먼 기억을 떠올린다. 마치 기적같이 일어났던 순간들을. 운명처럼 다가왔고 필연처럼 이루어졌다. 그리고 마침내 전설이 되었다. 마모되어 버린 깊은 흔적만 남긴 채 다시 돌아갈 수 없는 먼 기억이 되어 그곳에 머문다. 시간은 더 멀리 자신을 떠나보낸다.
지켜주마고 약속했었다. 반드시 자기가 지켜주겠노라고. 아쉬움이 미련이 되어 남는다. 안타까움이 족쇄가 되어 놓아주지 않으려 한다. 벌써 이만큼이나 멀리 왔는데도 닿을 듯 잡힐 듯 가깝기만 하다. 한 걸음을 내딛을 때 남겨둔 기억이 자신을 붙잡아 세운다. 기억조차 희미한데 바로 어제일처럼 생생하다. 옛사랑의 기억이란 언제나 새롭다. 그래서 애닲다.
다시 고향으로 돌아가려 한다. 다시 원래의 자리로 돌아가려 한다. 4백년의 세월이었다. 뽕나무밭은 고층아파트단지가 되고, 배나무밭은 손꼽히는 번화가가 되었다. 나라가 한 번 망했다 다시 세워지고, 수많은 사람이 나고 자라고 사랑하고 다시 죽어갔다. 그런데도 마지막 순간 그를 멈춰세우는 것이 있다. 스스로 타인이 되고자 했던 그를 원초적인 유치함으로 얽어매는 존재가 있다. 옛기억이 담긴 비녀를 보며 눈물을 그렁인다. 오랜 기다림은 마침내 운명이 되어 멈췄던 시간을 다시 움직이게 한다.
"아까 설명했듯이 질투는 가장 저급하고 유치한 감정입니다. 자존감 약하고 열등감 강한 사람들이나 느끼는 그런 감정이라 난 느껴본 적 없습니다."
하지만 그런 도민준(김수현 분)조차 시간을 멈춰버리고 싶은 순간이 있는 것이다. 시간을 멈춰서라도 거부하고 싶은 순간들이 있는 것이다. 듣고 싶지 않은 말들이, 보고 싶지 않은 행동들이, 결코 인정하고 싶지 않은 상황들이 있는 것이다. 자신도 모르게 찾아온다. 유치해진다. 겁쟁이가 된다. 괜한 사람에게 화풀이를 하기도 한다.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예정들이 그를 더욱 급하게 만든다. 떠나야 하지만 자꾸 자신을 붙잡아 세운다.
그런 자신이 혼란스럽다. 그런 자신의 모습이 낯설기만 하다. 그러고 보면 첫사랑이다. 400년 전 그때는 아직 사랑이 아니었다. 이화(김현수 분)의 고백에 도민준은 아직 대답하지 않았었다. 시작도 해보기 전에, 그것이 무엇인지 미처 깨닫기도 전에 돌이킬 수 없는 비극으로 끝나고야 말았다. 어째서 이화인지. 어째서 다시 돌아갈 때가 되어 이화의 기억이 자신을 붙잡는 것인지. 어째서 이토록 천송이를 의식하고 마는 것인지. 철저히 타자로서 사람들 사이를 떠돌던 도민준이 비로소 존재를 인식하게 된다. 그 또한 지구에 존재하는 또 하나의 운명이었다.
인간의 관계란 어쩌면 이리도 덧없는가. 수백년을 잊지 못하고 기다리는 인연이 있는가 하면 고작 몇 년도 가지 않아 스러지고 마는 관계도 있다. 아니 어쩌면 대부분의 관계가 그러할 것이다. 자기가 드라마에서 비중있는 역할을 맡게 된 사실을 기뻐해주기를 바라기 이전에, 바로 그녀에게 주어진 기회가 원래는 천송이의 것이었다는 사실을 먼저 떠올렸다면 어땠을까? 유세미(유인나 분)는 더구나 천송이에게 거짓말을 했다. 천송이가 모두로부터 고립되어 있을 때 그녀를 기만했고 그녀를 떠났다. 진심으로 기뻐해주기를 바랐다면 어째서 천송에에게 솔직해지지 못했을까? 다른 때라면 여유로써 대할 수 있었을 테지만 지금은 천송이 자신도 상당한 궁지로 내몰려 있다. 그것을 유세미는 전혀 이해하려 하지 않는다.
