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

야왕 - 죄와 인간, 응징과 증오에 대해

까칠부 2013. 2. 23. 08:59

흔히 말한다. 죄를 미워하되 사람을 미워해서는 안된다고. 사람이 죄를 짓는다. 죄를 지언 것은 사람 자신이다. 그런데 어째서 사람을 미워해서는 안되는가? 아니 사람을 미워할 수는 있다. 그렇기 때문이다. 사람을 미워하게 되면 더 이상 죄란 의미가 없어진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 그러나 알까? 눈을 다치게 했다면 눈 이외의 다른 곳은 다치게 하지 말 것이며, 이를 다치게 했다면 오로지 이만을 다치게 하라. 고대 바빌론의 성문법전인 함무라비법전이 역사상 중요한 의미를 갖는 이유일 것이다. 당장 현대에 쓰여진 많은 소설이나 영화에서도 복수란 상대의 완전한 파멸이나 죽음으로써만 끝나게 된다. 그런데 고대 바빌론인들은 선언했던 것이다. 딱 자신이 당한 만큼만 돌려주어야 한다고.


고대에야 사람을 죽였으면 당연히 사형, 눈을 다치게 했으면 눈을, 이를 다치게 했으면 이를, 만일 뼈를 부러뜨렸다면 다신 자신의 뼈를 부러뜨리기만 하면 되었다. 하지만 보다 고도화되고 복잡해진 현대사회에서 과연 사람의 죄를 무엇으로 계량하여 다시 돌려줄 수 있겠는가? 어떻게 그 죄의 무게를 재고, 그 죄의 크기를 재서, 그에 맞는 처벌을 죄를 지은 당사자에게 돌려줄 수 있을 것인가? 그래서 죄에 묻는 것이다. 어떤 죄인가고.


사람을 미워하는 것은 그에 비하면 아주 쉽다. 사람이 잘못한 것이다. 사람이 잘못해서 죄를 지은 것이고, 따라서 그 죄의 원인은 사람 자신에게 있다. 사람이 못나서 죄를 지었다. 사람이 나쁜 사람이라서 죄를 지었다. 그러니 사람이 벌을 받아야 한다. 어떤 죄를 지었는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가 얼마나 나쁜 사람인가가 중요하다. 문제는 어떻게 그가 나쁜 사람인가를 확인하고 증명할 수 있겠는가? 바로 그래서 증오라는 것이 생겨나는 것이다.


하류(권상우 분)는 말한다. 주다해(수애 분)란 이러할 것이라고. 그녀는 이런 여자일 것이라고. 설사 모든 사실을 밝히고 법에 의해 처벌받도록 하려 해도 그녀는 반드시 그로부터 빠져나가고 말 것이다. 당장이야 백도훈(유노윤호 분)와의 결혼을 통해 백학의 일원이 될 수 있었던 것에 만족하게 된다 할지라도 결국은 더 큰 욕심으로 백도경(김성령 분)과 백도훈의 모든 것을 욕심내게 될 것이라고. 그러니 그러지 못하도록 미연에 막아야 한다. 하류의 머릿속에는 이미 주다해라고 하는 여자의 모든 것이 분명하게 정의되어 있다. 그녀는 나쁜 여자이고 따라서 벌을 받아야 한다. 그것만이 오로지 정의이고 당위다.


그래서일 것이다. 주다해에 대해 집요할 정도로 복수의 날을 세우고 있는 하류 자신이 정작 주다해의 죄에 대해서는 별다른 관심을 보이지 않고 있는 것은. 주다해가 과연 어떤 죄를 지었고, 어떤 이유로 어떤 과정을 통해 그와 같은 죄를 저지르게 되었는가. 그렇다면 그같은 주다해의 죄에 대해 어떤 댓가를 치르도록 하면 되겠는가. 하지만 자기의 친딸이었음에도 은별이 죽던 사고 당시 주다해가 어떤 이유로 자리를 비우고 있었는가에 대해서조차 그는 전혀 물으려 하지 않았었다. 단지 은별이 죽는 그 순간 주다해가 함께하고 있었고, 은별이 사고를 당했을 때 자리를 비우고 있었다. 그러니 그녀의 잘못이다.


주다해가 은인이기도 한 하류를 끝내 배신하고 만 이유에 대해서야 그다지 몰라도 상관없다. 이유야 어찌되었든 하류는 주다해에게 자신의 모든 진심을 배반당하고 말았다. 그녀를 위해 살았던 결코 짧지 않은 시간들을 배신으로 돌려받고 말았다. 화낼 이유로써 충분하다. 하지만 은별의 죽음에 대해서, 그리고 쌍동이형인 차재웅의 죽음에 대해서 과연 진실을 알려고 한 번이라도 노력한 적이 있던가? 증거가 없다는 말만 되풀이할 뿐 단 한 번도 그 증거를 찾고자 하는 모습을 보인 적이 없었다. 하다못해 주다해의 사주를 받아 차재웅을 죽인 범인이라 여겨지는 주양헌(이재윤 분)을 통해서라도 사실을 들으려 애쓰는 모습을 보였어야 했다. 그러나 단지 그에게는 은별이 죽었고 차재웅이 죽었다는 사실만 중요할 뿐이었다.

