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래 우왕(박진우 분)이 이인임(박영규 분)이 싫어서 그를 치려 한 것이 아니었다. 이인임이 나이가 들어 뒤로 물러나고 이인임의 무리 가운데 임견미(정호근 분)가 그 자리를 물려받았다. 그리고 우왕과 대립하기 시작했다. 비록 권신으로서 모든 권세를 한몸에 누리고 있었음에도 철저히 왕의 신하로서 정도를 지켰던 이인임에 비해 임견미는 한결 더 거만했고, 무례했으며, 무엇보다 비교할 수 없이 탐욕스러웠다. 저 이인임에 의해 길러진 우왕조차 도저히 더이상은 참아넘기기 힘들 지경에 이르고 있었다. 그래서 최영을 시켜 임견미를 친 것이었다.
이인임을 공격하는 와중에 임견미까지 그 무리로써 한꺼번에 처벌받은 것이 아니었다. 임견미와 염흥방이 그 대상이었고, 이인임은 단지 그들 무리의 수장이었던 이로써 이미 뒤로 물러나 있었음에도 그에 대한 모든 책임을 물으려 했던 것이었다. 아니 임견미와 염흥방만이 아니었다. 이인임이야 말로 당시 고려조정이 가지고 있던 모든 모순과 부조리 그 자체였다. 그래서 이미 유배지에서 죽은 뒤임에도 그를 복권시키려는 시도가 있었던 것과 동시에, 그를 모든 악의 근원으로 보고 그의 일족에마저 연좌하려는 극단적인 증오가 나타나고 있었던 것이었다. 결국 모든 시작은 임견미로부터 비롯되고 있었을 것이다.
그를 위한 복선이었을 것이다. 개경에 쌀값이 폭등하는 것을 기회로 이익을 누리려는 임견미와, 그것을 힘으로 누르며 정도를 지키라 타이르는 이인임의 모습은. 그러나 임견미는 이인임의 말을 알아들은 눈치가 아니다. 바로 잊어버렸다. 이인임이 무슨 말을 했는지. 어떤 의도로 그런 말을 했는지. 염흥방(김민상 분)과 하륜(이광기 분)이 조언을 해주고 있지만 역시 임견미에게는 닿지 않는다. 이인임이 경고한 바로 그것으로 인해 임견미는 자신을 망치고 끝내 이인임마저 망치고 만다. 역사를 모르는 사람조차 나중에는 무릎을 치고 말 정도로 절묘한 장치라 할 것이다. 어떻게 임견미가 이인임이 몰락하는 뇌관이 되어줄 것인지.
고작 조그만 쌀가게에서 쌀값 얼마를 올려받아 생기는 문제가 아닐 것이다. 그 정도 쌀가게 몇이 가격을 내려받는다고 당장 개경의 식량문제가 해결되는 것도 아닐 것이다. 보다 근본은 다른 곳에 있다. 잦은 전란으로 백성들이 농사도 마음놓고 짓지 못한다. 외적에 의해 약탈당하고, 혹은 약탈을 피해 농지를 버리고 도망치고, 그도 아니면 외적을 막느라 조정에 의해 물자와 노동력을 징발당하여 더이상 마을에 남은 것이란 없다. 그래도 겨우 농사를 지어 곡식을 거두는가 싶으니 조금이라도 힘이 있는 자들이 달려들어 그것마저 모조리 빼앗아 간다. 왜구의 발호로 인해 지방의 쌀이 개경에 닿지 못하는 것은 부차적인 문제다. 백성이 농지를 버리고 떠돌며 유민이 되어가고 있다. 고작 쌀값을 올려받은 상인 몇 명을 혼낸다고 해결될 수 있는 상황이 아닌 것이다. 그러나 근본을 묻고 그 방법을 고민하기보다 당장의 눈에 보이는 범죄자 몇을 처벌하고 손이 닿는 몇 명의 가난한 백성들만을 사재를 털어 먹일 뿐이다.
