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

비밀 - 죄의 관성, 그 헤어날 수 없는 수렁을 향해

까칠부 2013. 10. 31. 06:44

"어떻게 내가 미치지 않을 수 있어?"


잘 만든 드라마란 이래서 좋다. 알기 쉽다. 이해하기 쉽다. 오해가 없다. 더할 말도 붙일 말도 더 이상 없다. 보이는 그대로다.


"오빤 어떻게 이렇게 멀쩡할 수 있어?"


그 순간 안도훈(배수빈 분)의 표정은 그리 말하고 있는 것 같았다.


"내가 지금 멀쩡한 것 같아?"


끝내 안도훈도 강유정(황정음 분)을 향해 자신의 진심을 털어놓고 만다. 그때 자신의 선택을 후회한다고. 그때 그런 선택만 하지 않았다면 이렇게 되지 않았을 것이라고.


안도훈을 붙잡는 것은 강유정이 아니었다. 강유정이 대신한 자신의 죄였다. 강유정을 대신케 한 자신의 죄였다. 누구보다 순수하고 정의로웠던 안도훈이었다. 양심이 견디지 못한다. 도망치려 한다. 새삼 맞서 싸우기에는 이미 한 번 도망친 뒤였다. 또다른 죄를 짓고 있었다.


죄란 관성이다. 죄를 짓고 싶어 짓는 사람은 그다지 없다. 자기에게 부끄럽고 싶지 않다. 남들로부터 경멸당하고 싶지도 않다. 당당하고 싶다. 떳떳해지고 싶다. 하지만 이미 죄를 지었다. 죄로부터 도망치려 한다. 자기 잘못이 아니다. 자기의 죄가 아니다. 자기의 죄와 마주하기를 거부한다. 아예 없었던 것처럼 앞만을 보려 한다. 증명하고 싶다. 자신이 옳았다.


후회하고 싶지 않다. 죄책감따위 가지고 싶지 않다. 고통스럽다. 불편하다. 하지만 뒤를 돌아보면 자신이 저지른 죄가 남아 양심을 일깨운다. 차라리 원망한다. 차라리 미워한다. 탓을 돌린다. 고통스러운 것이다. 자기가 저지른 죄와 마주한다는 것은. 강유정은 그 죄였다. 그래서 강유정을 저버렸다. 강유정이 그토록 바랐던 자신의 꿈마저 포기해야 했을 때 그에게는 더 이상 돌아갈 곳이란 남아있지 않았다. 후회와 죄책감이 더 이상 뒤돌아보지 못하게 한다. 그저 앞만 보며 달려간다. 그 끝에 무엇이 있든. 무엇이 기다리든.


강유정에게도 더 이상 뒤란 없다. 모든 진실이 밝혀졌을 때 강유정에게 남은 것은 안도훈의 인정과 사과 뿐이었다. 안도훈에게 따져묻고 책임을 지우는 것이었다. 사고따위 아랑곳없다. 빗길에 차도에서 그녀는 무작정 운전중이던 안도훈의 팔을 붙잡아 차를 세우고 만다. 이유따위 듣고 싶지 않다. 변명따위 듣고 싶지 않다. 안도훈 자신도 그런 것들은 떠올리고 싶지도 않다. 무작정 앞만보며 달려가는 두 사람 앞에 기다리는 것은 잔인한 파열음 뿐이다.


분명 안도훈이 잘못한 것을 알고 있음에도, 강유정이 피해자인 것을 드라마를 통해 인지하고 있음에도, 빗속에 울부짖는 두 남녀를 보며 오히려 안도훈을 동정하게 되는 것은 아마 그래서일 것이다. 안도훈의 말처럼 그 순간 모든 것은 틀어지고 말았다. 안도훈이 안도훈이 아니게 되었을 때. 누구보다 순수하고 정의롭던 안도훈이 강유정의 선의에 의해 자신의 양심을 저버리게 되었던 바로 그때였다. 강유정은 검사 안도훈은 구했을지 모르지만 순수하고 정의로운 인간 안도훈은 나락으로 떨어뜨리고 말았다. 강유정이 기대하는 만큼 인간은 강하지 못하다. 죄의 나락에서 다시 딛고 올라서기엔 너무 약하다.


강유정과 헤어지고 안도훈이 신세연(이다희 분)을 찾아간 이유이기도 할 것이다. 신세연이라고 다르지 않다. 분명 신세연도 알고 있다. 자신의 행동이 도리어 조민혁(지성 분)의 반감만 살 뿐이라는 것을. 자기가 하는 행동들이 결국 조민혁의 마음을 멀어지게 만들 뿐이라는 것을. 하지만 어쩔 수 없다. 잘못을 인정하기에는 너무 멀리 왔다. 이제와서 바로잡기에는 너무 많은 것을 포기해야 한다. 무엇보다 초라해지고 싶지 않다. 구차해지고 싶지 않다. 헤어지는 많은 연인들이 저지르는 실수 가운데 하나다. 다만 스케일이 조금 크다. 기업 하나가 휘청인다.


