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70년대 개발독재에 의한 경제성장은 중산층의 성장과 더불어 어느새 아이들로 하여금 자기방과 자기만의 오디오기기를 가질 수 있도록 해 주었다. 자기만의 공간에서 자기만의 오디오기기로 자기만의 음악을 듣는다. 그것은 거실이나 안방에 놓여 있던 전축이나, 알지 못하는 사람들과도 함께 음악을 들어야 했던 음악다방과는 전혀 다른 세계였고 문화였다.
예나 지금이나 - 아니 모든 시대 모든 사회에서 젊은이들은 항상 자기도 모를 고민에 빠져 많은 시간을 보내게 된다. 그것은 가정이라는 울타리를 벗어나 장차 더 넓은 세계로 나가야 하는 젊은이들에게 있어 하나의 특권과도 같은 본능이라 할 수 있었다. 자기란 누구인가? 나란 무엇인가? 그리고 자신이 속한 - 혹은 장차 자기가 속하게 될 이 사회와 세상이란 과연 어떠한가? 고민하고 또 고민하고 그 답을 찾아간다. 그같은 과정을 거치지 않고서는 아이는 언제까지고 아이로 남을 수밖에 없다.
문제는 과연 그 답을 누구로부터 구할 것인가? 그래서 들국화는 '그것만이 내 세상'이라며 홀로 외치고 있었던 것이다. 아직 세상을 몰라서 그러는 것이라며 자기를 무시하려고만 하는 어른들은 아닐 것이다. 분명 세상은 잘못되었는데. 이 사회는 수많은 모순들로 가득차 있는데. 그런데도 네가 어려서 아직 몰라 그러는 것이니 그저 시키는대로 따르라. 과거에는 그것으로도 충분했지만 더 넓어진 세상에서 아이들은 자신과 같은 다른 고민들과 답들을 찾아내게 된다. 어른은 권위를 잃고 아이들은 그렇게 자기만의 세계를 찾아간다. 설사 그 답이 잘못된 답이고, 그로 인해 많은 실수를 저지르게 되더라도, 그조차 온전히 받아들이고 나가고자 한다.
물론 이전에도 젊은이들을 대상으로 한 문화가 아주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러한 기존의 문화들에 있어 대상이 되는 젊은이란 기성세대가 보는 젊은이였다. 아니면 혹은 또래에 의해 생산되었더라도 지나칠 정도로 사변적이거나 주관적인 개인의 이야기로 흐르는 경우가 많았다. 자신이란 바로 보편화된 자신이다. 독립된 주체로서의 개인인 동시에 일반화된 객관적 대상으로서의 개인인 것이다. 한 마디로 우리다. 나를 정의하는 우리다. 무엇을 고민하고 무엇을 행동으로 옮겨야 하는가. 기성가요를 단지 보다 세련되게 포장해서 들려줄 뿐인 기존의 음악들과는 다른 새로운 음악이 그들에게는 필요했다.
키보이스나 사랑과 평화와 같은 당대 최고의 밴드들도 기성작곡가의 곡을 받아서 무대에서 연주하고 있었다. 라스트찬스는 최고의 명성을 누리고 있었음에도 아예 자기 이름으로 된 음반조차 남은 것이 거의 없다. 대학가요제등을 통해 데뷔한 많은 캠퍼스밴드들은 그러나 단지 사변적이고 주관적인 개인의 이야기들을 기성가요와 전혀 다르지 않은 멜로디에 담아 단지 밴드의 형식만을 빌어 들려주고 있었을 뿐이었다. 조용필도 윤수일도 혜은이도 젊은 음악을 하고는 있었지만 젊은 자신들만의 음악을 들려주는 이들은 아니었다. 누가 있을까?
그래서 들국화가 세상에 나오게 된 것이었다. 시대의 젊은이들의 고민과 요구를 담아서. 그것을 어느새 해외의 세련된 음악에 익숙해진 젊은 세대들의 눈높이에 맞춰서. 프로페셔널한 기술적 역량이 요구되던 클럽무대와 또래의 감성을 담아내던 대학가의 문화가 이들을 통해 하나가 되었다. 최고의 프로페셔널한 연주와 그러면서도 오히려 더 직설적으로 자신들의 이야기를 담아낸 그들의 한결 세련되어진 음악은 시대를 움직이기에 전혀 부족함이 없었다. 그것은 시대의 요구이기도 했다. 들국화의 음악은 그래서 음악적 완성도와 함께 그 시대성으로도 평가받는다. 새로운 시대를 여는 고고성이기도 했던 것이다.
