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기는 인간으로서도, 여성으로서도, 그리고 변호사로서도 아직 장혜성(이보영 분)은 채 자라지 못한 아이와도 같을 것이다. 10년 전 그날 민준국(정웅인 분)이 그러하듯 장혜성의 시간도 멈춰 버렸다. 어떤 희망도 가질 수 없는 공포와 절망의 비관 속에 그녀는 그렇게 자신을 놓아 버렸다. 어떻게 되어도 상관없다. 자신이 왜 변호사가 되었는지도 그녀는 알지 못한다.
그런데 다시 박수하(이종석 분)를 만나고 악연이던 서도연(이다희 분)과 얽히게 되면서 멈췄던 그녀의 시간이 다시 흐르기 시작한다. 그때까지 장혜성에게는 단 한 사람 어머니 뿐이었다. 모두가 자신을 의심하는 가운데 어머니만은 자신을 믿어주었다. 인생에서 가장 비참하던 순간에 어머니만은 조건없이 자신의 편을 들어주고 있었다. 사나운 짐승에게 쫓기다 겨우 둥지로 돌아온 아기새마냥 그렇게 장혜성은 포근하고 든든한 어머니의 품에 숨은 채 응석을 부리려 한다. 자신의 두려움과 외로움을 감추기 위해. 자신의 좌절과 절망과 고통을 잊기 위해.
하지만 아니었다. 자신은 잊으려 했지만 박수하는 자신을 잊지 않고 있었다. 전적으로 믿고 기대 온다. 변호사라 불러준다. 변호사가 아니냐고 물어온다. 변호사로서 요구해 온다. 자신은 변호사였던가. 무엇보다 10년 전의 자신을 잊지 않고 지켜주겠다고 말하는 그 마음씀씀이가 고맙고 기특하다. 자신도 모르게 의지하게 된다. 이번 장필재-필승 형제의 사건에서도 박수하의 자신에 대한 믿음과 기대를 저버릴 수 없다고 하는 강박이 그녀로 하여금 변호사로서의 자신의 본분마저 잊은 무리수를 강행하는 이유가 되고 있었을 것이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박수하만큼은 실망시킬 수 없다. 기대받고 그 기대를 돌려주는 것이야 말로 성장의 첫걸음이다.
서도연의 경우는 또 다르다. 박수하의 경우 장혜성 자신이 먼저 잊었지만 서도연은 아니었다. 그럼에도 잊고 싶었다. 잊은 채 도망치고 싶었다. 부딪히고 싶지 않았다. 그것은 분노이고 원망이면서 또한 체념이고 좌절이었다. 차라리 포기하고 만다. 서도연 앞에서 비참해지고 싶지 않다. 서도연에게 비루한 자신의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다. 싸움에서 진 꼴사나운 모습을 보이고 굴욕을 당하느니 처음부터 싸움 자체를 않고 말겠다. 싸우지 않는다면 지지도 않는다. 그렇게 믿고 여기고 있었다. 박수하만 아니었다면.
깨닫고 말았다. 기만이었다. 지고 싶지 않은 것이 아니었다. 이기고 싶은 것이었다. 꼴사나운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아서가 아니었다. 당당해지고 싶어서였다. 오만할 정도로 당당하게 굽어보고 싶은 것이었다. 아직 끝나지 않았다. 10년 전 서도연과 장혜성 자신 사이에 있었던 그 일은 아직 진행형이다. 자신은 무고하다. 전혀 잘못한 것이 없다. 억울하게 범인으로 몰리고 당사자의 거짓증언으로 인해 학교에서 쫓겨나고 말았다. 진짜 범인이 따로 있다면 진실 역시 바로잡아야 한다. 그리고 그것은 당시 거짓말로 자신을 범인으로 확정지었던 서도연으로부터 시작되어야 할 것이다. 서도연의 속마음을 읽은 것이 장혜성의 억눌려 있던 야성을 일깨우고 만다. 그리고 그런 그녀의 등을 떠밀어 준 것이 다름아닌 그녀의 어머니였다.
