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

직장의 신 - 계약직의 현실, 정주리를 지킬 수 있겠습니까?

까칠부 2013. 5. 8. 08:36

이래서 내가 무정한(이희준 분)을 처음부터 마음에 들어하지 않았던 것이다. 리더란 정의로운 사람이 아닌 정의를 실천할 수 있는 사람이다. 정의를 수단이 아닌 목적으로 삼을 수 있는 사람이고, 그것을 현실에서 실현할 수 있는 역량을 갖춘 사람이다. 계약직인 정주리(정유미 분)를 지켜주고 싶었는가? 그랬다면 그를 위한 면밀한 계획과 실천이 필요했다.

 

드라마의 나레이션에서도 이미 그와 같이 말하고 있었다. 한국사회의 많은 구성원들이 오로지 정규직만을 꿈꾸고 있다. 모두가 부러워하는 번듯한 직장에 정규직으로 취직하기 위해서 지금도 많은 취업준비생들이 시간을 쪼개가며 전력을 투구하는 중이다. 필요한 스펙을 쌓고, 필기와 면접을 위해 사전에 정보를 수집해서 준비를 철저히하고, 무엇보다 아주 어릴 적부터 사회와 기업이 요구하는 학력과 학벌을 갖추기 위해 자신마저 잊은 채 노력에 또 노력을 기울여 왔다. 그런데 누군가는 정규직인데 다른 누군가는 비정규직이다.

 

즉 모두가 정규직을 바라고 있는데 누군가는 정규직이 되었고 누군가는 정규직이 되지 못했다. 모두가 정규직을 목표로 하고 있다면 정규직으로 취직한 누군가는 목적한 바를 이룬 승자일 것이고, 정규직이 되지 못한 나머지는 그들과의 경쟁에서 패배하여 목적한 바를 이루지 못한 패자로 남게 될 것이다. 다시 말해 비정규직이란 정규직이 되지 못한 말 그대로 나머지인 셈이다. 여전히 정규직을 목표로 하며 자신들의 뒤를 쫓는 낙오자인 셈이다. 과연 그런 비정규계약직과 정규직인 자신을 동등한 존재로 여겨야 하는 것일까?

 

그동안의 자신이 자신을 위해 들인 노력과 시간들에 대한 자부심이기도 할 것이다. 그만한 실력과 자격을 갖추었다는데 대한 만족이기도 할 것이다. 그에 대한 보상을 받고 싶어한다. 최소한 자신들은 자신들과는 다른 처지의 저들과는 다른 존재일 것이다. 도덕적인 의미까지 부여한다. 그만한 능력을 갖추었고, 그에 어울리는 최선의 노력을 기울여 왔었다. 만일 저들이 자신과 같은 능력과 자신과 같은 성실함과 인내를 갖추고 있었다면 지금 자신의 자리는 다름아닌 저들의 자리가 되었을 것이다. 그것은 그들의 무능과 나태와 나약함 때문이다. 그들에게는 자격이 없다. 오로지 자신에게만 자격이 있다.

 

지금도 기억한다. 몇 년 전이었을 것이다.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권리를 주장하며 파업을 하는데 누군가 한심하다는 듯 그리 말하는 것을 들은 적이 있었다.

 

"그러길래 학교 다닐때 공부를 열심히 하지."

 

또 누군가는 이렇게도 말하고 있었다.

 

"나 또한 비정규직이었지만 열심히 노력해서 정규직이 될 수 있었다. 차라리 파업할 시간에 정규직이 될 수 있도록 자신을 위해 투자하는 쪽이 더 현명할 것이다."

