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사회

외교와 기호학 - 어떤 웃을 수 없는 코미디...

까칠부 2013. 6. 24. 18:49

근대 유럽에서 기호학이 나타날 수 있었던 이유 가운데 하나가 다름아닌 첨예했던 당시의 외교환경 때문이었다. 말 한 마디 단어 하나에 의미를 부여하고 확대재생산함으로써 자신들에 유리한 결과를 이끌어내고자 온갖 노력을 기울이고 있었다. 당장 눈앞의 상대를 현혹하기 위해 최대한 유리하게 보이도록 말을 꾸며 하면서도 정작 그것을 적용하는 단계에서는 전혀 다른 자신들에 유리한 해석을 이끌어낸다. 바로 그런 야비하다 싶을 정도로 정교한 유럽의 외교전술이 제국주의 시대 유럽 이외의 세계를 철저하게 유린하고 농락할 수 있었던 또 하나의 무기였던 것이다. 결국 지나고 나서야 자기가 당한 것을 알게 된다.


그런데 동아시아의 어느 나라가 있다. 대통령이 어찌되었든간에 국제법상 다른 나라의 수장과 정상회담을 가졌다. 그 내용을 일개 정보기관에서 임의로 공개한다는 것도 우스운 일일 것이다. 정상회담이란 공식적인 절차로서의 협상이나 협의와는 그 성격이 전혀 다른 것이다. 각각 나라를 대표하는 수장으로서 사적이면서도 공적인 이야기들이 다양한 경로로 이루어진다. 그 가운데는 걸러지지 않거나 혹은 아직 타진단계의 미성숙한 이야기들도 상당수 포함된다. 때로 그 성격상 국내적으로나 국외적으로 문제가 될 만한 이야기도 사적인 자격으로 오갈 수 있다.

 

바로 그런 것들을 감안해서 허심탄회한 대화를 나누는 자리가 바로 정상회담인 것이다. 공식화되기 이전의 비공식적인 대화들도 그래서 그 중 상당부분을 이룬다. 따라서 어지간하면 그 내용에 대해 공식적으로 발표된 것 이상의 더 상세한 전문을 공개하거나 하는 경우란 없다. 그 가운데서 서로가 동의한 부분들에 대해서만 대변인을 통해 공식화한다. 관례다. 그런데 그것을 일개 정보기관에서 임의로 등급을 조정하더니 공개한다. 이제 과연 필요가 있어 대통령이 다른 나라의 수장과 정상회담을 하려 해도 누가 믿고 기꺼이 속깊은 이야기까지 털어놓겠는가. 선례가 만들어졌다.


더 웃기는 것은 그 내용 앞에 붙은 '사실상'이라는 단어다. 사실상 영토주권을 포기한 것이다. 그래도 전직대통령인데 대통령이 회담에서 영토주권포기를 말했다면 그것은 국제법상 강한 구속력을 갖는 선언이 된다. 정권이 바뀌었으니 이전 정권에서 한 말 따위 전혀 자신과는 상관없다. 그런 것 국제사회에서는 통하지 않는다. 정권이 바뀌었어도 대통령은 어디까지나 대한민국의 대통령이다. 단어 한 자라도 더 자신들에게 유리하게 해석하려 노력해야 하는데, 오히려 단어 하나하나까지 헤집어 어떻게 하면 더 불리한 내용을 만들 수 있는가만을 고민한다. 근세의 유럽에서 만일 외교담당자들이 그런 마인드를 가지고 있었다면 세상은 몇 배 더 평화로웠을 것이다. 이 영토는 우리가 사실상 포기하기로 선언한 것이었으니 이만 양보하겠다. 아니 양보하려 서로 싸움할까?


참 이걸 웃어야 하는 건지. 말하지만 동아시아의 어느 나라다. 나라이름은 말하지 않는다. 쪽팔리다. 더 쪽팔리는 것은 그 나라가 다름아닌 민주주의를 채택하고 있다는 뜻일 것이다. 국민이 선택했고 여전히 압도적인 다수가 지지를 보내고 있다. 그래서 굳이 또 말하지 않는다. 비난도 하지 않는다. 선택에 따른 책임을 져야 한다. 역시 그것을 막지 못했다면 그 책임 또한 함께 져야 한다. 웃을 수는 없는데 아무튼 웃긴다. 정치관련 글은 최대한 자제하려 하는데 자제가 되지 않는 이유다. 다시 정치시사 관련 글 쓰는 블로그를 열어야 할까? 쓸 건 많은데 시간이 없어서. 의욕도 많이 사라졌고.


코미디일 것이다. 외교문서를 최대한 유리하게 해석하는 것이 아닌 불리하게 해석하려 노력한다. 단지 전직대통령과 야당을 공격하기 위해 자칫 불리할 수 있는 내용을 더 불리하게 해석하려 노력한다. 그것을 또 믿는다. 아무도 그에 대해 문제의식을 갖지 않는다. 화내는 것이 차라리 바보같다. 포기할 수 있으면 그쪽이 훨씬 더 마음도 편하련만. 현실은 판타지보다 더 판타스틱하다. 웃지는 않는다. 웃을 수 없다. 하루가 너무 덥다. 강조해 말하지만 다른 나라 이야기다. 우리 나라 아니다. 그렇게 믿는다. 믿고 싶다. 믿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