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사회

고종과 세도정치 - 정조의 그림자...

까칠부 2013. 8. 18. 13:29

나는 탕평이라는 말을 싫어한다.


탕평이란 무슨 뜻인가면,


모 당에 P계와 L계가 있다.


대통령이 되었다.


"계파 상관없다. 내 마음대로 인사하겠다."


다시 말해,


"내 마음에 드는 사람들로 인사하겠다."


원래 사대부들은 당파에 따라 줄서고 있었다.


노론은 노론끼리 소론은 소론끼리 남인은 남인끼리


서로의 세계관이나 정치적 지향에 따라 무리를 이루고 경쟁하고 있었다.


여기에 세손부터 왕까지 단종 이후 두번째로 완벽한 정통성을 가졌던 숙종이 나선다.


"너 죽어!"

"너도 죽어!"


왕의 권위를 확인한다.


하다못해 경종까지도 사화를 일으켜 많은 노론을 죽였다.


밉보이면 재미없다.


그리고 들어선 영조. 정계개편을 시작한다.


노론도 소론도 없다. 아니 소론은 이인좌의 난으로 배제된다.


노론도 남인도 없다. 왕 앞에 모든 정파는 평등하다.


호락논쟁이 이때 있었다. 노론이 전통적인 기호의 소론과 경강의 낙론으로 나뉘어 논쟁을 벌였다.


남인 역시 지방의 남인과 서울의 남인이 분리된다.


이때에 이르면 양반은 벌열과 그 이외로 나뉜다.


벌열이란 서울에 머물며 관직을 독점하는 소수의 가문을 뜻한다.


이들은 곧 탕평책 아래 영조의 협력자였다.


정조는 더 심했다.


정조와 노론이 대립했다?


이미 여러 증거들로 밝혀지지 않았는가.


노론 역시 정조의 신하에 불과했다.


다만 정조 또한 노론에 대한 배려로써 여러 보수적인 입장들을 견지한다.


더 이상 당쟁은 없었다. 당끼리 서로 대립하고 경쟁하는 것은 없었다. 


왕의 친위세력과 그 이외의 잡다한 떨거지들이 나뉠 뿐이었다.


사림이라 불리던 지방의 양반들은 향반이네 잔반이네 하며 권력으로부터 떨어져나간다.


심지어 세도정치기에는 이들 향반과 잔반에 대한 수령의 관례적 보호조차 없었다.




정조가 죽었다. 죽으며 어린아들 순조의 후견인을 권신 김조순에게 맡긴다.


바로 안동 김씨의 세도정치를 시작한 그 김조순이다.


순조가 즉위하고 처음에는 정순왕후가 수렴청정을 명분으로 정국을 주도했다.


이때 정순왕후와 가까운 벽파의 문벌들이 권력을 독점하고 나머지 정파를 학살했다.


김조순이 정권을 잡고 나서는 시파의 안동김씨가 권력을 쥐었다.


순조가 죽고 현종이 즉위했을 때 풍양조씨가 안동김씨의 권력을 물려받았다.


더 이상 서로의 이념적 차이에 따른 명분을 앞세운 당쟁은 없었다.


왕을 끼고 왕의 권력을 빌어 경쟁자를 찍어누르는 권력싸움이 있었을 뿐이었다.


왕을 견제하며 자기들끼리 경쟁하던 당쟁에서 왕을 앞세우고 다른 아들을 힘으로 누르는 독점이 시작됐다.


그렇다면 여기서 문제. 과연 당시 조선의 왕권은 터무니없이 약했던 것일까?




세도정치에 대한 오해다. 조선 중기의 파평 윤씨에 의한 세도정치도 그러했지만,


세도정치라는 자체가 강력한 왕권을 전제한다.


왕이 여타 지배계급을 압도했을 때 왕의 협력자로서 친위세력이 그 권력을 위임받아 누린다.


이를테면 황제까지 능멸했던 명의 환관 위청이 그 예일 것이다.


위청의 권력은 황제까지 넘보고 있었지만 그렇다고 명의 황제의 권력이 약했는가?


선택이었다. 왕에게도 자신의 왕권을 보위할 친위세력이 필요하다.


왕을 지지해주고 유사시 왕에게 힘이 되어준다. 그들에게 그에 합당한 권력을 나눠준다.


그것은 왕의 통치기술 가운데 하나였다. 중종이 그래서 조광조를 등용했다.


수렴청정은 아직 어린 왕을 왕실의 어른인 대비로 하여금 보호토록 한 것이었다.


김조순을 후견인으로 세운 것은 다른 세력이 어린 왕을 함부로 흔들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였다.


철종의 경우만 해도 글조차 제대로 모르는 철종이 안동 김씨의 도움 없이 왕위나 유지할 수 있었을까?




고종의 즉위도 그렇게 이루어졌다.


안동 김씨 안에서도 신진세력에 속해 있던 김병학 등과,


현종 이후 다시 권력의 중심에서 밀려나 있던 풍양조씨,


여기에 그동안 세도정치로 인해 소외되어 있던 종친까지,


결국 흥선대원군도 고종의 친위세력 가운데 하나였다.


흥선군이 왕의 권위를 넘어서는 순간 고종의 선택은 필연적일 수밖에 없었다.


명성황후의 여흥민씨가 과연 왕의 용인 없이 그처럼 마음대로 전횡할 수 있었을까?


여흥 민씨만이 아니다. 구한말 혼란기에 고종은 빈번하게 자신의 친위세력을 바꾸고 있었다.


외척인 여흥 민씨에서, 혹은 개혁파로, 혹은 친일파로, 혹은 친러파로,


조선말 조선이 결국 근대화에 성공하지 못하고 일본에 먹힌 이유였다.


지나치게 자주 친위세력을 바꾼 나머지 정책에 일관성이 사라졌다.


고종은 무능했는가? 아니 유능했다. 너무 유능해서 문제였다.


왕권에 도전이 된다 하면 그대로 보아넘기지 않았다.


철저히 배제했고 다른 세력을 키워 그들을 대체했다.


조선 안에 주도적으로 근대화를 이룰만한 세력은 고종에 의해 사실상 남아있지 않았다.


그래서 고종은 미국까지 끌어들여 자신의 왕위를 안정시키려 한다.


자신이 친일파가 되고, 친러파가 되고, 친미파가 된다.


다른 때라면 영명한 군주라 불렸겠지만 혼란기다. 일관된 비전과 전략이 필요한 때다.





정조는 개혁군주였는가. 맞다. 그러나 그 개혁이 긍정적인 방향으로 이루어졌는가.


세도정치는 과연 왕권이 떨어지고 신권이 득세하며 벌어진 특정 문벌의 작품이었는가.


왕을 끼고 그같은 전횡을 벌일 수 있었다는 자체가 왕권의 신장을 보여주고 있을 것이다.


단지 왕에게 필요했다. 왕의 친위세력은 크고 강할수록 좋다. 


고종은 유능했다. 너무 유능해서 나라를 망쳤다.


탕평이라? 차라리 이렇게 외치면 어떨까?


그나마 당쟁이라는 것이 있었던 무렵 사대부들은 서로를 죽이며 긴장상태에 있었다.


그 긴장이 권력이라는 이름 아래 풀어져 버린다.


정조가 남긴 그림자일 것이다.


숙종으로부터 시작되었다.


여자들 사이에서 휘둘리는 왕이 아니다.


강하고 잔인하고 영리했으며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하는가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흥미롭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