어머니의 품에서 벗어나 세상으로 나온 그녀를 맞은 것은 거짓과 기만이 판치는 법정이었다. 모두는 자기의 이익을 위해 거짓말을 한다. 자신을 속이고 남을 속이고 모두를 속인다. 그런 가운데서도 변호사란 누군가의 편이 되어 그가 하는 말을 듣고 믿고 그를 위해 싸우지 않으면 안 되는 직업이다. 자신을 지키고 의뢰인을 지킨다. 법과 사회의 정의를 지키고 실현한다. 지켜야 하는 것이 있고 당연히 자신을 돕고 지키는 누군가도 있을 것이다. 결국은 관계다. 박수하와의 인연도, 서도연과의 악연도, 그리고 변호사로서의 그녀의 의무와 책임도. 변호사로서도 그녀는 홀로 서야하며 세상의 인정을 받아야 한다. 지금껏 전혀 신경쓰지 않고 있던 그런 것들이 이제는 너무나 절실하게 느껴진다. 사회인이 된다.
결국 그를 위한 과정일 것이다. 처음 고성빈의 사건을 맡을 때도 그녀는 변호사로서 아무런 자각도 의지도 보이지 않고 있었다. 의뢰인에게 유리하도록 법정에서 변호해야 한다는 기본적인 사실조차 망각하거나 아예 무시하고 있었다. 비록 동기는 불순하지만 그러던 변호사 장혜성이 마침내 검사와 맞서 의뢰인을 지켜내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모습은 변호사로서, 그리고 인간으로서 그녀의 성장을 보여주고 있었을 것이다. 처음으로 변호사로서 자각을 가지고, 인간으로서도 자신의 양심을 돌아볼 수 있게 되었다.
그래서 이번의 시련 역시 주어지게 된 것이었다. 첫승리에 들떠 있었다. 더구나 자신의 첫승리가 자칫 어긋날 뻔 했던 진실을 바로잡고, 억울하게 범죄자가 될 뻔 했던 피의자의 무고함을 밝혀낸 정의의 승리이기도 했다. 지나치게 좋은 경우였다. 변호사로서의 의무와 개인으로서의 양심이 아주 운좋게 합치될 수 있었다. 하지만 언제까지 운이 좋을 수만은 없다는 사실을 모두는 안다. 현실과 부딪히고 부대끼는 준비가 필요하다. 의뢰인이 실제 범죄를 저지른 진범임을 아는 상태에서 변호사로서 그를 변호하지 않으면 안된다. 개인으로서의 양심은 범죄자인 그를 징벌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지만, 변호사로서의 책임은 그럼에도 의뢰인을 위해 최선을 다해야 한다 말하고 있었다. 과연 자신의 선택은 무엇인가.
가장 우려한 장면이었다. 그러면서도 가장 마음놓이는 장면이었을 것이다. 결국 장혜성은 변호사로서의 책임보다 개인으로서의 양심을 우선해 선택하고 만다. 자신의 의뢰인임에도 진범인 그들의 범행을 밝히고 처벌받도록 하기 위해 검사와 짜고 그들을 옭아맬 함정을 준비한다. 단지 범죄자라는 이유만으로 변호사로서 법정에서 그들을 위해 변호해야 하는 책임을 외면한 것이다. 변호사가 주인공인 법정드라마에서 결코 나와서는 안되는 장면이 나오고 만 것이다. 결국 이렇게 기본조차 무시한 통속드라마로 끝나고 말 것인가.
하지만 신상덕(윤주상 분)이 있었다. 국선전담변호사로서 한참 선배이고 명성도 높으며 같은 사무실을 쓰고 있는 최고참이다. 장혜성이 보지 못한 것을 그는 볼 수 있다. 장혜성이 미처 헤아리지 못하는 것은 그는 헤아릴 수 있다. 변호사로서는 물론 인생의 선배로서 신상덕은 장혜성을 질타한다. 그녀가 보지 못한 것들에 대해서, 그녀가 헤아리지 못한 것들에 대해서도, 무엇보다 그녀가 가장 우선해야 할 가치와 책임에 대해서도 아프게 몰아세운다. 고민하게 만든다. 과연 자신은 옳았는가. 자신의 판단과 행동은 과연 옳았고 적절한 것이었는가.
누구나 실수는 한다. 잘못을 저지른다. 넘어지지 않고서는 걸을 수 없다. 떨어져보지 않고서는 올라갈 수 없다. 실수로부터 배운다. 잘못으로부터 반성하고 올바른 길을 찾는다. 변호사로서 한 단계 성장하기 위해서도, 인간으로서도 한 차원 더 성숙하기 위해서도, 그래서 장혜성은 고민해야 하고 자신과 갈등하지 않으면 안되는 것이다. 자신의 편을 들어주는 차관우의 말들이 고마우면서도 신상덕의 날카로운 말들이 자꾸 머릿속에 떠오른다. 만일 다시 그녀에게 그와 같은 상황이 벌어진다면 그때는 조금 더 신중하게 더 많은 것들을 고려하고 고민하며 다른 선택을 하게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차관우에게 어느새 먼저 데이트신청을 하는 모습처럼.
