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이다. 정체도 알 수 없는 역사를 빙자한 판타지의 홍수속에 정말이지 오랜만에 보는 제대로 된 역사드라마일 것이다. 역시나 KBS. 그동안 맥이 끊겼던 역사드라마의 정통이 다시금 부활하는 듯하다. '정도전'. 믿고보는 KBS 역사드라마의 새로운 이름일 것이다.
이인임(박영규 분)에 대한 묘사에서 무릎을 치고 말았다. 단순한 간신이 아니었다. 공민왕(김명수 분)의 고명을 받들어 우왕을 가까이에서 지켰던 고명대신이기도 했었다. 목은 이색(박지일 분)과도 친분이 있었고, 최영과도 교분이 있었으며, 이성계와는 사돈지간이었다. 말하자면 이인임이란 고려말기의 모순 그 자체와도 같은 존재였다. 고려왕실을 지키고 권문세족의 기득권을 지킨다는 것은 기존의 고려의 질서를 지킨다는 의미였다. 그리고 그것은 이미 한계에 이르러 있던 고려의 현실에서 이인임 자신이야 말로 극복의 대상이었다는 뜻이기도 했다. 어떤 식으로든 고려는 바뀌어야만 했다. 그것을 보다 구체적으로 보여주려는 듯하다.
왕에 대한 충성심도 있다. 현실에 대한 나름의 냉철한 판단과 이해도 갖추고 있다. 인재를 알아볼 줄도 안다. 시세를 읽을 줄 알고 그에 대처하는 방법 역시 알고 있다. 정치인으로서 경륜이나 지혜가 결코 부족하지 않다. 그러나 탐욕스럽다. 욕심도 많고 야심도 크다. 목적을 위해 수단을 가리지 않는 비정함도 있다. 인재를 아끼는 마음에 정도전(조재현 분)을 살리고자 했지만 필요한 순간이 오자 거리낌없이 그를 경복흥(김진태 분)을 공격하기 위한 수단으로 사용하려 한다. 왕을 위해서. 왕이 바라는 세자를 위해서. 나아가 고려를 위해서. 이미 고려 그 자체가 되어 있던 권문세족의 기득권을 위해서도 고려는 지켜져야만 했다. 자신을 공격하는 정도전의 불손함에도 관용을 베풀려 한 것도 그래서일 것이다. 정도전과 같은 인재가 자신의 고려에 필요한 때가 반드시 있을 것이다.
인물이 복잡해지니 스케일도 커진다. 단순히 간신과 그를 몰아내려는 젊은 개혁가와의 싸움이 아닌 고려라고 하는 시대 전체를 아우르게 된다. 즉위초반 고려를 일신하고자 의욕을 불태웠던 개혁군주에서 어느새 현실에 치이고 짓눌리며 좌절하고 만 한 사내가 되고 만 공민왕의 모습이 보인다. 노국공주를 사랑한 것이 아니었다. 그저 노국공주와 함께했던 지난 시절의 아름다운 추억에 사로잡혀 있을 뿐이었다. 끝내 아무것도 할 수 없었던 무기력한 자신에 대한 체념과 분노가 있었다. 고려의 왕실을 지켜야 한다는 태후의 꾸짖음조차 그에게는 버거운 짐으로 여겨질 뿐이다. 마지막으로 한 가지 자기의 뒤를 이을 고려의 왕 만큼은 자기의 의지대로 세우고야 말겠다. 강령군이 자신의 아들이든 아니든 이미 그에게는 아무 상관이 없었다. 그를 중심으로 고려의 마지막 역사가 움직이기 시작한다.
강령군을 세자로 세우기 위해 권문세족인 이인임에게 손을 내민다. 어차피 공민왕이 권문세족과 대립했던 것도 권문세족의 힘을 줄임으로써 무신정권 이래 실추된 고려왕실의 권위를 다시금 세워보려는 의도에서였었다. 더구나 권문세족과 대립하는 공민왕의 정책을 뒷받침한 것도 역시나 또다른 권문세족의 협력자들이었다. 더 많은 백성을 징발하고 그들의 가족에게까지 죄를 묻자는 이인임의 제안을 주저없이 받아들이는 공민왕의 모습에서 기존의 개혁군주의 이미지와 충돌하는 배반을 경험하게 된다. 하지만 그것이 옳다. 고려는 고려백성의 나라가 아닌 고려국왕 개인의 나라였다. 그를 위해 필요하다면 얼마든지 권문세족과 손을 잡고 지금보다 더 큰 것들도 그들의 손에 쥐어줄 수 있다.