천송이가 이휘경(박해진 분)을 꺼린 이유일 것이다. 천송이가 곤란한 순간에도 이휘경은 오로지 자기 입장만 생각한다. 천송이가 난처한 지경에 놓여 있는데도 이휘경은 오로지 자기의 감정에만 충실하려 한다. 자기가 좋은 쪽으로 적당히 타협하고 만다. 유세미가 그러했듯 이휘경에게도 천송이 자신은 없었다. 그는 과연 천송이를 보고 있기나 한 것일까? 그는 과연 천송이의 무엇을 사랑했던 것일까? 유세미는 과연 천송이와 친구이기는 했던 것일까? 서로를 얽매고 있는 이기와 욕망들이 더욱 자신을 외롭게 만든다. 고립시키고 단절시킨다.
사정이 어려워지자 먼저 소속사에서 등을 돌린다. 결국은 소속사에서도 자신들의 이익이 우선이다. 매니저 역시 소속사와의 관계가 틀어지며 관계가 단절되고 만다. 그 전에 이미 드라마도 CF도 사진촬영도 중단되고 말았다. 그토록 의지하던 아버지마저 이제는 소식조차 알 수 없게 되어버리고 말았다. 하나밖에 없는 동생 역시 자신과 거리를 두려 하고 있다. 어머니는 자신을 보려 하지 않는다. 모두의 스타에서 모두의 원망과 저주를 들어야 하는 신세로 전락해 버리고 말았다. 그런데도 수백년의 시간도, 죽음이라고 하는 단절마저 끝내지 못한 인연이 있다. 운명이라 해야 하지 않을까. 단 한 사람. 단 하나의 운명이다. 우연처럼 그들은 다시 수백년의 시간을 지나 한 공간에서 만나게 된다.
매니저 없이는 아무것도 못한다. 자신의 차를 운전하는 것도, 차에 기름을 넣는 것조차, 그리고 사고가 났을 때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하는 기본적인 것들마저도. 커피를 즐기는데 커피를 어떻게 주문해야 하는지도 모른다. 그야말로 외계인이다. 덧없는 관계에 갇힌 채 자기 자신마저 잊고 산다. 타인으로서 마치 인간처럼 함께 어울려 살아야 했던 도민준의 고독이 겹친다. 그녀는 이미 오래전부터 알몸에 혼자였다. 누구보다 그녀 자신이 그것을 잘 알고 있었다.
이재경(신성록 분)의 캐릭터가 흥미롭다. 자기가 원한 삶이 아니었다. 자기가 원해서 선택한 길이 아니었다. 수의사로서 동물들을 치료하다 보면 때로 원하지 않는 선택을 해야 하는 순간들이 있다. 사람과 다르다. 사람이라면 목숨부터 살리고 보려 할 테지만 동물을 치료할 때는 비용과 수고를 생각하지 않으면 안된다. 일찌감치 포기하고 고통이나마 줄여주는 것이 동물을 위한 최선을 때가 있다. 너무나 쉽게 동물을 포기하고 마는 사람에 대한 기억과 스스로 선택해야만 했던 순간들에 대한 경험이 그의 행동을 결정한다. 단순한 사이코패스라기보다는 인간의 나약함이 만들어낸 왜곡된 자아의 모습일 것이다. 동물을 좋아해서 자원봉사에 빠지지 않으면서도 쉽게 동물의 죽음을 말하는 모순은 그로부터 비롯되었을 것이다.
이화가 죽게 되는 과정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낯선 UFO의 존재에 혼란스러워하는 백성들의 마음을 이해하고 어루만지려 하기보다 다른 자극적인 사건으로 그것을 덮고 잊으려 한다. 조정에 보고를 올려야 하지만 그조차 자의로 누락시킨다. 얼굴 한 번 보지 못하고 신랑을 잃은 가엾은 어린 며느리일 테지만 단지 자신의 가문의 이름을 높여줄 수단으로 보았을 뿐이다. 이화 아버지의 어설픔 역시 딸이 살아있음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한 허위의 결과였을 것이다. 소통의 단절이 이화를 쫓고 죽음으로 내몬다. 그 모든 관계를 아우르는 것이 바로 '조선'이라는 시대의 이름일 것이다. 그녀가 사랑한 한 사람은 이 세상의 존재가 아닌 외계인이었다. 외계인은 그녀의 마음에 대답하지 않았다.
드라마를 정의하는 두 단어일 것이다. '고독'과 '소외'. 그래서 드라마가 추구하는 두 가지 주제일 것이다. '인연'과 '사랑' 이 모두를 압축하면 하나의 단어가 만들어진다. '운명'. 그리고 모든 운명은 전설로 예정되어진다. 시리기에 따뜻함에 기댄다. 사람에 기댄다. 사랑을 기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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