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생 아버지를 원망하고 살았던 어떤 사람의 이야기다. 처음에는 무덤덤했다. 죽었구나 남의 이야기처럼 들리더란다. 그런데 정작 상복을 입고 빈소에 들어서는 순간 자신도 모르게 펑펑 눈물이 쏟아지더라 했었다. 기억조차 할 수 없이 수많은 기억들이 교차하고, 주체할 수 없이 감정들이 밀려들며 그만 그 자리에서 목놓아 울어버렸다 했었다. 원망도 사라지고 그저 가엾은 마음과 미안한 감정만이 남게 되더라.
정말 후련하게 울고 있었다. 조금씩 벅차오르면서, 끝끝내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북받쳐 오르면서, 그리고 막혔던 모든 기억과 감정을 실어 눈물과 함께 쏟아낸다. 말로 다하지 못할 수많은 말들이 비명처럼 한꺼번에 터져나온다. 그렇게 서러웠다. 그렇게 모든 서러움을 담아 시원하도록 울고 있었다. 김현중(신정태 역)라고 하는 배우구나. 그 순간 그는 아버지에 대한 모든 미움과 원망을 연민과 그리움으로 쏟아내는 불초한 아들의 모습 그대로였다. 아마 실제의 신정태가 아버지의 빈소에서 눈물을 흘렸더라도 지금처럼 울고 있지 않았을까.
가족을 잃은 슬픔이란 그런 것이다. 아무리 미워도. 아무리 원망스러워도. 더구나 자신이 버린 것이 아니지 않은가. 그토록 그리고 그리워하다 끝끝내 그것이 원망으로 미움으로 바뀐 것이었다. 웃는 얼굴로 다시 보지는 못하지만 떠나는 모습만큼은 좋게 남기고 싶은 것이 사람의 마음인 것이다. 싫었던 기억, 나빴던 기억들은 눈물과 함께 떠나보내고 좋았던 기억, 기뻤던 순간들만을 남기려 한다. 아니 설사 전혀 모르는 사람이더라도 그것이 죽은 이를 보내는 산 사람의 마음이기도 한 것이다. 김현중을 다시 본다. 울 줄 아는 배우였다. 드물게 제대로 울 줄 아는 배우였을 것이다. 그에게도 그런 아프고 시린 기억이 있었던 것일까?
아니나 다를까 황방의 방주 설두성(최일화 분)이 아버지 상하이매 신영출을 죽인 배후로 등장한다. 신정태를 상하이로 데리고 온 왕백산(정호빈 분)이 신영출에게 치명적인 상처를 입힌 당사자였다. 은연중 암시하던 정재화(김성오 분)의 배신은 그저 가능성으로 끝나고 만다. 클럽 상하이를 되찾기 위해 왕백산이 신영출을 공격하고, 이미 죽음이 결정된 상태에서 가야(임수향 분)가 마지막 일격을 가했다. 원래의 일국회에 이어 황방까지 신정태의 적으로 등장하는 순간이다. 상하이의 지배권을 둘러싼 황방과 일국회의 대립이 심화되어가는 가운데 신정태에게 지워진 운명의 빚만 커져가고 있다. 일국회와 황방 모두 신정태가 상대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런 점에서 정재화의 역할이 보다 중요해졌다. 미묘하다. 가장 복잡한 캐릭터일 것이다. 상하이매 신영출을 의지했고, 그러면서도 신영출을 질투했다. 상하이매 신영출의 그림자는 그처럼 컸으며, 그런 것치고 그의 부재는 너무 길었다. 곳곳에 신영출의 그늘은 짙기만 한데 정작 신영출은 어디에도 없었다. 그는 고아였다. 그리고 버려졌다. 의지할 곳을 찾는다. 기대고 숨을 곳을 찾는다. 신영출이 자리를 비운 사이 그의 역할을 대신하며 마침내 신영출을 대신할 수 있는 무언가를 찾아내게 된다. 신영출이 사라진 대신 신영출이 누렸던 부와 권력과 명성이 그림자처럼 정재화에게 따라붙는다. 그것은 중독이었다.
말하자면 정재화의 신영출에 대한 감정은 다른 의미에서 신정태의 그것과 유사하다 할 수 있을 것이다. 그토록 그리워하는데 그리워할 대상이 더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차라리 원망으로 바뀐다. 원망은 아이를 부모로부터 독립하도록 만든다. 신정태는 아버지를 잊으려 했지만 잊을 수도 없기에 정재화는 신영출의 그림자로부터 벗어나려 한다. 신영출이 하지 못한 것들, 신영출이라면 하지 않을 일들을 자신은 해낸다. 황방과 맞서고 황방의 방주 설두성과 담판을 짓는다. 부모에게 인정받고 싶은 아이의 심리와도 닮았을 것이다. 가야가 신영출의 마지막 숨을 끊었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에 그는 누구보다 민감하게 반응한다. 이후의 선택이 정재화의 캐럭터와 비중을 결정하게 될 것이다. 정재화의 역할이 결정된다.
