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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혼자 산다 - 가족, 집이 있음에도 집으로 돌아가는 이유

까칠부 2013. 5. 18. 10:01

흔히 집이라 할 때 두 가지 다른 뜻을 하나로 쓴다. 하나는 물리적 공간으로서의 집이다. 지금 살고 있는 바로 그곳이다. 그리고 하나가 정서적 공간으로서의 집이다. 살고자 하는 바로 그곳일 것이다. 대개 둘은 하나지만 때로 둘이 서로 분리되어 있는 경우가 있다. 굳이 지금 살고 있는 집을 놔두고 집으로 돌아간다 말하는 것이 그것이다.


가족이란 한 집에 같이 사는 사람을 일컫는 것이었다. 혈연이 아니어도 같은 지붕 아래 함께 함께 먹고 잔다면 그들은 충분히 가족일 수 있었다. 다시 말해 가족이 머무는 곳이면 곧 그곳이 자신의 집이기도 한 것이다. 당장 지금 자신이 있는 그곳에 함께 머무는 다른 가족이 없다면 가족이 있는 그곳이야 말로 자신의 집일 수 있는 것이다. 지금 집에서 살고 있지만 그렇기 때문에 가족이 있는 집으로 돌아간다.


그야말로 혼자사는 남자들의 비참하도록 쓸쓸한 현실을 단적으로 나타내는 한 마디일 것이다. 집이 있는데도 집으로 돌아가야 한다. 지금 집에서 살고 있지만 정작 돌아가야 할 집이 따로 있다. 벌써 가정을 이루었거나, 혹은 아직 가정을 이루지 못한 남자들에게 그곳은 가장 가까운 누군가가 있는 그리운 곳일 것이다. 아무리 나이를 먹어도 결국은 돌아가야 할 곳은 부모님이 계시는 바로 그곳일 터다. 아내와 자식이 곁에 있다면 그곳이 곧 자신의 집이고 부모님의 집은 부모님의 집일 테지만, 그러나 아내와 자식이 곁에 없기에 그리운 그곳을 찾는다. 이성재는 아예 부모를 자신의 집으로 모시고 있었다.


참 그리운 이름일 것이다. 어머니. 그리고 무척이나 부담스러운 이름일 것이다. 아버지. 사실 아들이 아버지와 친해지기란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아버지에게 아들이란 자기의 대신이다. 아들에게 아버지란 자신의 미래다. 아버지는 아들에게 자기가 이루지 못한 과거의 미련까지 대신 맡기려 한다. 아들은 아버지의 기대를 충족시키지 못하는 자신에 대해 무력감과 죄책감을 갖는다. 아들은 아버지가 무섭고 아버지는 그런 아들이 안쓰럽다. 엄한 듯 아들을 걱정하는 이성재의 아버지나 그런 아버지를 어려워하면서도 인정받고 싶어하는 이성재의 모습이 딱 많은 아들들의 모습일 것이다. 너무 가까워서 또한 너무나도 엇갈리기 쉬운 관계라고나 할까? 


그에 비하면 어머니는 아들에게 딱히 기대하는 것이 없다. 어떤 전제를 가지고 조건을 걸어 대하는 것이 아닌 무조건적인 희생과 헌신이 가능한 것은 그래서다. 어떻게 되어도 아들은 아들이다. 어떤 모습이 되어 있어도 아들은 아들이다. 그리 속을 썩였다는데 어머니는 그새 다 잊으셨다 한다. 그제서야 예전에 그리도 속을 많이 썩였다며 지나간 이야기처럼 말한다. 그것은 아들에게 빚이 된다. 모든 아들은 어머니에게 빚쟁이다. 항상 가장 그립고 그래서 더 어려운 것이 어머니이기도 할 것이다. 어째서 어머니란 말만 들으면 눈물이 날까?


물에 내놓은 자식마냥 내내 데프콘을 걱정하던 어머니와 어느새 성공한 자식을 기꺼워하며 사랑스러워하는 아버지. 지난 고통스러웠던 시간마저 단지 자식이 성공한 지금에 기뻐할 뿐인 어머니. 그리고 자식을 사랑한다는 말조차 솔직하게 꺼내지 못하는 아버지까지. 어머니가 담근 조선간장을 받아가려는데 조금이라도 더 챙겨주려 항아리가 다 비려 하고 있었다. 그래서 자식들은 집으로 돌아가려 하는구나. 해가 저물면 아이들은 동무들을 뒤로하고 어머니가 기다리는 집으로 달려가고는 했었다. 이제는 그들 자신이 가족을 기다리며 맞아주어야 하는 가장이 되어 있기도 하다. 아니 그래서 더 애닲고 간절한 것이 자식의 마음일 것이다.


사실 조금은 작위적인 느낌도 있었다. 자신의 의지가 아닌 방송을 위해 일부러 찾아간 듯한 느낌이었다고나 할까? 자세한 사정은 모른다. 방송이 갖는 한계이기도 할 것이다. 방송이라고 하는 의도의 개입을 항상 염두에 두지 않으면 안된다. 그렇더라도 결국에 부모와 자식이란, 그리고 자식이 돌아갈 집이란 너무나 당연하지 않은가. 아무리 가장이고 장성한 자식을 둔 부모라 할지라도 자식은 언제까지나 부모 앞에서 자식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아버지에게 인정받고 싶어 칭얼거리는 어린아이같은 이성재의 유치함이 바로 부모와 자식의 모습인 것이다. 아무리 나이를 머어도 자식은 어디까지나 부모 앞에서 아이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조금은 슬프기도 했었다. 지금 자신이 살고 있는 집이 따로 있음에도 여전히 부모로부터 떨어져 나가 사는 처지인 것이다. 집으로 돌아가야 한다. 언제고 집으로 돌아가 뵙고 인사를 드려야 한다. 집은 여기에 있지만 그곳에도 있다. 지금 여기에서 살고 있지만 그곳으로 돌아가야 한다. 그러나 부모님은 언제까지고 기다려주지 않는다. 늦었음을 한탄한다. 그래서 돌아가야 한다 말하는 것일 게다. 그곳이 바로 자신의 자리이기에. 이번에는 제발 늦지 않기를.


평범하지만 그 꾸밈없는 진솔한 이야기가 가슴을 후빈다. 굳이 방송이어서가 아니라 서로를 생각하는 가족의 마음이 그대로 TV를 통해 전달되고 있었다. 아무렇지 않은 대화 속에. 어색한 말과 몸짓들 가운데. 그리고 아련한 그리움이 있었다. 늘 보아도 그립다. 그리움이란 시간과 공간의 저 너머 사람과 사람 사이에 머무는 모양이다. 아팠다. 내내 생각에 잠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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