 

그런데 과연 자신들과 같은 정규직도 아니고 비정규직이, 그것도 이제 갓 1개월된 신입 계약직이 자신들을 누르고 사내공모전에서 우승을 차지한다고 생각해 보라. 자신들을 누르고 우승을 차지한 1개월짜리 햇병아리 계약직의 아이디어를 쫓아 자신들이 그것을 추진해야만 한다. 경영진의 입장에서도 정규직은 시험과 면접을 통해 자신들이 선택한 한식구일 테지만 계약직은 어디까지나 계약에 의해 일정기간 필요한 업무를 봐주는 외부인에 불과하다. 실제 정주리의 경우도 일은 Y장에서 하고 있지만 소속은 엄연히 '파견의 품격'이라는 이름의 계약직 파견회사였다. 자신들이 추진한 사내공모전에서 한식구가 아닌 남이 우승을 차지한다. 자존심이 상할 수밖에 없다. 그것은 차라리 굴욕이다.

 

계약직은 계약기간이 끝나면 떠나야 한다. 계약을 연장하더라도 결국은 계약이 끝나는 순간 전혀 상관없는 남이 될 것을 항상 전제하고 있다. 그러나 정규직은 다르다. 충분한 실적과 경험을 쌓으면 장차 승진해서 관리자가 되고 임원이 되어 회사의 미래를 책임지게 될 '인재'들일 것이다. 언제 계약이 만료되어 회사를 떠나게 될 계약직과 장차 회사와 운명을 함께할 정규직 가운데 회사의 입장에서 누구를 우선해야 할까? 계약직이 정규직을 누르고 공모전에서 아이디어가 채택될지도 모르는 상황이 되었는데 그것을 과연 좋게만 받아들일 수 있을까? 그래서 정규직이고 가족같은 직장인 것이다.

 

그것을 장규직(오지호 분)은 알고 있었다. 미스김(김혜수 분) 역시 알고 있었다. 정유미가 싫어서가 아니었다. 계약직이라고 정유미를 무시해서 그런 것도 아니었다. 미스김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것은 단지 현실이었다. 그것은 장규직이나 미스김과 같은 어느 한 개인이 감히 어찌할 수 없는 이미 존재하는 현실이었다. 부정해서는 안된다. 그렇다면 차라리 그같은 현실을 받아들이고 적극적으로 이용해야 한다. 그래서 미스김은 무정한에게 정유미의 기획안을 반드시 통과시키고 싶느냐고 물었고 대답을 듣고는 무정한의 이름으로 기획안을 올렸던 것이었다.

 

그것이 옳다. 진정 정유미를 위하려 했다면 먼저 기획안을 자기 이름으로 통과시키고 일단 그것을 실적으로 만든 다음 정유미의 역할에 대해 적당한 위치에 있는 사람에게 알리는 쪽이 현명했다. 이만한 능력과 검증된 실적을 보인 계약직이 있으니 계약을 연장하거나 가능하다면 정규직으로 전환하는 것도 한 번 고려해 달라. 무정한의 이름으로 성공한 기획안이 황갑득(김응수 분) 부장의 실적이 된다면 역시 황갑득 부장을 통해서도 정유미를 위해 여러가지 제안을 해 볼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이 정유미를 지키는 길이었다. 모두가 알고 있는 사실을 자기만의 정의감에 도취된 무정한만 모르고 있었다. 아니 애써 부정하려 하고 있었다.

 

정규직과 비정규직은 같지 않다. 정규직과 계약직은 분명 다르다. 단지 다른 정도가 아니다. 인간은 평등하지만 정규직과 비정규직은 평등하지 않다. 정규직과 계약직은 결코 평등할 수 없다. 환경이 그렇게 만든다. 여건이 그렇게 강요한다. 그것이 현실이다. 이상을 강요하기에는 무정한의 지금 위치는 아직 미미하기만 하다. 현실을 모른다. 자신이 속한 회사의 현실도, 자신이 그토록 위하고자 하는 비정규직의 현실도. 그 결과가 정유미의 계약해지다. 그나마 계약해지만큼은 피하고자 황갑득도 무정한에게 정유미가 아닌 무정한의 이름으로 기획안을 내라 제안했던 것이지만 그조차도 무정한이 거절해버린 이상 더 이상 다른 방법이 없었다. 회사를 위해서 일개 계약직에 불과한 정유미가 희생해야 한다. 그것이 계약직이다.