최영의 한계다. 아니 보수의 한계다. 보수의 입장에서 이미 세계는 완결되어 있다. 사소한 부분이야 수정도 교정도 가능하지만 전체적으로 크게 고치거나 바꿔야 할 필요까지는 없어 보인다. 나머지는 개인의 문제다. 권문세족이 조금만 자신의 욕심을 버리고, 고관대작들이 조금만 더 자신을 양보하고 희생하며, 백성들 역시 그런 조정의 뜻을 받들어 어김없이 정한 바를 지키고 따른다. 그런다면 더이상 문제될 것은 없다. 권문세족이라고 하는 고려사회의 모순을 바로잡기 위해 도당에서 그들을 꾸짖는 것이 아니다. 권문세족 또한 고려사회의 일원으로써 고려를 위해 신분에 맞는 도덕적 책임을 깨닫도록 다그치고 있는 것에 불과하다. 최영이 생각하는 바른 미래란 올바른 권문세족과 군부가 있는 고려다. 권세를 더 오래 누리고 싶으면 해먹더라도 정도를 지켜가며 해먹으라는 이인임의 일갈이 떠오르는 부분이다. 무슨 차이가 있을까? 정도전(조재현 분)이 최영에게 실망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근본을 부숴야 한다. 그런 점에서 정도전과 정몽주(임호 분)가 추구하는 바는 일치할 것이다. 근본을 바로잡아야 한다. 권문세족과 국정까지 넘보는 무신세력을 정리하고, 성리학이 추구하는 이상적인 제도로써 고려를 바로세운다. 물론 차이는 있다. 그 차이가 정도전과 정몽주의 운명을 가른다. 정몽주가 꿈꾸는 미래란 모든 모순이 사라진 바른 고려였다. 그러나 정도전이 꿈꾸는 미래에는 권문세족과 마찬가지로 고려 역시 없었다. 고려의 모순이란 고려 그 자체였다. 고려를 부수지 않고 내버려둔 채 고려의 산적한 문제들을 모두 해결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실제 고려의 지배층 가운데 상당수가 조선의 지배층으로 편입되며 고려의 모순 가운데 역시 상당수가 조선에서도 계승된다. 정도전은 고려 자체를 용납할 수 없었다.
어째서 이성계(유동근 분)인가? 고려인이 아니기 때문이었다. 조상이 고려인이고 이성계 또한 고려에서 벼슬을 살고 있다. 그러나 그가 태어난 곳은 아직 고려에 속하지 않았던 동북면의 경계였으며, 그의 집안은 대대로 고려를 지배하고 있던 몽골로부터 벼슬을 받고 있었다. 아버지 이자춘의 선택에 의해 고려로 귀순하고 고려의 벼슬을 받았을 뿐 고려에서 나고 자란 고려인과는 아무래도 생각이 크게 다를 수밖에 없었다. 이성계와 의형제인 이지란(선동혁 분)이 여진족이었고, 그의 가병 역시 상당수가 여진족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국경이 아닌, 왕조도 아닌, 어떤 선입견에도 사로잡히지 않은 객관적인 눈으로 고려를 볼 수 있는 위치에 있다. 그가 태어나고 자란 동북면에는 처음부터 국경도 왕조도 없었다. 사람만 있었다.
이미 처음부터 반역을 꿈꾸고 있었다. 그것은 반역조차 아니었다. 고려는 이성계의 조국이 아니었다. 아버지와 자신을 받아들여주었기에 주어진 벼슬만큼 고려의 왕들에게 충성을 다했다. 고려로부터 받은 벼슬과 누리고 있는 혜택 만큼 고려를 위해 자신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했다. 그러나 고려가 자신을 배반했을 때. 고려가 자신을 버리려 했을 때. 과연 다른 충신들처럼 그는 자신과 자신의 혈육과 자신의 친인들을 기꺼이 희생의 제단에 올리 수 있겠는가. 하물며 드라마에서 이성계는 사람을 보았다. 고려의 영토와 고려와 왕조가 아닌 고려의 수많은 가엾은 처지의 백성들을 보고 있었다. 무엇이 백성들을 위한 최선인가?