강유정의 아버지 강우칠(강남길 분)의 인식표를 강에 던져버리고 안도훈은 신세연을 찾아간다. 그리고 같은 시간 아버지의 빵집에서 혼자서 울고 있는 강유정을 조민혁이 찾아간다. 신세연은 안도훈의 현실이다. 욕망이다. 조민혁은 강유정의 죄다. 강유정은 안도훈의 죄를 물으려 하고, 안도훈은 과거를 묻기 위해 현실의 욕망을 이루려 한다. 서로 다른 선택을 보여준다. 조민혁은 강유정을 보듬고 신세연은 안도훈을 이용하려 한다. 떠나지 말 것을 요구하는 조민혁에게 강유정은 그러마고 대답한다. 안도훈은 신세연을 잡으려 하지만 그녀는 응하지 않는다. 마치 상징하듯 보여준다.


안도훈과 강유정의 관계를 안 다음날 거울앞에서 악세사리를 하는 신세연의 표정이 압도적이다. 가면이 한 겹 씌워진다. 가면의 안쪽은 텅 비어있다. 누구도 자신을 속일 수 없다. 누구도 자신을 배신할 수 없다. 차라리 자기가 속이고 배신할지언정 다른 누군가가 자신을 능멸하는 것은 용납하지 않겠다. 그런 자신을 지운다. 상처투성이가 되어 약한 자신을 애써 지워버린다. 이제는 무엇이 목적이었는가도 잊는다. 안도훈도 믿을 수 없다. 단지 이용의 대상일 뿐이다. 그는 어차피 어울리지 않는 상대였다. 그녀는 군림하는 자였다.


조민혁과 강유정은 한 점 그늘도 없이 밝다. 두 사람에게는 뒤가 없다. 그림자가 없다. 올곧게 자기가 생각하는 바를 그대로 겉으로 드러내고 만다. 반면 안도훈과 신세연의 얼굴은 매우 입체적이다. 굴곡이 보인다. 그늘지고 그림자가 드리워진 것이 모두 보인다. 빛과 그림자가 교차하며 그들은 매번 다른 얼굴을 하고 있다. 드라마를 시청하는 특권이다. 감추고 있던 은밀한 부분까지 모두 보여진다. 배우들의 연기가 훌륭해서 어둠에 가려진 부분까지 선명하다.


신세연은 더 이상 조민혁을 사랑하지 않는다. 그것은 단지 집착이다. 자신의 실수와 잘못에 대한 변명에 불과하다. 안도훈도 이미 오래전부터 강유정을 사랑하지 않았다. 강유정을 사랑하기에는 강유정을 통해 보는 자신의 죄와 후회가 너무 무겁고 아프다. 그래서 강유정을 멀리하려 한다. 그래서 강유정을 항상 가까이에 둔다. 남들에게 보이기에는 두렵고 부끄럽다. 조민혁은 강유정에게서 무엇을 보고 있을까? 강유정 역시 안도훈을 바로 보지 못하고 있다. 오로지 조민혁만을 보고 있다. 그녀의 죄는 어디에 있는 것일까?


안도훈이 후회하도록 만들겠다고 강유정이 다짐하는 순간 안도훈의 머릿속을 스치는 기억들이 절묘하다. 안도훈어더 어째서 그렇게 멀쩡하냐고 묻던 그 순간처럼 이미 안도훈은 깊이 후회하고 있던 중이었다. 후회하지 않는다는 말이 역설적으로 그의 깊은 속내를 드러낸다. 후회하고 있기에 후회와 마주하지 않고자 그는 필사적이 되었다. 그를 가장 고통스럽게 하는 것은 강유정이나 다른 누구도 아닌 자기 자신이다. 속일 수 없는 자신의 양심이다.


악역임에도 연민의 대상이 되는 이유일 것이다. 이해할 수 있다. 납득할 수 있다. 인간은 악한 것이 아니라 약한 것이다. 악해서 죄를 짓는 것이 아니라 죄를 지음으로써 악해지는 것이다. 탄탄한 시나리오와 배우의 연기가 허구를 현실로 만들어낸다. 자신이 되어본다. 아마 이런 걸 웰메이드라 부르는 모양이다. 드라마에 명품이 있다면 이런 것이리라. 감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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