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의 캐릭터로만 본다면 안도훈(배수빈 분)이 더 입체적일 것이다. 어둠이 있다. 그늘이 있다. 그것이 그가 추구하는 화려한 빛과 어우러져 역동적인 그림을 만든다. 그에 비하면 강유정(황정음 분)은 얼마나 평면적인가. 그저 올곧고 선량하고 또 성실하다. 빛만이 보인다.
그러나 드라마의 캐릭터가 아닌 인간으로서는 과연 어떠할까? 안도훈에게는 뒤가 없다. 그는 결코 자신의 뒤를 돌아보지 않는다. 오로지 앞만 본다. 밝은 빛만을 쫓는다. 사실 매우 흔하다. 대부분 사람들이 안도훈과 크게 다르지 않다. 후회가 두렵다. 후회할 일들이 부끄럽다. 인정하고 싶지 않다. 마주하고 싶지 않다. 그래서 도망친다.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는 채.
반면 강유정에게는 앞이 곧 뒤다. 저 먼 과거의 기억을 끌어당겨 품에 안은 채 앞으로 나아간다. 피투성이가 되어 있다. 온통 재투성이에 먼지투성이다. 그것이 곧 자신이다. 그것을 감추려 하지 않는다. 억지로 잊으려고도 하지 않는다. 웃으면 안된다. 행복해지면 안된다. 그녀에게 현재란 과거의 연장이다. 그녀에게 자신이란 과거의 자신의 연장이다. 부끄러워하지도 두려워하지도 않는다. 힘들고 괴로운 그 모든 것들이 강유정 자신이다. 인정하고 받아들인다.
자기의 죄를 부정하지 않는다. 자기의 잘못을 외면하지 않는다. 그것까지 끌어안는다. 안도훈의 죄를 대신한 것을 이제와서 굳이 밝히려 하지 않는 이유일 것이다. 자신의 선택이었다. 다른 누구도 아닌 자신의 판단이었다. 후회하더라도 그것은 온전히 자신의 몫이다. 그것이 잘못된 선택이고 판단이었다 하더라도 온전히 자신이 감당할 몫이다. 강유정이 분노하는 것도 따라서 당시의 자신의 선택에 대한 것이 아닌 이후의 안도훈의 행위에 대한 것들이었다. 자기는 몰라도 안도훈의 아이이기도 한 아이와 아버지에게는 그래서는 안되었다.
어차피 서지희가 사고를 당하던 그 순간 차에는 강유정도 함께 타고 있었다. 몰랐다고 해서 그 사실이 사라지지는 않는다. 자기가 운전하지 않았다고 자신이 타고 있던 차에 치여 사람이 - 그것도 아이를 임신하고 있던 임신부가 뱃속의 태아와 함께 목숨을 잃었다는 사실 자체가 부정되거나 바뀌지는 않는 것이다. 어쩌면 자신이 차안에서 한 말이나 행동이 원인이 되었을 수도 있다. 조금만 더 주의를 기울였다면 조수석에서 안도훈보다 먼저 피해자를 인식하고 최소한 피해자를 버려두고 도망치려는 안도훈을 말려세울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도 자신은 사랑과 희생이라는 명분을 앞세워 진실을 감추고 거짓으로 기만하는 것을 주도하고 있었다. 피해자와 그 가족을 속이고 세상마저 속인다. 죄가 없지 않다.
하기는 캐릭터로써 안도훈이 입체적으로 보이는 이유이기도 할 것이다. 인간으로서 안도훈은 과거를 부정한 채 오로지 앞으로만 내달리는 인물이다. 그러나 과정을 부정한다는 자체가 과거를 의식하고 있다는 증거인 것이다. 잊지 못한다. 아예 그런 일 없었다며 뻔뻔해지지도 못한다. 지난날의 후회가 자신을 옭죈다. 과거에 두고온 죄의식이 자꾸 자신을 부여잡고 끌어당긴다. 멈춰설 수 없다. 뒤돌아설 수도 없다. 그는 이미 과거와 하나다. 과거와 하나이기에 그는 오롯이 앞만 보며 달려갈 수 있는 것이다. 현실에서는 보기 힘든 드라마의 시청자이기에 누리는 특권 가운데 하나다. 안도훈은 어떻게 악의 수렁으로 빠져들고 있는가.
