잘못으로 인해 영영 세상을 등지고 말았다. 그녀가 묻힌 그곳에는 아이는 흔적조차 남아있지 않다. 차마 아이를 떠올리지 못하는 것은 여전히 자신에게 아이의 아버지가 될 자격이 없다고 여기는 자격지심 때문일 것이다. 원하지 않았던 아이였고 그래서 자신의 잘못으로 인해 죽어간 아이였다. 울어주지조차 못한다.

 

버려진 아이였다. 부모는 아이를 사랑한다. 아이를 사랑하고 보살핀다. 그러나 자신은 그 부모로부터 버림받았다. 상실감과 배신감에 - 그보다 부모에게 필요없는 아이였다고 하는 자격지심과 자존감의 결여가 자기를 아무렇게나 내굴리도록 만들었다. 행복해질 수 없다. 행복해질 리 없다. 그리고 그런 자신에 대한 실망과 분노는 태어날 아이에게로까지 향하게 된다. 이런 자신이 과연 아이의 아버지가 될 수 있을까? 아이와 아이를 잉태한 그녀에 대한 것이라기보다는 자신에 대한 분노이며 자기에 대한 학대였을 것이다.

 

그리고 그 결과 그녀는 죽었다. 아이도 죽었다. 그럼에도 자신은 살아남았다. 그래서 더욱 자포자기하여 자신을 내굴리고 말았다. 세상에 사랑따위란 없다. 살아갈 의미도 가치도 없다. 그것은 또다른 절망의 표현이었다. 언제 어떻게 죽어 사라지더라도 아쉬움도 미련도 없다. 그렇게 여기고 살아왔다. 그렇게 아무런 기대도 희망도 없는 삶을 체념하고 저주하며. 희주란 이름은 그런 자신의 죄를 대신하는 이름이었다. 살아갈 이유이며 살아서는 안되는 이유였다. 그렇게 믿어왔었다. 바로 직전까지도. 그러나 아니었다.

 

비로소 그는 깨닫는다. 깨닫기 전에 먼저 확인하고 만다. 행복해하는 자신을. 행복해지고 싶어하는 자기 자신에 대해. 잊고 말았다. 그녀를. 그녀의 죽음을. 그녀가 죽은 그 날을. 자신으로 인해 그녀가 그녀의 아이와 함께 죽어가야 했던 그 순간들을. 오영(송혜교 분)의 오빠가 되어 그녀와 함께하는 시간들로 인해. 오영은 오빠인 자신을 필요로 하고, 오영의 오빠가 된 오수(조인성 분) 또한 그런 그녀를 필요로 한다. 살아있다는 실감을 느낀다. 살아가고 싶다는 욕망을 느낀다. 아니 살고 싶기에 죽은 오수를 대신해 그녀의 오빠가 되고자 결심했을 것이었다. 삶이란 이렇게 비루한가. 그토록 큰 자신의 죄조차 잊을 만큼. 그토록 후회하고 괴로워하면서도 그렇기 때문에 그는 그래도 살아가려 한다.

 

그것이 더 죄스럽다. 살아있다는 것이. 살아간다는 것이. 그리고 행복해진다는 것이. 행복해지고 싶어한다는 것이. 그럼에도 살아간다. 그럼에도 행복해지려 한다. 구원은 그래서 삶속에 있지 않다. 차라리 죽으면 편안해질까? 차라리 죽고 나면 이 모든 구속으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을까? 자신의 죄로부터도. 그 지독스런 환멸감으로부터도. 죽는 것은 그래도 마음껏 누려볼 수 있지 않을까? 그럼에도 살아가야 한다는 것이 더욱 그를 슬프게 만든다. 사람이 슬픈 이유다. 그래도 사람은 살아가려 하며 행복해지려 하는 것이다.

 

오영 역시 크게 다르지 않다. 왕비서 왕혜지(배종옥 분)가 그렇게 그녀를 길들여왔다. 희생을 말한다. 그녀를 위한 자신의 헌신을 말한다. 그러면서도 버릴 것을 말한다. 버림받을 것을 말한다. 죄의식을 강조한다. 자신은 어머니이며 어머니가 아니다. 어머니니지만 어머니가 될 수 없다. 오영이 그토록 왕혜지를 혐오하면서도 끝내 그녀로부터 벗어나지 못하는 이유일 것이다. 이용하라 해서 이용하지만 그 순간에도 그녀는 왕혜지로부터 강요된 죄의식으로 인해 그런 자신을 경멸하게 된다. 한 순간 한 순간이 죄이며 그렇기 때문에 그녀는 왕혜지를 증오하면서도 그런 왕혜지로부터 벗어나지 못하는 것이다.