차관우에 대한 장혜성의 감정변화 또한 그래서 눈여겨 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처음에는 그저 낯설고 눈에 거슬리는 차관우가 못마땅할 뿐이었다. 어느새 차관우에 대해 호감을 가지게 되었을 때는 그런 자신의 감정이 어색하고 불편할 따름이었다. 그것이 과연 어떤 감정인지. 그리고 이제 다시 장혜성은 자신이 먼저 차관우에게 영화관 데이트를 신청하고 있었다. 그럼에도아직도 그녀는 자신의 감정이 이성에 대한 호감이라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으려 하고 있다. 차관우와 만나는 것이 설레고 기대되는데 그러나 단지 차관우에 대한 사과 겸 보답 차원이다. 그녀는 아직 이성이 낯설고 어색한 사춘기 소녀에 불과하다.
민준국은 어째서 박수하의 아버지를 죽이려 했던 것일까? 그리고 자신의 범행을 증언한 장혜성에 대해 어째서 그토록 집착하고 있는 것일까? 어떤 암시였을까? 박수하가 민준국의 전화번호가 적힌 종이를 구겨서 버리는 그 순간 민준국 역시 장혜성의 어머니가 싸준 생일음식을 화장실 변기에 버리고 있었다. 처음 장혜성의 어머니 어춘심(김해숙 분)이 전혀 신경도 쓰지 않고 있던 자신의 생일을 챙겨주려 하는 것을 보고 민준국이 보인 동요가 거짓이 아니었다면 민준국으로 하여금 그렇게 독하게 다짐하도록 만드는 어떤 이유가 분명 있었을 것이다. 박수하는 칼을 빼들고 민준국은 변기속의 음식들을 노려본다. 전혀 예상하지 못한 반전이 박수하와 시청자 모두를 충격에 빠뜨릴 수 있다.
물론 지적한 바와 같이 준비 없이 먼저 답부터 제시하고 과정을 재구성하는 과정에서의 허술함은 이번에도 여지없이 드러나고 있었다. 도대체 동생의 여자친구를 성폭행한 범인을 함께 모의해서 죽일 정도로 우애깊은 형제가 어떻게 보강증거라는 미끼에 저토록 한순간에 사람이 달라질 수 있는가. 그런 정도의 각오도 없이 형제가 함께 살인이라는 중범죄를 모의하고 실행에 옮겼다고 하는 자체가 납득이 되지 않는다. 두 사람으로 하여금 서로를 의심하지 않을 수 없도록 만드는 보다 완벽한 함정이 필요했다. 결론이 너무 급했다. 결국 사건의 진실 역시 신상덕의 연설 몇 마디로 쉽게 넘어가려는 안이함을 보이고 있었다. 메이지는 훌륭한데 그 메시지를 전달하는 메신저로서의 드라마는 여전히 부실하다.
조금은 성장했을 것이다. 고민없는 아이와 같았다. 갈등이라고는 경험해 보지 않은 어린 소녀와도 같았다. 그래서 충동에 이끌려 먼저 행동부터 하고 말았다. 후회가 남는다. 자신이 보지 못한 진실이 있다. 미처 생각하지 못한 다른 방법들이 있었다. 변호사로서의 자신을 고민한다. 자각하게 된다. 여자로서도 조금은 성장했다. 어른인 척 하지만 박수하는 아직 아이다. 자신의 충동을 조절할 지 모른다. 역시나 아이같은 어른과 어른 같은 아이의 기묘한 동거일 것이다. 어른은 어른이 되고 아이는 아이가 되어간다. 아이가 자라면 어른이 된다.
걱정했던 것과는 달리 제법 깔끔하게 잘 마무리되었다고 생각한다. 우려했던 부분들에 대해서는 서상덕 변호사의 입을 빌어 충분히 설명해주고 있었다. 변호사가 주인공이다. 법정이 무대다. 법이 수단이다. 조금 더 치밀하고 정교하게, 그리고 풍부한 드라마로 구성했으면 하는 바람이 있기는 하지만 욕심일 것이다. 완벽한 것은 없다. 타협하며 살아간다. 재미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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