아마 너무 시대를 앞서갔던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들국화의 신화는 고작 1집과 2집 두 장의 앨범을 끝으로 허무하게 마감되고 만다. 아니 1집에서의 차라리 기적과도 같은 완성도와는 달리 멤버교체와 팀의 두 기둥이던 최성원과 전인권의 갈등으로 인해 어수선하던 당시 분위기는 결국 이어진 2집에서 오히려 많이 퇴보한 듯한 아쉬운 모습으로 돌아오고 만다. 그나마도 2집을 끝으로 공식적으로 들국화라는 밴드는 해체되고 이후 최성원과 전인권, 주찬권이라는 개인으로 활동하게 된다. 아주 잠깐 들국화가 해체되고 지금은 고인이 된 허성욱과 전인권이 주축이되어 내놓은 '추억들국화'의 앨범이 들국화의 기억을 이어주고 있을 뿐이었다. 얼마나 반가운가. 긴 여행 끝에 그들 들국화가 다시 모이게 되었으니.
필자 역시 아직 어렸지만 그 세대 가운데 있었다. 라디오를 통해 들려오는 그 고고성에 어느새 매료되어 그 목소리를 닮고자 무던히도 노력하던 여러 꼬마들 가운데 하나였다. 아마 필자의 또래 가운데 전인권의 목소리를 아주 조금이라도 비슷하게 낼 수 있는 경우가 그래서 적지 않을 것이다. 전인권을 닮기 위해 그리도 전인권을 흉내내어 노래를 따라부르고 했었으니 말이다. 지금도 필자의 애창곡 가운데 들국화의 노래는 단연 첫손에 꼽힌다. 그것은 오히려 나이를 먹을수록 필자 자신의 노래가 되어가고 있었다.
전설이라는 말은 바로 이들을 위해 존재하는 말일 것이다. 들국화의 음악이야 말로 <불후의 명곡>일 것이고, 짧지만 들국화 이전과 이후로 시대를 나누었던 들국화 자신이야 말로 전설 그 자체일 것이다. 그동안 수없이 많은 '불후의 명곡'들이 있었고, '전설'들이 출연하고 있었지만 이들이야 말로 진정한 '불후의 명곡이고, '전설'들이지 않을까? 100회특집을 맞아 가장 어울리는 - 그리고 가장 의미있는 전설을 모시고 있었을 것이다. 가슴이 다 벅차온다.
하동균의 마음이 바로 필자의 마음일 것이다. 5년 넘게 방송출연을 않던 하동균이 오로지 들국화가 전설로 출연한다는 이유만으로 프로그램에 출연을 결심하고 있었다. 존경하는 들국화의 앞에서 들국화의 노래를 직접 불러 들려준다. 이보다 더 큰 영광이 어디있을까? 어째서 필자는 가수가 아닌 것인가? 다만 아쉽다면 지나치게 원곡자인 전인권을 의식한 탓인지 노래가 너무나 원곡의 그것과 닮아 있었다. 아마도 차이라면 고독초자 담담히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이던 80년대의 남자 전인권에 비해 고독을 쓸쓸해하던 2010년대의 남자라는 정도일까? 끝가지 관조를 잃지 않던 원곡에 비해 하동균의 노래는 마지막에 스스로 울음을 터뜨리고 있었다. 마지막의 애드립은 분명 고독에 지친 남자의 쓰라린 울음이었다.
JK김동욱의 노래를 들으면서는 차라리 성가를 듣는 듯한 경건함마저 느끼고 있었다. 세상을 도발하려는 듯 거칠게 내뿜던 원곡의 '그것만이 내 세상'에 비해 누군가에게 고백이라도 하려는 듯 정중하게 진심을 다해 부른다. 자기로부터 완결되는 포효가 아니라 바람이고 기대다. 이번에는 편곡의 방향을 잘못 선택한 듯 싶다. JK김동욱의 목소리는 언제 들어도 명품이다.