 

그래서 그의 복수도 주다해의 죄가 아닌 주다해 자신에게로 초점이 맞춰진다. 이미 모든 수단은 갖춰져 있다. 주다해로 하여금 결혼식 당일 실신하도록 만든 그 사진들이면 얼마든지 주다해와 백도훈의 관계는 물론 그녀가 지금껏 이룬 모든 것들을 물거품으로 만들 수 있을 것이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진실을 밝혀내어 그녀로 하여금 그 죗값을 치르도록 하는 것만으로는 성에 차지 않는다. 더 고통스러워야 한다. 한 순간에 파멸과 더불어 죄의 댓가를 치르도록 하기보다 사실을 감추어서라도 그녀가 더 높은 곳으로 올라가 떨어지는 절망을 맛보기를 기대한다. 끝이 없이 막다른 곳까지 달려가려 한다.

 

얼핏 치졸해 보이는 이유일 것이다. 그는 단지 분풀이를 하려 하고 있다. 주다해의 죄에 대해 댓가를 치르도록 처벌하고 응징하려는 것이 아니라 주다해 개인에게 자신의 감정을 일방적으로 풀어내려 하고 있었다. 단지 주다해가 미울 뿐이다. 주다해가 원망스러울 뿐이다. 분노에는 끝에 있지만 증오에는 끝에 없다. 그래서 그의 미움이 이유를 만들어낸다. 백도경에게 들려준, 그리고 홍안심과 양태배에게 들려주었던 그 이야기들이다. 주다해는 이럴 것이라는. 그것이 그의 어설픈 복수극을 정당화시켜준다. 하류에게 있어 주다해란 단지 그의 머릿속에서 이미지화된 복수의 '대상'에 불과했던 것이다. 대상으로써 그녀는 이상화된다. 악녀라고 하는 이상의 이미지가 그녀를 정의하고 만다.

 

바로 이것이 필자가 드라마를 불편하게 여기는 이유이며 그럼에도 시청률이 높게 나올 수 있는 이유일 것이다. 필자는 그다지 주다해를 용서못할 악녀라 여기지 않는다. 누구나 죄는 지을 수 있다. 누구나 한 순간 유혹에 넘어감으로써 너무나 쉽게 죄를 범하고는 한다. 그 의도를 본다. 그 동기를 본다. 더구나 그 과정마저 사실상 악의라기에는 너무한 오해들이 그 사이에는 존재한다. 하지만 단지 결과만 놓고 본다면 그녀는 그 모든 것들의 원인이며 결론이다. 그녀를 응징한다면 모든 문제는 해결될 것이다. 설사 그녀를 파멸로 몰아넣고 심지어 죽음에 이르게 하더라도 결국 해결되는 것은 아무것도 없을 것이다. 단지 감정의 배설일 뿐. 필자의 입장이다. 죄가 없는 단지 사람에 대한 응징이란 그렇게 허무할 정도로 말초적이다.

 

어떤 의미도 찾지 못한다. 그나마 주다해가 죄를 짓기까지의 과정에서는 보편적인 어떤 원리나 현상들을 찾아볼 수 있었다. 인간이라고 하는 보편과 드라마과 서로 만나게 된다. 그러나 주다해에 대한 하류의 복수가 주를 이루고부터는 그것은 단지 하류 개인의 아집이며 편견이며 독선에 불과할 뿐이다. 하류 개인의 감정에 대해 필자가 굳이 동참해주어야 할 이유가 어디에 있는가. 사변적이고 개별적이고 독립적이다.

 

이성이 앞선 탓이다. 하류에게 공감하기보다 그 이유를 찾는다. 하류의 입장에서 함께 주다해를 미워하고 원망하기보다 제 3자의 입장에서 두 사람을 모두 헤아리려 한다. 주다해를 이해하게 된 것이 하류에 공감하는 것을 막는 이유가 된다. 역시 드라마든 소설이든 등장인물에 이입하여 동의아래 즐기는 것이 가장 좋다. 그러지 못하는 것이 필자를 안타깝게 만든다.

 

아쉬운 부분이다. 초반은 좋았다. 주다해가 죄를 짓기까지는. 의도하지 않고서도 죄를 저지르고 죄인이 되고 마는 주다해와, 그로 인해 더욱 궁지로 내몰리는 악연에 대해서도. 인간은 무엇으로 죄를 짓게 되는가? 무엇으로 그 죄의 댓가를 치를 수 있는가? 주다해가 죽으면 모든 것들은 해결되는 것일까? 아니라고 자신있게 말할 수 있다. 죽은 시신에도 찾아가 치을 뱉는다. 미움이란 끝이 없는 감정이다. 그는 분노하는 것이 아니라 미워하고 있다.

 

거친 드라마다. 상당히 질척거리는 원초적 감정이 있는 드라마다. 그 감정이 사람들을 이입하게끔 만든다. 그것이 오히려 거리를 두게 만들기도 한다. 그의 복수는 과연 정당한가? 답이 한가지가 아니라는 것이 드라마의 명쾌함을 덜어뜨린다. 다만 무척 쉽다. 이유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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