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능

불후의 명곡2 - 타고난 노래꾼이며 이야기꾼, 이문세를 만나다.

까칠부 2013. 4. 28. 08:41

어느 허름한 선술집에서 음유시인이 손님들에게 인사를 한다.

 

"이것은 아주 먼 나라에서 있었던 어느 슬픈 연인들의 이야기입니다."

 

발라드란 곧 서사였다. 서정이 주관이라면 서사는 객관이다. 있는 그대로의 사실이다. 그렇게 전제한다. 서정의 주관적 감정이 서사의 객관적 사실 위로 흐른다. 마치 자기 이야기처럼, 그러나 그것은 전혀 타인의 이야기를 담고 있었다. 음유시인은 울지만 그것은 음유시인 자신의 울음이 아닌 알지 못하는 먼 누군가의 울음일 것이다. 어쩌면 자신의 울음이기도 하다.

 

이영훈의 멜로디는 유장하다. 그러면서도 가사는 또한 감상적이다. 문득 떠오르는 주관을 넘어선 직관의 감성이다. 자칫 지나치게 주관적으로 흘러 신파로 들릴 위험이 있다. 아니면 마치 강물처럼 끊이지 않고 흐르는 멜로디가 지루하게 들릴 가능성도 있을 것이다. 대중가요란 서사 가운데서도 드라마다. 보다 통속적이고 대중적인 드라마야 말로 대중가요라 할 것이다. 아마 이문세 자신도 어느 인터뷰에서 그런 점을 지적하고 있었을 것이다. 살짝 스타카토로 끊어서 부르는 이문세만의 창법은 그렇게 만들어졌다. 유유한 흐름에 변화를 준다.

 

이문세의 노래가 특별한 이유다. 이영훈이 쓰고 이문세가 부른다. 이영훈이 노래를 만들고 이문세가 그것을 완성한다. 이문세가 가수로서뿐만 아니라 MC나 DJ로서도 크게 평가받는 이유일 것이다. 적절히 스타카토로 흐름을 끊어준다. 넘치지 않도록 끊어 조율하면서 그 안에 더 큰 격정을 담아낸다. 그것은 마치 트로트에서의 흔히 꺾기라 부르는 넘기는 소리와도 닮아 있었다. 하지만 훨씬 세련되면서도 단호하게 끊어주는 이문세만의 소리는 노래가 전하는 메시지를 보다 정제하여 객관화된 서사로써 대중에 전달하고 있었다. 자신의 이야기지만 마치 다른 누군가의 이야기처럼. 누군가의 이야기를 있는 그대로 옮겨놓듯이. 그리고 그것은 청자 자신의 이야기처럼 객관화된 서사로써 들리게 된다. 철저하게 조율된 감정의 여백에 청자의 감정이 자연스레 깃들게 되는 것이다. 자기의 이야기처럼.

 

이문세는 타고난 노래꾼이지만 그러면서 또한 타고난 이야기꾼이기도 하다. 끊어야 하는 곳을 안다. 어디서 끊어야 하고 어디서 이어야 하는지, 어디서 살려야 하고 어디서는 사소하게 지나치면 되는 것인지. 적절한 긴장과 적당한 이완으로 청자로 하여금 자연스럽게 자신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고 그 안에 몰입하도록 만든다. 이야기하듯 부른다. 그 말이 가장 잘 어울릴 것이다. 대한민국 발라드의 전형을 완성했다. 발라드의 원래 뜻을 돌이켜 본다. 개인의 주관적 감정이 객관적 서사로서 정제되어 청자 자신의 이야기로 들린다. 유려하고 간결하지만 결코 쉽지 않은 그의 노래는 그렇게 완성된다. 이문세의 노래가 어렵다고 말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노래를 하기는 쉽지만 이야기에 공감하도록 만들기는 쉽지 않다.

 

아마 그같은 이문세의 노래가 갖는 특징들을 가장 확실하게 확인할 수 있었던 계기가 바로 이번의 <불후의 명곡2>였을 것이다. 물론 트랜드가 바뀐 것도 있을 것이다. 최대한 객관화하여 담담하게 절제된 감정을 전달하던 과거에 비해 최근의 대중가요는 특히 알앤비 등의 영향으로 보다 직설적으로 자신의 감정을 호소하는 경향을 띄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그렇더라도 이영훈이 쓴 원곡의 멜로디부터가 처절하기까지 한 슬픔을 담아내고 있지 않은가 말이다. 가사 또한 슬프다. 그대로 멜로디와 가사를 따라가다 보면 넘치기 쉽다. 실제 <불후의 명곡2>의 무대들이 그렇게 하나같이 넘쳐흐르고 있었다. 때로 너무 넘쳐서 부담스러울 정도였다.

 

첫순서로 무대에 오른 아이투아이의 나래부터가 넘치고 있었다. 자신을 비극의 주인공으로 놓는다. 그런 자신을 주인공 삼아 한 편의 슬픈 사랑이야기를 써낸다. 슬픈 것은 자신인데 그런 슬픔조차도 대상화하여 지켜보고 있는 것 역시 자기 자신일 것이다. 나래가 불렀던 '나는 아직 모르잖아요'나 허각이 부른 '사랑이 지나가면' 역시 마찬가지였다. 오히려 그것이 더 슬프다. 자신의 슬픔마저도 대상화하여 그 슬픔에 도취되고 만다. 그런데 그것이 자기의 이야기가 된다. 자기의 슬픔이 되고 자기의 고백이 된다. 대상없는 독백이던 것이 누군가를 향한 하소연이 되어버리고 만다. 그것을 청자는 듣고 있어야 한다. 의도하여 경연을 위해 넘치고자 했던 나래에 비해 오히려 최대한 절제하여 원곡의 느낌을 살리고자 했던 허각의 넘침이 의미있게 들리는 이유다. 세상에 이문세는 둘일 수 없다.

