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사회

아이 앰 어 히어로 - 소시민이 영웅이 된 순간, 세계가 무너지다

까칠부 2013. 8. 17. 07:37

무심코 그런 말들을 내뱉곤 한다.

 

"이놈의 세상 확 뒤집어졌으면..."

 

안정이란 다른 말로 고정이다. 질서란 또다른 강제다. 꽉 짜여진 틀에 맞춰진다. 마치 부품처럼. 원래 자리가 있는 것처럼. 아주 소수의 특별한 사람들만이 그 틀로부터 자유롭다. 강제를 거부하고 고정된 것을 부술 수 있는 아주 특별한 사람들이다. 자신은 그렇지 못하다.

 

그래서 꿈을 꾸게 된다. 자신이 부술 수 없으면 다른 무엇이 이 완고한 세상을 부수면 된다. 모든 것이 부서지고 허물어진 폐허 위에 어쩌면 자신만을 위한 새로운 기회가 찾아올지도 모른다. 더 이상 좋아질 것이 없다면 차라리 더 힘들고 고통스럽더라도 모두가 똑같은 조건에서 완전히 새롭게 시작해 보는 것도 좋을 것이다. 그때의 자신은 지금과는 또 많이 다를 것이다.

 

물론 안다. 그런다고 달라지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어차피 패배자다. 낙오자다. 지금의 현실에도 제대로 적응하지 못해 이처럼 한심한 몰골을 하고 있다. 그런데 그때라고 없던 용기가 생겨나고 새롭게 대단한 능력까지 가지게 되는 것은 아닐 것이다. 지금과 같다면 그때라고 지금과 크게 다르지 않다. 그러나 꿈이나마 꾸어 볼 수 없다면 현실이란 얼마나 비참하고 비루한 것인가 말이다. 그래서 다시 꿈을 꾼다. 자기가 지금 가지고 있는 알량한 몇 가지 장점들이 그 순간이 오면 아주 특별한 것으로 바뀌어 있기를.

 

주인공 스즈키 히데오는 3류만화가다. 아니 만화가조차 아니다. 한때 연재도 해보았고 단행본도 출판해 보았다. 그러나 지금은 인기가 없어 연재도 중단되고 다음 연재에 대한 기약조차 없이 다른 만화가의 화실에서 어시스턴트나 하며 연명하는 처지다. 성공한 동료만화가를 질투하며, 주변부에 머물고 있는 자신과 같은 처지들을 비관하며, 그러면서도 만화를 좋아한다는 사실로 위안을 삼는다. 그러나 꿈만 먹고 살기에는 그의 나이도 벌써 서른 중반을 넘어가고 있다. 그의 그같은 위기감과 열등감이 끝내 연인인 쿠로카와를 상처입히기도 한다.

 

아마 일반적인 시각에서 스즈키 히데오의 현실이란 우울 그 자체일 것이다. 경제적으로나 사회적으로나 그리고 일에 있어서나 그는 어떤 성취도 만족도 이루지 못하고 있었다. 그같은 현실에 대한 불만과 불안은 연인 쿠로카와와의 관계마저 동요시키고 있었다. 그러나 이제와서 다른 길을 찾는다는 생각조차 못하고 있었다. 솔직히 두려웠을 것이다. 지금까지 오로지 만화만을 그리며 살아왔는데 지금에 와서 다시 새로운 일을 처음부터 시작하려니 그것이 두렵고 불안했을 것이다. 나카타를 질투하고 쿠로카와를 의심한 모든 것이 그로부터 비롯된 것이었다.

 

만화의 시작부분에서 스즈키 히데오가 보는 망상이란 바로 그같은 스즈키 히데오 자신의 불안을 실체화한 것이었을 터다. 세상이 두렵다. 세상과의 만남이 두렵다. 애써 논리를 세운다. 애써 벽을 세운다. 여성아나운서에 대한 스즈키 히데오의 신랄함은 여성아나운서로 대표되는 현실에 대한 그의 거부감의 표현이다. 현실의 모순이 곧 모순과 어울리기를 거부하는 자신을 정당화해준다. 현실이 문제이기에 현실과 어울리지 못하는 자신은 지극히 옳은 것이다. 만화를 좋아하기에 불안한 현실에도 어시스턴트로 연명하는 자신에 만족하는 것과 대비된다.