박재범은 확실히 타고난 엔터테이너다. 춤을 추면서 노래를 부른다. 퍼포먼스야 아이돌 출신 가운데서도 단연 첫손에 꼽히는 실력이다. 기술적인 부분은 부족할지 몰라도 감성적으로 표현하는 능력은 매우 탁월하다. 자기의 노래로 만든다. 자신의 노래를 섞어 부르는 장면에서 최성원은 웃음을 흘리고 만다. 자신들도 그랬다. 음악이란 자기주장이며 보다 첨예하고 솔직한 자기고백이다. 박재범에게 어울린다. 박재범이 부르는 '매일 그대와'는 지금이 옳다.
유미의 '세계로 가는 기차'는 원곡이 갖는 낙관과 희망찬 기대에 비해 현실의 절박함은 보다 처절하게 담아내고 있었을 것이다. 세계로 가는 것이 아닌 세계로 가야 하는 것이다. 가지 않으면 안되는 것이다. 그것만이 희망이다. 그래야지만이 기대도 할 수 있고 낙관도 할 수 있다. 온힘을 다해 노래를 부른다. 강약조절에 실패한 듯 보이는데 그것이 또 유미라는 가수와 어울린다. <불후의 명곡2>의 무대 가운데 유일하게 거꾸로 간다. 원곡보다 더 어둡고 그래서 처절하고 또 간절하다. 그래서 힘이 있고 설득력을 갖는다.
과연 정동하는 명불허전이라고 밖에는 말할 수 없을 것이다. '제발'이라는 제목 그대로다. 자포자기한 듯한 지친 목소리가 애원하듯 시작을 연다. 나른하다. 힘이 없다. 의지도 의욕도 없다. 이어지는 것은 분노. 닿지 않는 분노에 절망하고 좌절하며 체념하고 그리고 다시 원망하며 애원한다. 분노한다. 더 이상의 말이 필요없다. 우리에 갇힌 짐승은 잠시 더 이상의 희망이 없을 때 체념하여 주저앉았다가도 아주 작은 기회라도 온다면 그것을 놓치지 않고 필사적이 된다. 들국화의 그것과는 또다른 - 그러나 또 하나의 '제발'이었을까?
포맨의 '사랑일 뿐이야'는 어쩌면 감사였을 것이다. 헌사였을 것이다. 감격이다. 감동이다. 하기는 어머니란 아무리 감정이 넘쳐도 부족하기만 한 대상일 것이다. 원곡은 어쩌면 감탄이었을 것이다. 하나의 깨달음이다. 그리고 고백이다. 어머니라는 신앙에 대한 고백이다. 다르지만 충분히 감동적이다. 포맨의 스타일에는 전인권의 힘과는 다른 그들만의 개성이 어울린다. 슬픈 울부짖음조차 그것으로 끝나지 않게 하는 재주가 그들에게는 있다. 팀의 힘이다. 서로 다른 목소리와 색깔들이 전혀 다른 노래로 완성도를 높인다.
의도한 것인지는 모르지만 <나는 가수다> 출신 가수들과 그룹을 나눈 것은 탁월한 선택이었다. 의식적으로 경쟁을 시켜본다. <나는 가수다>와 한때 <나는 가수다>의 포맷을 표절했다고 비난을 들었던 <불후의 명곡2>와의 비교는 또다른 흥미의 요소가 된다. <불후의 명곡2>의 홈그라운드에서 <나는 가수다>에서 높은 성적을 거두었던 가수들이 들국화에 대한 헌정을 위해 함께 무대에 선다. 그 가치를 잊어서는 안된다.
그저 살아있는 것이 반가울 뿐이다. 건강한 것이 고맙다. 아직도 그들과 필자는 같은 시대에 같은 공간에서 호흡하며 살고 있다. 다시 들국화의 음악을 듣는다. 후배들의 음악을 음원으로 듣는다. 문희준의 진행은 이제 궤도에 올랐다. 조용한 하동균을 어느새 대기실의 가운데로 끌어들인다. 유쾌하게 웃는다. 기억이 현재가 되고 추억이 현실이 된다. 벌써 100회다. 축하한다. 기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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