고려를 무너뜨릴 힘이 없어서 참고 당하고만 있는 것이 아니다. 고려를 무너뜨리고 나면 그 다음이 있어야 한다. 고려를 대신할 다른 무언가가 있어야 백성들이 고달프지 않다. 고려와 다 똑같고 왕과 왕조의 이름만 바뀌어봐야 달라지는 것은 아무것도 없느 것이다. 그는 이미 왕이다. 고려가 자신의 몸이고, 고려의 백성들이 자신의 몸에 흐르는 피와 살이다. 이방원(안재모 분)은 그런 점에서 이미 어려서부터 고려의 구조 안에 머물며 고려를 경험하고 고려의 권력을 체험했다. 그가 생각하는 나라란 고려이며, 그가 가지고자 하는 권력 역시 고려의 권력이다. 그것이 자신의 손에 쥐어지기만을 꿈꾼다. 이방원이 가지고자 했던 조선 역시 자신의 조선이었다. 정도전과 이방원이 충돌한 이유였다. 그것을 암시한다.
버릴 장면이 하나도 없다. 역사라는 스포일러를 알기에 하나하나가 암시가 되고 복선이 된다. 이인임과 임견미의 대화에서. 이성계와 이방원의 부딪힘에서. 최영을 바라보는 정도전의 눈에서. 그리고 그것은 역사가 아닌 현실의 이야기로 보여지기도 한다. 보기에는 시원하다. 악인을 벌준다. 법을 어긴 범죄자를 일벌백계한다. 굶주린 백성들에게 죽을 쑤어준다. 가식없는 진심이다. 그래서 백성들은 최영을 따른다. 정도전과 백성들의 눈이 교차한다. 개인적으로 존경받아 마땅하지만 시대가 요구하는 인물인가. 정도전은 돌아선다. 멀리서 개경을 바라보며 정도전은 마음속에서 정몽주에게 작별을 고한다. 자신은 자신의 길을 갈 것이다.
일부러 힘을 주거나 하는 장면은 없다. 억지로 쥐어짜거나 설정한 듯한 장면들 역시 그다지 보이지 않는다. 자연스럽게 녹아든다. 그럴 것이다. 당연히 그랬을 것이다. 실제의 역사의 한 장면처럼. 아니라는 것을 안다. 이미 역사와 상당히 먼 다른 길을 걸어왔다. 그럼에도 납득하고 만다. 그 안에 도도히 흐르는 '의식' 때문이다. '정신'이라고도 부른다. 역사에 대한 이해다. 뼈를 취하고 살을 다른 것으로 대신한다. 그 뼈가 역사의 전부다.
백척간두의 상황이다. 이인임의 전횡은 갈수록 도를 넘고 있다. 측근들의 부패 역시 선을 넘어선지 오래다. 백성들의 삶은 갈수록 피폐하다. 대안이 보이지 않는다. 길이 보이지 않는다. 유일한 대안인 이성계가 이인임의 의도에 의해 궁지로 내몰리고 있다. 전자에서는 무적이지만 개경의 정가에서는 이인임이 절대적인 힘을 가지고 있다. 이인임이 이성계를 죽이려 한다. 더이상 희망을 찾을 수 없을 때 정도전은 이성계를 찾아 먼 함흥까지 간다. 이방원이 이성계에게 나라를 세울 것을 묻는다. 야심이 깨어났으나 잦아들 기미를 보이지 않단. 불단 앞에서 정도전을 맞는다. 이성계의 안에서는 무엇이 들끓고 있을까?
하여튼 또 먹는다. 쉴 새 없이 먹는다. 이번에도 이성계를 만나기에 앞서 국밥을 게걸스럽게 먹고 있었다. 정도전을 설명하기 위한 의도된 장치일 것이다. 살기 위해 먹는다. 먹기 위해 산다. 먹는다는 행위는 삶의 가장 근본에 닿아 있는 가장 원초적인 행위일 것이다. 고담준론이 아니다. 현학적인 이론이 아니다. 당위적인 명분론도 아니다. 바로 삶이다. 바로 생존이다. 그것이 곧 정의다. 먹는 행위 자체를 통해 그 의지를 날처럼 벼려낸다. 살리고야 말겠다. 양지와 천복마저 백성과 함께 가슴에 묻는다. 삶과 죽음이 그로써 갈린다. 살기 위해. 주제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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