어째서 고려가 아닌 조선인가. 고려왕실을 유지하며 고려를 개혁하는 것은 불가능한가. 고려의 모순이 권문세족이라면 우왕의 즉위를 통해 고려의 왕실과 권문세족은 하나가 되고 있다. 그것은 또한 공민왕 자신의 선택이기도 했다. 아니 그 이전에 공민왕 자신조차 어쩔 수 없는 고려의 현실이었을 것이다. 고려를 끝냄으로써 그동안의 고려의 모순들도 단절시킨다. 권문세족이 신진사대부가 된다. 신진사대부로 불리게 된 새로운 지배집단은 권문세족과는 또다른 모습을 가지게 될 것이다. 공민왕이 환상임을 깨닫는다. 공민왕에 대한 기대가 단지 신기루에 불과했음을 비로소 깨닫게 된다. 고려에 대한 미련을 접는다. 정몽주(임호 분)와 정도전의 입장이 갈리게 된다. 정도전이 본 것이 바로 고려가 가진 한계였다.
권문세족과 신진사대부가 명확히 구분되어지는 것이 아니었다. 당장 목은 이색만 하더라도 신진사대부들의 정신적 지주였지만 정작 자신 또한 권문세족의 일원이었다. 공민왕의 개혁정책의 일환으로 중앙으로 올라온 지방의 향리출신들 역시 대대로 지역에서 영향력을 행사해 온 호족들이었다. 그들 자신이 기득권이었다. 다만 새로운 사상이 그들에게 새로운 고민을 부여했다. 자신들이 지배할 세상의 모습을 고민할 수 있다는 것이야 말로 지배계급의 특권일 것이기 때문이다. 진정으로 새로운 세상에 대한 신념을 가지고 조선건국에 동참한 이들이 몇이나 될까? 대세였고 예정된 운명이었다. 역시 정도전과 정몽주의 운명이 갈리는 부분이다. 정도전은 새로운 지배계급 안에서도 철저히 비주류로 시작하고 있었다.
원래 정몽주가 정도전보다 윗줄에 있었다. 이성계가 낙마하여 병석에 누웠을 때 이성계일파가 속수무책으로 정몽주에게 몰릴 수밖에 없었던 이유였다. 이성계를 중심으로 모여든 무장과 사대부 가운데 이성계 다음 서열이 바로 정몽주였다. 정몽주가 이성계의 건국을 도왔다면 정도전은 없었다. 학식으로나, 정치인으로서의 식견이나, 심지어 군사적인 재능에서마저 정도전은 정몽주에 미치지 못했었다. 어떻게 그려갈 것인가가 궁금해진다. 마지막 순간까지 동지였으며, 끝내 서로를 향해 칼을 겨누어야만 했었다. 임호의 낙천적이고 넉넉함이 엿보이는 정몽주가 조재현의 강박적인 답답함마저 느껴지는 정도전과 좋은 대비를 이룬다. 이들이 이성계와 함께 고려의 마지막 역사를 써나간다.
1990년대 후반 역시 KBS에서 방영되었던 '용의 눈물'에서 태종 이방원을 연기했던 유동근이 이번에는 아버지인 이성계를 연기한다. 당시 이성계를 연기했던 김무생은 이미 고인이 된지 오래다. 1983년 방영된 대하드라마 '개국'에서 젊은 정도전을 연기했고 역시 '용의 눈물'에서도 노년의 정도전을 연기했던 김흥기씨 또한 오래전에 유명을 달리했다. 그를 뛰어넘어야 한다. 조재현의 짐이 무겁다. 많은 사람들에게 아직 정도전은 김흥기로 기억되고 있다. 김명수의 짙은 허무마저 느껴지는 공민왕의 모습은 새로우면서 처절하다. 새로우면서 다르다.
지나치게 바르고 올곧은 정도전의 모습이 전형적인 영웅의 모습을 보는 것 같다. 그러나 고려말의 혼란은 그런 영웅의 모습을 필요로 하고 있을 것이다. 때로 드라마란 뻔한 길임을 알면서도 가야 하는 때가 있다. 무엇을 그릴 것인가. 무엇을 그리려 함인가. 기대가 크다. 재미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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