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

주군의 태양 - 기억 이전의 진실, 운명이 주군을 태양에게 이끌다

까칠부 2013. 9. 20. 07:13

말이란 질서이고 법칙이다. 말로써 사물을 정의한다. 인식하고 사유한다. 들에 핀 꽃들을 아울러 '들꽃'이라 부른다. 들에 자란 무수한 식물들 가운데 '들꽃'이 생겨났다. 그리고 그 가운데 작은 꽃봉오리가 성기게 뭉쳐 피어 있는 꽃을 일컬어 안개와 닮았다 해서 '안개꽃'이라 이름짓게 된다. 같은 소에서 나온 소고기인데 '제비추리'는 '홍두깨'와 다른 가치를 가지게 된다.

 

혼란스러웠다. 아니 인정할 수 없었다. 아직 상처가 다 아물지 않았다. 필사적으로 버티고 있던 중이었다. 그런데 이제와 다시 사랑이라니. 도망치려 했었다. 숨으려 하고 있었다. 잊혀지리라. 시간에 의해 흐려지고 언젠가는 의미조차 사라져버리고 말 것이다. 아주 많은 시간이 지나면 그때는 그리운 이야깃거리나 하나 더해지게 될 것이다. 무엇도 아니었다. 아직까지는. 자신이 알지 못하는 감정에 휘둘리고는 하는 수많은 알지 못하는 남녀들처럼.

 

그런데 그것을 입밖에 내어 말하고 말았다. 보고란 선언이며 청유란 인정이다. 너를 좋아한다. 태공실(공효진 분)에 대한 주중원(소지섭 분)의 감정을 한 마디로 정의내리고 그것을 당사자인 태공실 앞에 선언하고 동의를 구하고 있었다. 자신이 태공실을 좋아한다는 사실을 듣고 인지해달라. 기억해달라. 이미 자신이 죽었다 생각한 주중원이 굳이 태공실의 대답을 듣고자 한 것이 아니었다. 설사 자신이 죽더라도 태공실에게 자신의 진심을 고백한 사실 자체는 남는다. 설사 자신이 기억을 잃고 그러한 사실을 전혀 기억하지 못한다 하더라도 그같은 사실 자체가 사라지지는 않는다. 세상의 질서와 법칙 속에 자신이 기억한 사실이 기록되어 남는다.

 

주중원이 글을 읽을 수 있게 된 이유였다. 그동안 주중원의 삶은 혼돈 그 자체였다. 차희주를 사랑할수도 미워할수도 없었다. 이해할수도 원망할수도 없었다. 아버지 역시 이해하면서도 이해할 수 없었다. 과연 자신은 지금 어디에 있는가? 자신의 진심은, 그리고 자신이 알고자 하는 진실은 어디를 표류하고 있는가? 질서가 사라지고 질서를 이루던 규범마저 사라져 버렸다. 무엇이 무엇인지도 알 수 없는 혼돈 속에서 주중원은 필사적으로 자신을 지키고자 했다. 과장된 엄격함과 위장된 철저함으로 그는 자신을 지키려 했다. 그런데 이제 비로소 자신을 정의할 수 있게 되었다. 자신의 진심을, 그리고 애써 외면하고 있던 진실을 쫓을 결심을 하게 되었다. 태동실을 사랑한다. 주중원이 마지막으로 선택한 진실이었다.

 

주중원이 기억을 잃었어도 주중원이 속했던 세계가 주중원의 기억을 기억한다. 태공실을 거부하는 태성란(김미경 분) 역시 주중원이 태공실에게 마음을 주고 있었던 사실을 기억하다. 굳이 부사장이자 고모부인 도석철(이종원 분)의 입을 빌지 않아도 그와 만났던 사소한 인연들이 그의 기억을 대신해 들려준다. 기억을 잃기 전 건넸던 명함이 아이들을 통해 그가 잃어버린 기억과 함께 돌아온다. 기억보다도 더 절대적인 것, 그것은 존재했던 사실, 그리고 그 사실에 대한 진실한 의미다. 주중원은 태공실을 사랑했다.

 

차희주에 대한 진실이 밝혀진다. 쌍동이였다. 영국으로 입양되었던 차희주의 쌍동이 한나(황선희 분)가 차희주의 영혼과 함께 주중원 앞에 나타난다. 차희주에 대한 강한 연민과 죄책감, 그리고 차희주를 죽게 만든 세상에 대한 증오를 가지고서.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차희주는 어째서 주중원을 납치해야 했고, 그리고 죽어가야 했던 것일까? 아니 과연 주중원을 납치했던 것은 차희주 자신이었을까? 차희주의 죽음이 한나를 분노케 했다면 그것은 주중원이 납치된 이전일까? 아니면 이후일까? 차희주가 주중원에게 상처와 고통에 대해 말한 이유와도 관계가 있을지 모른다. 김귀도(최정우 분)에게 열쇠가 주어진다. 이 또한 반전이었다. 김귀도가 차희주와 한나의 외삼촌이었다.

 

결국 주중원은 기억의 흔적을 쫓아 태공실에게로 돌아온다. 아직 기억은 온전하지 않지만 기억보다 더 진실한 기억이 그를 태공실에게로 이끈다. 기억을 잃은 동안 전혀 다른 자신이 되어 있었던 자신에게. 어쩌면 자신이 알고 있는 자신보다 더 진실했을 자신에 대해. 그리고 진실한 자신이 추구한 진심에 대해서도. 말은 때로 그 자체로 마법이 된다. 좋아한다는 진실한 고백이 주문처럼 주중원을 태공실에게로 향하게 만든다. 물론 이것으로 끝은 아닐 것이다. 차희주의 부탁이 있었다. 모든 의문을 풀기 위한 마지막 단계다.

 

사랑은 운명보다도 강하다. 진실한 사랑은 그 자체로 운명이 된다. 기억보다도 더 선명한 흔적이 기억을 이끈다. 필요했다. 위기이자 계기가 되어준다. 기억과 함께 사랑마저 사라져버렸다 생각했다. 하지만 기억보다 먼저 사랑했다는 진실이 먼저 그들을 만나게 한다. 그들은 그만큼 서로를 사랑했다. 서로를 잊을 만큼. 잊어서도 다시 찾아올 만큼. 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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