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험해 보고 싶었을 것이다. 과연 하늘의 뜻이 자기에게 있는지. 운명이 자신을 왕이 되라 하고 있는 것인지. 기회가 주어졌다. 뜻을 이룰 힘마저 쥐어져 있었다. 그러나 과연 이대로 좋은 것인가. 이대로 왕이 되어도 괜찮은 것인가. 하지만 그렇다고 기회를 놓치고 싶지는 않다. 그래서 모든 짐을 우왕(박진우 분)에게 미루고자 한다. 우왕이 결정할 것이다.
알고 있었다. 우왕이 자신을 달갑게 여기지 않는다는 것을. 두려워하고 있었다. 믿지 못하고 불안해하고 있었다. 이인임(박영규 분)이나 최영(서인석 분)을 대할 때와는 전혀 달랐다. 아버지라 부르고 장인이라 불렀다. 항상 가까이 두고 전적으로 믿고 의지하고 있었다. 이들이라면 자신을 배반하지 않을 것이다. 탐욕스럽지만 그렇기 때문에 이인임의 권력을 위해서는 왕인 자신의 존재가 필요했다. 올곧기만 한 최영은 왕인 자신을 향해 무조건적인 충성을 바치고 있었다. 그러나 이성계(유동근 분)는 이인임과는 달리 무엇도 요구하지 않고, 최영과도 다르게 아무것도 바치려 하지 않는다. 도무지 우왕의 상식으로 이해할 수 없는 인물이었을 것이다.
이인임의 고려의 구체제에 속한 인물이었다. 고려의 구체제 안에서 그는 태어났고, 자랐으며, 관직을 얻고, 마침내 최고의 자리에까지 오를 수 있었다. 구체제의 모순과 부조리가 지금의 이인임이 있도록 만든 것이다. 고려의 현재를 부정하는 것은 이인임 자신을 부정하는 것이다. 고려의 현실을 바꾸려 하는 것은 이인임 자신을 있게 만든 바탕을 허무는 것이다. 최영과 다른 이유로 이인임 역시 고려를 배반할 수 없는 입장에 있었던 것이다. 고려가 무너지거나 우왕에게 무슨 일이 생긴다면 가장 곤란할 것은 이인임이다. 최영의 맹목적 신앙에 가까운 충성심은 말할 것도 없다. 그러나 이성계는 고려에서 나지도 자라지도 않았으며 오로지 자신의 실력에만 의지해 지금의 위치에까지 올랐다. 고려와 우왕에 대한 어떤 의리도 빚도 없다.
이성계도 아는 사실이었고, 정도전(조재현 분) 역시 그런 이유로 이성계를 선택하고 있었다. 아무때고 마음만 먹는다면 고려왕실을 무너뜨리고 왕위에 오를 수 있다. 그러지 말아야 할 이유를 도무지 찾을 수 없었다. 고려가 계속되어서 좋을 일도 없고, 고려가 망한다고 특별히 나쁜 일도 없다. 그래서 더 자신을 다잡는다. '반역'이라는 주문이 자꾸만 끓어오르려는 자신의 욕망을 붙들어 세운다. 고려와 고려 왕실을 위해서가 아니다. 바로 자신을 위해서다. 역적이 되고 싶지 않다. 오명을 쓰고 싶지 않다. 철저히 이기적이다.
충성에는 두 가지가 있다. 한 가지는 예양이 그러했듯 자신의 가치를 알아준 이에 대한 쌍무적 계약관계에 의한 보답으로서의 충성이 있을 것이고, 다른 하나는 최영이 보여준 그대로 서로의 신분과 위치에 따라 무조건적으로 바치는 일방적 의무로서의 충성이 있다. 왕이 왕같아야 왕으로써 예우한다. 왕이 아무리 왕같지 않아도 일단 왕인 이상에는 왕으로써 모든 성의와 노력을 다해야 할 것이다. 정도전과 정몽주(임호 분)의 입장이 충돌하는 지점이기도 하다. 왕이 자신을 믿어주지 않는다면 자신도 역시 왕을 위해 충성할 이유 따위 없다. 왕이 자신을 신하로 여기지 않는데 자신만 일방적으로 신하라 여기며 충성을 바칠 필요도 없다. 우왕이나 최영의 입장에서 이성계가 먼저 믿음을 배신한 것이지만, 그러나 이성계의 입장에서는 그들이 먼저 믿음의 가치를 떨어뜨리고 있었다.
그를 위한 시험이었다. 우왕은 과연 자신의 왕인가? 고려는 과연 자신이 충성해야 할 왕조인가? 자신을 신하로 여긴다면 기꺼이 신하로써 우왕에게 충성을 다할 것이다. 최영이 그러했듯, 그리고 이인임이 그러했듯 우왕을 위해 그늘이 되어주고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 주리라. 고려의 충신으로 살다가 죽겠다. 그러나 우왕은 그를 거부했고 끝까지 믿지 않았다. 이성계로서는 더이상 우왕에게 신하로서의 의리를 다할 필요가 없었다. 칼을 들고 내시들과 함께 쳐들어온 우왕을 보는 이성계의 표정은 분노도 실망도 없이 무심하기만 하다. 아니기를 바랐건만 고려왕조는 끝끝내 자신을 거부하고 말았다.
그렇다면 어찌할 것인가. 왕이 왕이 아니고 신하가 신하가 아니다. 더이상 왕도 없고 신하도 없다. 왕을 고르지만 그것은 요식행위다. 누가 되어도 상관없다. 왕을 고르는 모든 과정을 정도전에게 일임한다. 관심이 없다. 이미 고려의 왕은 자신의 왕이 아니다. 더이상 자신에게는 충성을 바쳐야 할 왕이란 없다. 스스로 느끼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동안 이성계를 옭죄어 온 단단한 껍질을 깨고 나오는 순간이었을 것이다. 운명이 왕이 되라 말하고 있다. 하늘의 뜻이 자신을 왕이 되라 가리키고 있다. 최영 앞에서 그토록 역적이 아니라고 항변하던 것이 우스워지려 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 순간에도 그는 진심이었고 최선을 다하고 있었다.
무장은 행동으로 말한다. 최영 역시 그래서 묻고 있는 것일 게다. 우왕 역시 그렇게 따져묻고 있는 것이다. 이성계의 충성은 조건부 충성이다. 상황과 조건을 따져 그 대상을 가리는 충성이다. 우왕 자신이 여전히 그 대상일 것이라고 누가 장담할 수 있겠는가. 이인임이 그랬고 최영이 그랬듯 이성계의 사정에 따라 우왕 역시 거침없이 버려질 수 있다. 실제 이성계는 우왕을 시험했고 그 결과에 따라 행동을 달리하고 있었다. 그런 이성계를 왕인 우왕이 전적으로 믿을 수는 없는 것이다. 이성계는 왕을 폐위시킨 역적이 될 수밖에 없다. 다른 누구도 아닌 이성계 자신에 의해서. 그것은 차라리 예언이기도 했다.
왕으로서의 이성계의 행보가 시작되는 기점이었다. 정도전과의 사이에도 팽팽하던 긴장감이 어느새 사라져 있었다. 왕이 되는 운명을 받아들인다. 왕을 자신의 손으로 끌어내린 순간 더이상 충성의 대상으로서의 왕이란 그에게 존재하지 않는다. 홀로 고뇌하며 흘리던 눈물처럼 미련은 그렇게 흐름속에 씻겨내려간다. 이인임이 움직인다. 새로운 싸움이다.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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