 

세상은 그렇게 서로 어울리며 살아간다. 모순되면 모순된대로. 부조리한 것은 부조리한대로. 서로 타협하고. 서로 양보하고. 때로는 힘앞에 굴종하며. 때로는 힘을 가지고 으스대며. 굳이 진지해질 필요가 없다. 사는대로 살아간다. 살아가는대로 살아가게 된다. 현실을 자신에 맞추는 것이 아닌 현실에 자신을 맞추는 법도 안다. 하지만 그렇게 했다가는 어느새 휩쓸려 사라져 버리고 말 것만 같기에 그러기를 겁내고 두려워한다. 강해서가 아니다. 약해서다. 휩쓸리면 휩쓸리는대로, 물들면 물드는대로 그렇게 살아가는 것이 또한 평범함이 갖는 강함일 것이다.

 

현실을 받아들이기를 거부한다. 연인 쿠로카와가 좀비가 되어 자신을 공격하는 상황에서도. 좀비에게 쫓겨 도망쳐야 하는 비상상황에서조차 법과 규범을 지키는 것에 강박적일 정도로 집착을 보이고 있었다. 마찬가지다. 현실이 두려워 현실과 섞이는 것을 거부했던 것처럼 현실을 벗어난 현재를 받아들이는 것이 두렵기에 현재를 인정하지 않으려 하는 것이다. 여전히 자신은 평화로운 시대의 법과 규범 아래 있다. 그같은 강박에 의한 집착이 균열을 일으켰을 때 그는 비로소 자신 앞에 놓인 비일상의 현실을 받아들인다. 영웅이 된다.

 

우연히 남모르게 취미로 즐기던 산탄총을 챙겨가지고 나온 것이 그에게는 행운의 시작이었다. 초능력과 같았다. 일반인이 총기를 휴대하는 것을 강하게 금지하고 있는 일본에서 좀비의 공격을 일격에 저지할 수 있는 수단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그것만으로도 대단한 강점이 된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좀비에게 일방적으로 쫓기고 있을 때 오로지 스즈키 히데오만이 좀비들에 반격을 가할 수 있었다. 역시 많은 사람들이 꿈꾸는 것이다. 내가 가진 한 가지 장점이 비상상황에서 유일한 강점으로 작용한다면. 세상이 지옥으로 바뀔수록 역설적으로 스즈키 히데오는 주위의 기대 속에 자존감을 찾아가고 있다. 과연 현실로 돌아갔을 때 스즈키 히데오는 적응할 수 있을까?

 

좀비라는 것도 상당히 의미심장하다. 어릴적 꿈을 꾼 적이 있었다. 흡혈귀가 사람을 문다. 흡혈귀에 물린 사람은 흡혈귀가 된다. 어느새 주위가 흡혈귀로 가득차 버린다. 오로지 흡혈귀만이 남은 세상에서 흡혈귀가 자신을 쫓으려 한다면 여전히 도망쳐야만 하는 것일까? 맹목적이다. 사고도 판단도 불가능하다. 본능이 이끄는대로 몰려다니며 타인을 감염시키고 전염시킨다. 더구나 만화속 좀비의 경우 생전의 행동을 반복하는 특징을 보인다. 무의미하게 반복되는 행동 가운데 원래의 인간과 좀비의 경계마저 모호해진다. 그토록 스즈키 히데오가 두려워하던 문밖 세상의 일상일 것이다. 그들은 오로지 다른 사람들을 자신들과 같이 만들려는 본능만을 가질 뿐이다.