 

계약직의 현실일 것이다. 어차피 계약기간이 끝나면 회사를 떠나게 될 계약직의 업무따위 실적으로 남을 까닭이 없다. 계약기간이 끝나고 나면 그 뒤의 일은 계약직과는 전혀 상관없는 일이 되어 버린다. 계약직도 알고, 기업도 안다. 그래서 사무실의 적지 않은 계약직 가운데 기획안을 낸 것은 정유미 단 한 사람이었다. 정유미 말고 계약직 가운데 기획안을 낸 이가 단 한 사람도 없었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럼에도 단지 자신의 선의에 도취된 무정한의 무모함이 정유미에게 헛된 기대만 심어주고 크나큰 좌절만 겪게 만들고 말았다. 순진하고 무책임하다.

  

역설일 것이다. 정유미의 어머니가 싸 온 도시락과 그 도시락을 나눠먹던 훈훈하던 시간들은. 정규직이니 계약직이니 그런 것이 무슨 상관이냐며 모두가 자식같다던 어머니의 말은 이내 처절한 현실이 되어 돌아오고 만다. 정규직과 계약직은 다르다. 정규직과 계약직은 결코 같을 수 없다. 그것을 믿었던 무정한은 오히려 큰 실수를 저지르고 만다. 선의에 의한 것이었지만 서툴렀고 선의로써 돌아오지 않았다. 정유미는 마음에 품고 있는 그를 원망하게 될까? 아니면 그녀 또한 선한 표정을 지은 채 그런 현실을 받아들이고 말까?

 

참 잔인하다. 원작에도 없던 장면이다. 이렇게까지 처절하지 않았다. 이렇게까지 참혹하지 않았다. 그래도 여유가 있었다. 그래도 낭만이 있었다. 기대도 희망도 있었다. 그러나 <직장의 신>은 다르다. 어디에도 희망따위는 없다고 말한다. 그런 건 꿈이라고, 헛된 판타지라고 꾸짖고 만다. 가장 허구적인 미스김의 존재가 그런 절망 속에 사실적이 되어 버린다.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이 비참한 현실을 견뎌낼 수 없다. 미스김이니까 가능하다. 히어로란 현실에서 불가능한 일을 해내는 존재일 것이다.

 

정유미는 과연 어떻게 될까? 다행스러운 것은 이것은 드라마라는 사실이다. 그리고 정유미의 드라마에서의 비중 또한 결코 작지 않을 것이다. 생활비도 아슬아슬해서 도시락을 싸가려는데 정작 냉장고를 여니 휑하기만 할 뿐이다. 도시락을 먹으려 해도 먹을 장소가 없어 결국 장규직에 의해 그마저 포기해야 하는 상황에 몰리고 만다. 어머니가 선물한 가방이 겨우 싸들고간 반찬국물로 더럽혀지는 모습도 보고 만다. 이보다 불쌍한 캐릭터가 어디 있을까? 그나마 기획안이라도 내놓았더니만 무정한의 어설픈 선의가 그녀의 일자리마저 앗아가고 만다. 그야말로 비정규직의 현실을 압축해 놓은 듯한 캐릭터랄까? 그녀의 반대편에 미스김이라는 판타지가 있어 더욱 처절하게 대비되고 만다. 한 구석이 눈물나도록 아릿해 온다.

 

현실은 꿈이 아니다. 다행히 드라마는 꿈일 수 있을 것이다. 드라마에서라면 꿈도 현실이 될 수 있다. 정유미의 꿈은 끝나지 않았다. 반전을 기대한다. 드라마에서라도 불행의 시에게 스토킹당하는 듯한 정유미에게 희망이 깃들기를. 무정한과 미스김이 마주할 시간도 기대된다. 과거의 시간이 다시 현재로 흐른다. 무겁다. 그런데 가볍다. 숨을 고른다. 중독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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