조민혁(지성 분)이 강유정에게 빠져드는 이유일 것이다. 꺼풀이라 부른다. 두께라 말한다. 아니 깊이라고 하는 쪽이 더 옳을 것이다. 아무리 두껍고 단단한 껍질이라도 일단 벗겨내고 나면 그 속을 드러낼 수밖에 없다. 그러나 깊이란 단단한 껍질과 연한 속살을 모두 아우르는 것이다. 파고 파고 또 파고 내려가다 보면 마침내 그 근원에 닿을 수 있다. 알고 싶다. 그녀를 채우고 있는 모든 것들에 대해. 항상 진지하다. 항상 진실하다. 자신의 모든 것이 자신이다. 켜켜이 쌓인 모든 것들이 그녀의 두께이고 깊이가 된다. 강유정을 만나며 조민혁 자신도 한 꺼풀 껍질을 벗고 만다. 감추고 싶던 여린 속내를 드러내고 만다. 진실을 찾는다.
조민혁과 결혼하려는 신세연(이다희 분)을 붙잡으려 한다. 조민혁과의 결혼을 어떻게든 막으려 한다. 그런 자신을 조롱하는 듯한 신세연의 태도에 안도훈은 나가려다 말고 그대로 돌아서서 힘으로 신세연을 밀어붙인다. 강제로 키스라도 하려는 듯 입술을 가까이 가져간다. 하지만 끝내 앞에서 멈추고 만다. 진심이 아니었다. 절박한 척 했지만 전혀 절박하지 않았다. 가면을 보고 있었다. 너무 쉽게 꿰뚫어 보고 있었다. 신세연도, 조민혁도, 최강민(이승준 분)도 너무나 쉽게 그의 바닥을 본다. 강유정 앞에서 안도훈 자신도 너무나 쉽게 자신의 바닥을 드러내고 만다. 알맹이가 없다. 한 꺼풀 벗겨내고 나면 안도훈이란 그저 공허할 뿐이다.
그래서 묻는다. 제대로 살고 있는 것이 맞느냐고. 그래야 한다. 그렇게 믿는다. 그 자체가 이미 흔들리고 있다는 것이다. 확신이 없다. 이것이 옳은 길인가. 웃을까봐 두렵다고 말한다. 행복하게 웃는 것을 두려워하면서도 강유정은 지금의 자신에게 최선을 다하고 있다. 누구에게도 손벌리지 않는다. 기대거나 매달리지 않는다. 묻지도 안않는다. 답은 그녀 자신에게 있다. 선부른 반칙으로 성급하게 목표를 이루려 하기보다 한 발 또 한 발 할 수 있는 만큼만 앞으로 나아간다. 지금까지 살아온, 그리고 앞으로 살아갈 모든 순간들이 자기 자신이다 모든 것이 자신이다. 안도훈에게 자신이란 버리고 난 나머지다. 깊이가 되고 한 꺼풀 얇은 껍질로 위태하게 감싸인다.