 

현실감이 없다. 하기는 스즈키 히데오만이 아니다. 작가의 의도다. 좀비가 습격해온다. 좀비가 하나둘 사람을 물어 좀비로 만들어가고 있었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런 상황에조차 바뀐 현실을 인정하지 못하고 일상의 관성에 갇힌 채 대책없이 좀비가 되어가고 있었다. 바로 옆에서 사람이 좀비가 되어가고 있는데 그에 전혀 아무런 관심도 보이지 않는다. 그런 순간에조차 상식과 습관과 일상이라고 하는 틀에 갇힌 채 그로부터 벗어나려 하지 않는다. 그나마 스즈키 히데오가 다른 사람보다 나은 것은 그는 원래 비일상의 존재인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런 순간에조차 의도적으로 만화속 일상은 변화가 없다. 단지 그림속에 좀비만 늘어가고 있을 뿐이었다.

 

아울렛 옥상에서 스즈키 히데오는 영웅으로 각성한다. 총을 빼앗긴다. 그러나 총을 다룰 수 있는 것은 오로지 스즈키 히데오 뿐이었다. 총을 가지고 있어도 그것을 제대로 다루지 못하는 한 좀비들의 먹이가 될 뿐이었다. 스즈키 히데오는 총을 되찾았고 다리 위에서 좀비떼들과 맞서고 있었다. 좀비에게 물리지 않기 위해 인간으로서의 존엄을 지키고자 무라이는 스스로 다리 아래로 몸을 던진다. 자기가 살기 위해 아이를 죽이려던 아라키는 스스로 좀비와 함께 몸을 불사른다. 존엄과 희생 위에 그는 좀비라고 하는 새로운 현실에 적응해간다. 그의 총알은 마르는 법이 없다.

 

스즈키 히데오가 영웅이 되고 그의 대척점에 선 인물이 나타난다. 쿠루스 또한 좀비가 되지 않고서도 좀비들과 맞서싸우던 비일상의 영웅이었다. 처음부터 영웅으로 떠받들려지느라 스즈키 히데오와는 다르게 어떤 고민도 갈등도 겪지 않아도 되었던 영웅이었다. 세상과 부대끼지도 않았다. 스즈키 히데오는 그나마 세상을 거부하며 소심한 싸움을 이어가기라도 했지만 그는 철저히 세상과 단절된 채 자기만의 세계에 빠져 있었다. 좀비가 오히려 쿠루스를 떠받든다. 상징적이다. 좀비란 어디서부터 비롯되었는가. 쿠루스라면 처음부터 좀비가 될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아무튼 해답은 여고생인 하야카리에게 있었을 것이다. 여성이란 모성이다. 여고생이란 아직 미성숙한 아이일 것이다. 미래다. 희망이다. 아직 이가 나기 전의 아이에게 물려 좀비가 되었다가 우연히 다시 원래의 정상으로 돌아왔다. 그녀를 이끄는 것은 성적으로 여성을 나타내는 오다 츠구미다. 또다시 비일상의 세계에 균열이 일어나기 시작한다. 영웅이 위치한 곳이다. 스즈키 히데오의 일상은 섹스와 함께 복원된다. 원래의 한심함으로 돌아간다.

 

재난물이 만들어지는 이유일 것이다. 재난상황을 상상하며 그것을 즐기는 심리일지도 모른다. 좀비란 인간이다. 인간의 형상을 한 비인간이다. 일상이 깨어진다. 일상의 세계가 부서진다. 허물어지고 무너져내린다. 인간의 날것의 모습을 보게 된다. 그리고 그 가운데 평범하던 한 개인이 - 때로는 평범 이하이던 누군가가 영웅이 되어가는 모습을 본다. 희망도 본다. 지금의 완고한 일상의 틀을 부술 수 있다면. 그리 희망적인 세계는 아닐 것이다. 일탈에서 꿈을 본다.

 

일본인 만화가 하나자와 켄고의 작품으로 일본에서는 지금도 연재중이다. 국내에서는 대원씨아이에 의해 11권까지 발매되어 있다. 재난으로 인한 긴박함이나, 좀비라고 하는 치명적인 위협과 맞서싸우는 치열함따위는 없다. 그보다는 인간이 있다. 다양한 인간의 군상이 좀비와 섞여 보여진다. 냉정한 듯 무심한 연출과 그림이 섬뜩함을 더한다. 오랜만의 작품이다. 즐겁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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