 

박재범이 부른 '붉은 노을'은 이문세의 말처럼 심장이 뜨거워지는 무대였을 것이다. 신나고 흥겨웠다. 절로 들뜨게 만드는 무대였다. 다만 박재범 자신의 목소리가 그 신명을 뚫고 들리지 못한 것은 아쉬운 점이라 할 수 있었다. 삼켜져 버리고 말았다. 전혀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들리지 않고 있었다. 편곡도 신나고, 무대위에서의 퍼포먼스도 멋드러지는데, 그러나 정작 가수가 어떤 이야기를 들려주고자 하는지 청자의 입장에서 전혀 알아들을 수 없었다. 그냥 신나게 뛰어놀고 만다. 그런 의도였을수도 있지만 그것은 노래가 아닐 것이다. 노래와 랩과 퍼포먼스가 어우러져 하나의 일관된 서사를 만든다. 박재범의 무대가 보여주던 그같은 완성된 지향점이 이번에는 전혀 보이지 않았다. 어쩔 수 없었다. 노래와 퍼포먼스는 썩 훌륭했다.

 

이정이 부른 '그녀의 웃음소리 뿐'은 오히려 박재범의 무대보다 더 퍼포먼스에 가깝게 들렸다. 묘기를 보는 것 같았다. 노래라기보다는 데몬스트레이션에 가까웠다. 이만큼 부른다. 이렇게까지 부를 수 있다. 이문세도 그 점을 지적하고 있었을 것이다. 경연을 위해 그에 맞게 편곡해 불렀다. 경연에서 이기기 위해 가장 확실한 방법을 선택했다. 듣는 이를 깜짝 놀라게 하는 부담스러울 정도로 과한 감정과 기교와 성량이 노래가 갖는 이야기마저 무시한 채 윽박지르듯 들리고 있었을 것이다. 과연 노랫속 그녀에게 이정은 화나있는 것인가, 아니면 자신의 노래를 듣고 있는 청자에게 화가 나 있는 것인가. 화가 난 이정이 무섭기까지 하다.

 

정성화의 '빗속에서'는 노래를 잘 부른다고 뮤지컬배우가 곧 가수가 될 수 있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보여주었을 것이다. 이문세가 부른 '빗속에서'는 처음부터 끝까지가 하나의 완결된 드라마였다. 하나의 완결된 이야기가 하나의 노래를 통해 완전하게 청자에게 들려지고 있었을 것이다. 그에 비하면 정성화의 '빗속에서'는 한 편의 완성된 뮤지컬에서 하나의 장면만을 따로 떼어놓은 듯한 느낌이었다. 무언가 감정은 넘치는데 그것이 무엇인지 분명하게 들리지 않는다. 분명 가수 자신은 울고 있는데 그 이유가 명확하게 들리지 않고 있다. 역시 이문세는 대단하다. 다시 이문세가 부른 '빗속에서'를 찾아듣게 된다.

 

시대의 변화이기도 할 것이고, 가수마다 다른 스타일이기도 할 것이다. 그 또한 그대로 즐길 수 있다는 것이 선배된 입장에서 갖는 여유이고 관용일 것이다. 대중은 그보다 더 편협하고 이기적이다. 굳이 이문세와 비교하여 그보다 낫거나 최소한 그와 견줄 수 있는 가치를 보여줄 수 있기를 기대한다. 순수하게 존경하는 선배를 위해 그의 노래를 재해석하여 함께 즐기는 축제라 여길 수 있었다면 더 즐거울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러기에는 이문세라는 가수와 함께 해 온 지난 시간들이 너무 아쉽기만 하다. 필자가 지나온 시간들 가운데 이문세라고 하는 가수가 차지하는 시간들이 너무 크고 너무 짙다.

 

후배들과 함께한 '이 세상 살아가다 보면'의 무대는 이번주 <불후의 명곡2>의 백미였을 것이다. 선배와 후배가 함께 자기만의 개성으로 무대에서 하나로 어우러진다. 각자의 개성이 드러나면서도 함께하는 어우러짐이 흥겹고 정겹기까지 했다. 그것을 다섯으로 나눴다. 다음주 2부로노 나뉘어져 있다. 하나하나의 조각은 신나기도 하고 아쉽기도 했지만 전체가 가리키는 이야기는 또한 하나의 음악이 되어 일관되게 들려온다. 이문세 자신의 말처럼 선후배가 함께하는 계모임과도 같다. 이렇게 모일 기회도 흔치 않다. 후배들을 위해 기꺼이 무대에서 망가져줄 수 있는 이문세의 넉넉함이 차라리 부럽기조차 하다. 저들은 저와 같이 크고 깊은 선배와 같은 시간을 보내고 있다. 질투가 생길 정도다.

 

물론 역시 좋은 무대들이었을 것이다. 비교대상이 안좋았다. 이문세란 아직 그들 젊은 가수들에게는 버겁기만 한 이름이었을 것이다. 이문세가 둘일 수는 없다. 그래도 이문세란 한 사람 뿐이다. 그가 아직 현역이라는 사실이 축복처럼 다가온다. 우리는 운이 좋다. 행복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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