신세연이 조민혁의 마음을 얻지 못하는 이유일 것이다. 신세연과 조민혁은 닮아 있었다. 그들이 서로 끌리는 이유였다. 얇은 껍질로 자신을 두르고 있었다. 쉽게 부술 수 없는 그들만의 완고한 틀이었다. 어디에도 자기란 없는 것 같았다. 그래서 자기를 포기하지 않았다. 조민혁을 좋아하고 가지고 싶어도 그를 위해 자기를 포기할 수는 없다. 자기가 가진 것, 자기가 누리고 있는 것, 자기를 에워싸고 억압하고 있는 모든 것들을 그녀는 결코 포기하지 못한다. 그렇게 배워왔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길러졌고, 그에 어울리는 삶을 살아왔다. 그 껍질은 안도훈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이 두껍고 단단하다. 당연하게 자신마저 수단이 된다. 자기의 어쩌면 유일한 진심마저 도구로 삼아 버린다. 그렇게 지켜야 할 것들이 있다. 하지만 조민혁이 바라는 것은 온전한 사랑이었다. 온전히 자신을 사랑해 줄 사람이었다.
조민혁의 기습키스에 강유정은 눈물을 흘리고 만다. 처음에는 반항했다. 필사적으로 저항했다. 하지만 이내 순순히 받아들이고 있었다. 행복해져서는 안된다는 자신의 다짐 때문이었을까? 행복해지지 않기 위해서일까? 아니면 행복이 죄가 되어서일까? 키스를 하려다 바로 앞에서 멈춘 안도훈의 모습이야 말로 그의 진심이다. 신세연이 웃는 이유다. 자신들의 거짓된 관계에 대해서조차 충실하지 못하다. 그야말로 알맹이없이 겉돌고 있다. 무엇을 위한 것이고, 누구를 위한 것인가. 허무하기까지 하다. 그럼에도 멈출 수 없다. 멈추지 못한다. 어차피 의미없는 관계다. 신세연의 표정에서 더욱 초점이 사라진다.
안도훈의 비밀이 밝혀진다. 아슬아슬하다. 감질나다. 결정적인 것 같은데 전혀 걸졍적인 것은 없다. 그래서 조금씩 양파껍질을 벗기듯 그 실체를 드러내려 한다. 조회자의 지시로 최강민 역시 안도훈에 대해 많은 것들을 확보해 놓고 있는 듯하다. 한순간에 안도훈을 파멸로 몰아넣을 수 있는 자료들이다. 파멸은 예정되어 있다. 그 과정이 궁금할 뿐이다. 벌써부터 안도훈은 궁지로 내몰리고 있다. 말했듯 너무나 쉽게 바닥을 내보이고 있다. 남은 분량도 적지 않은데 그 과정을 어떻게 채워넣을 것인가.
허투루 버려지는 부분이 없다. 안도훈의 어머니 박계옥(양희경 분)의 불안한 모습이 자꾸 걸린다. 무언가 감추고 있는 것이 있다. 의외의 반전이거나, 아니면 안도훈을 벼랑으로 몰아넣을 또 하나의 덫일 것이다. 조금은 밝은 엔딩도 기대해 본다. 너무 어둡다. 사랑을 하기에는 조민혁은 너무 진지하다. 진지한데 명쾌하다. 지성이라는 배우의 힘이다. 드라마가 너무 우울한 쪽으로만 치우치지 않게 한다. 드라마는 재미있어야 한다.
미세한 근육의 떨림을 읽는다. 안도훈의 입꼬리가 올라가고, 신세연의 눈동자의 초점이 흐릿해진다. 수만마디의 대사보다 더 절실한 감정들이 그대로 전해지는 듯하다. 하나하나가 정교한 장치들일 것이다. 어느 것 하나 소홀히 할 수 없다. 소중하고 값지다. 대단하다.
http://www.stardailynews.co.kr/news/articleView.html?idxno=25987
'드라마' 카테고리의 다른 글
역사드라마와 역사왜곡, 그 우려에 대해... (0) | 2013.11.05 |
---|---|
상속자들 - 김탄과 차은상의 거리, 우울한 현실의 동화를 보다 (0) | 2013.11.02 |
비밀 - 죄의 관성, 그 헤어날 수 없는 수렁을 향해 (0) | 2013.10.31 |
기황후... (0) | 2013.10.29 |
상속자들 - 학교라고 하는 현실, 우울한 꿈을 꾸다 (0) | 2013.10.2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