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타깝다. 결국 이렇게 흘러가고 마는가. 그저 영웅 정도전(조재현 분)을 위한 적을 하나 만들어 놓으면 되는 것인가. 쉬운 길을 선택한다. 굳이 이인임(박영규 분)이 악이 아니어도 되었다. 그저 고려의 모순 그 자체인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물론 아직도 이인임은 크다.
명덕태후(이덕희 분)의 일갈에 한숨부터 쉬게 된다. 어째서 공민왕(김명수 분)은 그에 정면으로 반박하지 못했는가. 외척인 경복흥(김진태 분) 또한 권문세족의 하나일 것이고, 최영은 그 권문세족과 결탁한 무신세력의 수장이었다. 이색 역시 명문가의 후손으로 단지 드러난 현상만을 우려하고 바로잡으려 할 뿐이었다. 공민왕을 막아선 것이 바로 그들이었다.
오히려 이인임을 필두로 한 권문세족이야 말로 고려왕실을 지탱해 줄 유용한 정치파트너임을 깨닫고 만다. 이인임을 용인하고 중용함으로써 왕실을 안정시키고 고려를 지키고자 한다. 그러나 정도전은 영웅이었다. 그는 결코 꺾여서는 안되었다. 공민왕에 대한 대중의 인식과 너무 충돌해서도 안되었다. 정도전이 왕을 설득한다. 왕이 그에 응한다. 이인임이 아닌 정도전만이 고려를 다시 일으킬 수 있는 새로운 희망이다.
그러고 보면 이인임과 정도전의 충돌이 너무 빨랐다. 고작 미관말직이었다. 존재조차 미미했다. 이인임과 맞상대할 인물은 아니었다. 지금도 그릇의 크기가 너무 차이가 난다. 그래서 경복흥이 필요했다. 이인임과 경복흥이 대립하고, 외척인 경복흥을 제거하기 위해 정도전이 필요했다. 마지막에는 공민왕과도 대립하며 이인임은 악으로써 완성된다. 정도전은 그 악에 홀로 맞서는 무결한 영웅이 된다. 드라마 초반 인상을 결정짓는데 아주 중요한 역할을 하리라.
차라리 이인임을 현실에 영합하려는 충신의 모습으로 그렸어도 좋았을 것이다. 경복흥과도 사이가 좋다. 나름대로 권문세족의 이익을 지키려 하면서도 공민왕을 도와 고려의 안정을 꾀하려 한다. 다만 그 방식은 기존의 질서를 지키는 것이어야 할 것이다. 정도전과의 대화에서도 그런 부분들이 드러난다. 지금의 고려가 가장 좋은 고려다. 지금의 고려를 지키는 것이 바로 고려를 지키는 것이다. 그런 이인임을 가까이할 수밖에 없는 것이 공민왕과 고려의 한계이기도 했다. 그러한 모순은 이인임이 집권하고 보다 선명하게 드러난다.
신진사대부에 대한 묘사 역시 지나치게 정도전을 영웅화하려는 의도가 보이기는 하지만 오히려 그래서 만족할 수 있었다. 권문세족이거나, 지방의 호족인 향리출신이었다. 실제 조선의 건국과정에서 시행되었던 많은 개혁정책들이 다름아닌 이들 신진사대부에 의해 좌절하거나 다시 원래대로 돌려지고 있었다. 현실의 모순을 바로잡으려 하지만 근본적으로 바꾸려 하지는 않는다. 이색의 성향이 그러했다. 다만 정도전에게는 그럴 기회조차 주어지지 않았다. 항상 권력의 중심과 관계를 가지고 있었던 정몽주와 정도전의 선택의 차이가 여기서 나타난다.
당대의 평가가 그다지 좋지 못했다. 그 이유를 알 것 같다. 영웅으로 묘사하려 했지만 주위에 대한 묘사가 허술해서 정도전 혼자서만 튀고 만다. 배우들의 연기는 훌륭한데 그것을 지탱해 줄 기둥에서 헛점이 발견된다. 아직은 작은 채로도 좋다. 정도전과 상관없이 역사는 흘러간다. 그 가운데 정도전은 자신의 역할을 찾아간다. 자신의 자리를 찾아낸다. 너무 상관없이 전면에 내세우니 불편하게 부대끼는 느낌마저 받는다.
속내를 겉으로 드러내지 않는 노회함이 이인임을 그대로 옮겨놓은 것 같다. 하기는 박영규 아니던가. 김명수의 광기는 공민왕의 혼란한 내면을 고스란히 보여준다. 임호의 연기를 보며 정몽주가 원래 그런 인물이 아니었을까 생각하기도 한다. 정통사극의 힘이다. 배우의 힘이다. 조금만 더 치밀하고 단단했으면. 너무 지나친 기대는 아니었을까.
물론 해석의 차이다. 이해하는 방식이 다른 것이다. 전에도 말했듯 드라마란 알면서도 가야 하는 길이라는 것이 있다. 충분히 예상할 수 있는 뻔한 길이지만 그래서 또 익숙한 재미를 기대할 수 있기도 하다. 아쉽지만 그 아쉬움마저도 드라마의 또한 재미다. 즐겁기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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