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상 도망치기만 했었다. 불리하다 싶으면 바로 손들고 항복부터 했다. 이길 수 없음을 안다. 아니 이길리가 없음을 알고 있다. 그래야 할 이유도 없었다. 항복하고 나서 어떻게 되든 그것은 자신이 판단할 문제가 아니었다. 살려주면 살고 죽으면 죽는다. 그것이 운명이다. 체념하고 받아들인다. 고작 그것이 자신이다. 자신에 불과하다.
그런데 강물이 뒤를 막고 있었다. 도망칠 곳도 없는데 항복마저 받아주지 않는다고 한다. 이대로 죽어도 좋겠다 생각했지만 사정이 달라졌다. 지켜야 할 것이 생겼다. 반드시 살아야 할 이유가 생겼다. 어떻게 해서든 살아서 돌아가야 한다. 돌아가서 지켜주어야 한다. 새끼를 품은 짐승은 사납다. 지킬 것이 있는 인간은 누구보다 강하다. 인간이 강해지는 것은 자기 자신을 위해서가 아닌 다른 누군가를 위해서다. 인간의 본질은 누군가를 지키는 것에 있다. 그 누군가를 지키기 위해서라도 살아야 한다.
그런 점에서 확실히 악역인 조서희(김혜옥 분)는 주인공 장태산(이준기 분)과 많은 점에서 비교될 수 있을 것이다. 조서희가 장태산의 딸을 살려달라는 박재경(김소연 분)의 부탁에 냉소하고 마는 이유이기도 할 것이다. 자식을 위해 이렇게까지 했다. 모두가 비웃고 손가락질했다. 경멸과 혐오를 감추지 않고 비난과 모욕을 서슴지 않았다. 모두가 자신과 자신의 아이를 저버렸다. 내몰려 했다. 필사적으로 지켜야만 했다. 어떻게 해서든. 무슨 수를 써서든. 어차피 이 사회가 자신과 자신의 아이를 버렸으니 자신 또한 이 사회를 버릴 것이다.
그랬어야 했다. 장태산도. 문일석(조민기 분) 역시 그것을 지적하고 있었다. 어째서 지키려 하지 않았는가. 어째서 싸우려 하지 않았는가. 문일석에게 가장 소중한 것은 자기 자신이었다. 자신을 지키기 위해 지금껏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물어뜯고 짓밟아왔다. 그런 문일석의 눈에 무엇도 지키려 하지 않고, 무엇을 위해서도 싸우려 하지 않는 장태산은 단지 버러지에 불과했을 뿐이었다. 비록 사랑하는 여자를 지키기 위해 문일석의 협박에 굴복했다지만 그래서 지키고자 했던 여자는 행복했는가. 자신이 지우려 했던 아이는 어떠한가.
자신이 버려졌다고 생각했다. 아버지로부터 거부당하고, 어머니로부터 거절당했다. 자신이 태어난 날 처음 받은 생일상 앞에 어머니는 피를 흘리며 스스로 목숨을 끊고 있었다. 필요없다. 가치없다. 포기하는데 익숙했다. 자기만 버리면 되었다. 어떻게 되어도 상관없었다. 차라리 자기와의 모든 기억읠 흔적조차 없이 지워버리려 한다. 미워하도록. 그래서 잊을 수 있도록. 아이조차 남기지 않는다. 그렇게 그녀에게서 그는 없는 사람이 된다. 도망친다. 포기한다. 그리고 안도를 얻는다. 그것이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이다. 소중한 사람을 지켰다.
그런데 이번에는 그것이 안된다. 자기를 지우려면 아이가 죽는다. 자신도 모르는 새 태어난 자기의 딸이 그로 인해 죽게 된다. 살아야 한다. 어떻게 해서든 자신의 딸을 위해서도 살아야 한다. 누명은 쓸 수 없다. 선택지조차 주어지지 않았다. 자신도 모르는 새 미처 대비하지 않은 일들이 일어났고 이제 이제 장태산은 어쩔 수 없이 선택해야 만했다. 아니 선택이 아니었다. 필연이었다. 문일석의 무심함이 장태산을 완벽한 막다른 궁지로 내몰고 만다. 심지어 경찰에 체포되어 유치장에 갇힌 자신마저 죽이려는 문일석의 집요함에 장태산은 싸우지 않으면 안되는 상황으로 내몰리고 만다. 이대로 주저앉아서는 안된다. 싸워야 한다. 선택할 수조차 없는 싸움에 장태산은 필사적이 된다. 싸울 수밖에 없다.