 

차라리 죽으면 나을까? 차라리 죽어 사라지만 이 저주스럽고 환멸스러운 자신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을까? 어쩌면 오영의 뇌종양은 단지 그녀의 착각인지 모른다. 그녀가 바라는 것이다. 뇌종양이기를. 죽음에 이르는 병이기를. 그렇게라도 이 답답한 현실로부터 벗어나고 싶어한다. 벗어나고 싶은 그 욕망조차 죄이기에 죄마저 함께 사라질 죽음을 바라는 것이다. 그 순간 오수와 오영의 절망은 조무철(김태우 분)이 건넨 한 알의 독약을 매개로 만나게 된다. 지독스러울 정도로 살고 싶어하기에 그들은 그 순간 죽음을 꿈꾸고 만다. 하지만 그것은 삶에 대한 더 처절한 간절한 열망이다.

 

살아도 좋다. 행복해져도 좋다. 자기가 행복한 것이 아니다. 자기가 사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오수는 오영이 행복해지기를 바란다. 살기를 바란다. 그녀의 오빠가 되어 있다. 그녀의 오빠가 되고 싶어하는 자신이 있다. 남녀간의 감정이라기보다는 살고자 하는 절실함이 그녀에 대한 집착으로 나타나는 것이었을 게다. 아니 사랑이란 도대체 어떤 감정일까. 서로를 절실히 필요로 하며 서로로 인해 위로를 받고 살아갈 의미를 찾게 된다. 오수로부터 듣는 그 말들이 오영에게는 더없이 큰 위로가 된다. 그들은 그렇게 만났다. 거짓과 가식의 위에 가장 고통스러운 진실을 통해서. 진실된 서로에 대한 필요에 의해서.

 

그것은 한편으로 오수에게 씌워진 저주였다. 그의 거짓에 내려진 징벌이었다. 거짓에 대한 가장 큰 벌은 진실일 것이다. 거짓이 진실이 되어 돌아왔을 때. 진실을 진실이라 말하지 못했을 때. 오수는 그럼에도 자신의 진심을 오영에게 전하지 못한다. 오수 자신의 이름으로 오수 자신의 감정을 오영에게 솔직하게 말하지 못한다. 오영의 앞에 있지만 오영에게 자신은 자신이 아닌 죽은 그녀의 오빠 오수일 뿐이다. 꿈은 꿈일 뿐 현실이 될 수 없다. 거짓이 밝혀질까 두려워하며 더욱 간절해진 진실을 전하지 못하는 그것보다 더 큰 비극이 어디 있을까?

 

오영의 웃음이 해맑다. 그러나 그것은 이내 가혹한 현실 앞에 부딪혀 산산히 부서지고 말 신기루에 불과하다. 아이처럼 오영은 오수에게 매달린다. 어린시절의 그녀로 돌아가 오빠 오수에게 매달리려 한다. 그녀의 꿈 또한 거짓된 허상 위에 위태하게 흔들리고 있다. 그래서 더 아프다. 끝내 오영을 내버려두지 못하고 뒤쫓아 방문을 나서는 오수처럼.

 

삶은 비극이다. 삶이란 고통이다. 박진성(김범 분)의 삶이라고 다르지 않다. 문희선(정은지 분)는 그래서 언니 희주를 이유로 오수에게 집착하며 강요한다. 조무철이 살아가는 이유이기도 하다. 왕혜지가 자신도 모르게 저지르고 있는 죄의 이유일 것이다. 그녀는 어쩌면 단 한 순간도 자신의 행동에 의문을 가져본 적이 없을 것이다. 그녀가 가지지 못했고 가질 수 없었던 것들을 욕심내려 한 결과였다. 그것이 다시 죄를 만들고, 원망을 만들고, 분노를 쌓아간다. 좌절과 절망 역시 체념과 함께 쌓여간다. 자신을 잃어간다.

 

드라마가 아름다운 이유일 것이다. 비극이지만 비극에만 갇혀 있지 않다. 오히려 매 순간순간이 죄스럽도록 아름다운 영상으로 채워지고 있다. 사람이 아름다운 이유다. 그럼에도 그들은 살아간다. 살아가려 한다. 행복해지려 한다. 아름다워지려 한다. 피투성이가 되어 땅바닥을 구르면서도 그들은 울며 살고 싶은 욕망을 말한다. 자기를 위해 변명한다. 멋드러진 대사보다 말없는 그 여백들이 섬세한 영상으로 가득 채워진다.

 

오영이 또다른 오수를 찾으려 한다. 오빠가 되어 있는 원래의 오수다. 그 사진을 조무철에게서 이명호(김영훈 분)가 받아간다. 문희선은 자신의 언니를 잊은 오수에게 분노한다. 조무철이 박진성을 노리려 한다. 오영과 오수가 서로를 마주보며 눈물짓는다. 삶이란 예측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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