일국회와 황방의 첫번째 타겟이 된다. 일국회와 황방이 모두 정재화를 노린다. 비록 클럽 상하이를 직접 관리하고 있지만 방삼통에 근거한 정재화의 힘은 이들에 한참 미치지 못한다. 풍전등화와 같다. 언제 목숨을 잃어도 이상하지 않다. 정재화의 위기는 또한 방삼통의 위기이기도 하다. 신정태의 첫번째 적이 되거나, 아니면 신정태의 마지막 협력자가 되거나. 초반의 설정이 많이 바뀌었다. 방삼통에 대한 권리를 인정받고 들떠있는 정재화의 모습은 그에 대한 설정 역시 처음의 그것과 상당히 다를 수 있음을 보여주고 있을 것이다. 최소한 정재화에게도 납득할 수 있는 이유가 있었다. 정재화의 비중도 커져간다. 다만 아직 선택은 열려있다.
바뀐 설정이 이런 식으로도 이용될 수 있다. 이제는 사라져버린 김수옥의 캐릭터가 압록강을 건너는 도중 죽은 것으로 설정되며 김옥련(진세연 분)과 신정태의 사이에 또다른 긴장을 부여한다. 자신을 돕다가 목숨을 잃었다. 살았을 적 자신을 향한 한결같은 마음을 보여왔었다. 그런데 이제 신정태를 다시 만나게 됐다고 마냥 좋아하려니 마음에 걸릴 수밖에 없다. 가야는 멀어졌다. 어떤 변명으로도 신정태의 아버지 신영출의 마지막 숨을 끊은 것이 가야라는 사실은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신정태도 김옥련에게 돌아갔다. 그러나 이대로 두 사람이 이어지기에는 너무 쉬운 것이 아닌가. 좋아하면서도 좋아할 수 없고, 좋아하는데도 좋아해서는 안되는 이유가 필요하다. 죽은 김수옥이 살아있는 김옥련을 마지막까지 돕는다.
액션의 스타일도 많이 바뀌었다. 땅을 구르며 흙투성이가 되어 싸우던 스타일이 화려하고 멋스러운 중국무협의 그것과 더 닮아간다. 부분의 동작을 강조하고, 각각의 자세에 집중한다. 그래서 멋스러운데 이전의 질박한 맛은 덜하다. 목숨을 건 싸움의 처절함보다 액션의 화려함에 더 눈길이 간다. 갑자기 나타나 신정태를 공격하는 자객의 검술은 일본검도와는 다른 중국검술의 느낌이 강하다. 이미 신이치(조동혁 분)를 통해 일본검술을 경험한 신정태가 당황하는 이유다. 어쩌면 왕백산이 신정태를 시험하기 위해 보낸 살수인지도 모르겠다. 아직 일국회에게는 신정태를 제거해야 하는 당위나 명분이 없다. 신영출의 관을 두고 왕백산과 가야가 겨루는 장면 역시 사족에 가깝다. 제법 멋스럽지만 이전이라면 하지 않았을 연출이었다.
황방과 일국회가 상하이의 이익을 두고 다투는 가운데 일국회에 이어 신정태가 황방을 상대해야 하는 명분이 주어진다. 아직 방삼통에 대한 권리는 정재화의 수중에 있고, 방삼통에서 평범한 일상을 보내던 신정태에게는 방삼통을 노리는 황방과 일국회와 맞서야 하는 이유가 생긴다. 김옥련과의 사이에도 아직 풀지 못한 숙제가 남아 있다. 가야와의 숙명은 더 멀어지는 듯한 느낌이다. 마치 게임같다. 도야마 덴카이(김갑수 분)가 해설자로 등장한다. 가야의 숨겨진 의도와 설두성의 계획과 정재화의 사정, 그리고 신정태에게 주어진 숙명과 과제까지. 역시 신정태가 싸워야 드라마가 재미있어진다. 그를 위한 드라마일 것이다. 준비다. 철저히 신정태를 위한 밑손질을 가하고 있는 중이다.
김현중이라고 하는 배우를 주목한다. 불과 얼마전까지 그는 아직 많이 미숙했다. 배우로서의 장래에 대한 회의가 적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배우는 물론 스타로서도 자신의 존재를 과시하고 있다. 연기와 배역에 대한 진지함이 보는 것만으로도 긴장감을 느끼게 한다. 아직 드라마의 중심에서 벗어나 있음에도 신정태의 일거수일투족에 주목하는 이유다. 신정태가 주인공이다. 김현중이 곧 드라마의 중심이다. 자연스럽게 시청자의 시선과 관심을 잡아끈다. 잘생긴데다 이제는 연기까지 잘한다. 그는 천성적으로 스타가 되기 위해 태어났다.
왕이 죽었다. 왕의 아들이 돌아왔다. 왕국은 다른 사람 손에 맡겨져 있다. 왕의 아들에게 왕의 자리를. 왕의 아들로서 물려받은 숙명의 무게를. 복수의 의무와 왕국과 신민에 대한 책임을 감당할 수 있도록. 그를 위한 시련일 것이다. 판이 만들어지고 말들이 배치된다. 인연 또한 준비된다. 예정된 운명처럼. 점입가경을 이루는 상하이의 혼란이 신정태를 운명으로 이끈다. 아직은 그를 위한 힘을 모으는 중이다. 시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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