누구도 몰랐을 것이다. 아니 장태산 자신도 모르고 있었다. 자신이 이토록 무모하도록 용기있는 사람이란 것을. 문일석은 물론 경찰과 검찰까지 수시로 농락할 정도로 영리하고 용의주도했다. 문일석이 동원한 특수부대출신의 전문가 김선생(송재림 분)의 추격마저 곧잘 따돌리고 있었다. 격투에서도 일방적으로 당하지만은 않는다. 영화를 좋아해서 거기에서 힌트를 얻었다지만 결국은 장태산이라고 하는 인간이 가진 잠재력이었을 것이다. 드라마가 갖는 매력이다.
모두는 생각한다. 혹은 감춰진 자신의 잠재력에 대해서. 아직 눈뜨지 않은 자신의 가능성에 대해서. 아직은 여러가지 현실의 이유들이 그것들을 발휘하지 못하도록 하고 있을 뿐이다. 언제가 기회가 온다면. 언제고 필요한 때가 온다면. 평범한 - 혹은 그 이하라 여기는 많은 사람들의 판타지일 것이다. 위기의 순간 보잘것없던 자신이 히어로가 된다. 껍질을 깨고 원래의 자신을 되찾는다. 아버지로서 자신의 딸을 지키고자 하는 절박함이 설득력을 더해준다. 겨우 몇 번 얼굴만 보았을 뿐인 딸의 존재가 자신의 간절함을 일깨운다. 그래서 항상 장태산의 곁에는 딸 서수진(이채미 분)이 함께하고 있다. 딸이 장태산을 강하게 한다.
청렴함과 왕성한 사회활동으로 모두로부터 존경과 사랑을 한몸에 받고 있는 유명정치인 손서희의 이중생활과 악이란 어떤 것인가를 그린 듯이 보여주는 문일석의 정제된 악의, 그리고 그를 뒤쫓는 검사 박재경의 사연까지. 아직도 서인혜를 잊지 못하는 장태산의 순정과 약혼자이면서 은인이기도 한 임승우(류수영 분)와 장태산과의 인연 사이에서 고민하는 서인혜(박하선 분)의 갈등, 무엇보다 그런 서인혜마저 이해하며 서지수를 지키려는 남자 임승우의 진정이 있다. 문일석과의 거래에 응해 장태산의 디카를 문일석에게 넘겨주는 어리석음을 범했지만, 그러나 그 또한 한 여자의 남자이고 한 아이의 아버지이고자 했기에 이해할 수 있다. 그는 아직도 남자로서도 아버지로서도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 그럼에도 그는 그런 자신의 잘못에 대해서조차 서인혜에게 솔직하려 하고 있다.
흥미를 끌만한 전형적이지만 다양한 요소들이 촘촘이 짜임새있게 배치되어 있다. 모순되거나 개연성이 떨어지는 부분이 딱히 눈에 뜨이지 않는다. 적당한 때 긴장과 이완을 반복하며, 스릴과 감동이 교차하는 연출과 편집 또한 훌륭하다. 어느새 마음을 조이다 보면 적당한 때 안도와 감탄과 함께 긴장을 풀게 된다. 등장인물들의 동선을 쫓으며 집중하다가도 잠시 딸 서수지의 천진한 모습이 보이면 장태상의 부정에 함께 눈시울을 붉히기도 한다. 언제쯤에나 장태산의 불운은 끝날까. 언제나 되어야 장태산의 고난은 끝나게 될까. 딸 서수진과 만나게 될까. 2주가 몇 십 년 같은 2주다. 한 주 한 주가 몇 년은 되는 것 같다.
조서희는 더 강해진다. 뒤를 생각지 않는다. 그녀 또한 지금은 싸움을 할 때다. 조서희를 등에 업은 문일석은 박재경마저 어쩌지 못할 정도로 끝없이 강해지고 있다. 추락하는 것은 날개가 있다. 막다른 궁지로 내몰린 장태산과 박재경이 반격을 준비한다. 임승우 또한 자신이 저지른 실수를 솔직하게 인정하고 문일석과 그 배후의 뒤를 쫓는 전장에 합류하다. 서인혜가 납치되었다. 서인혜가 남긴 힌트를 근거로 장태산은 김선생과의 마지막 만남을 준비한다. 한치국(천호진 분)가 변수가 된다. 많은 것들이 준비되어 있다. 하나면 된다. 안달나려 한다.
반전에 반전이 이어진다. 허무하기도 하다. 비명이 나올 정도로 허탈해지기도 한다. 쉬운 상대가 아니다. 서수진마저 납치하려 한다. 승리할 것을 알면서도 매순간 마음을 졸인다. 딸과 만나는 그 순간을 위해서. 딸을 위해 아버지가 되려는 바로 그 순간을 위해서. 딸을 향한 아버지의 사랑이 마침내 악에 승리할 것이다. 장태산은 영웅이다. 남자이고 아버지다. 멋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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