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투의 목적은 어디까지나 적의 전쟁수행능력을 파괴하는데 있다. 그 이외의 어떤 전투도 의미가 없다. 그렇다면 어째서 일본군은 고작 13척의 전선만을 보유하고 있는 조선수군을 공격하고 있었을까?
현존함대전략이라는 것이 있다. 이순신 장군의 협수로통제전략은 그 변형이다. 간단히 적에게 매우 빠른 기병부대가 있는데 지금 부대를 이동시키려는 곳이 딱 그 작전범위다. 어떻게 하겠는가? 당연히 기병의 존재를 염두에 두고 작전을 짜야 할 것이다. 기병이 나타나면 어떻게 대응하고 어떤 방식으로 전개해 나갈 것인가.
더구나 바다에는 전선이라는 것이 없다. 기병이야 산이나 강이 있으면 그것을 이용해 진격을 저지할 수 있다. 성을 쌓을 수도 있고, 참호를 팔 수도 있다. 그러나 바다는 아니다. 결국 배와 배가 맞부딪혀 승부를 결정지어야 한다. 적의 함대를 격멸하지 못한다면 매번 그 존재를 의식하며 작전을 펼치지 않으면 안된다. 한 마디로 함대가 존재하는 그 자체만으로 이미 전투는 치러지고 있는 셈이다. 현존함대전략이다.
벽파진에 조선의 전라우수영이 설치되어 있고, 그곳에 무려 13척이 전선이 배치되어 있다. 무엇보다 그 지휘관이 다른 사람도 아닌 통제사 이순신이다. 마음놓고 작전을 펼치기 위해서는 먼저 이순신의 함대부터 무력화시키지 않으면 안된다. 이순신의 함대를 격멸함으로써 더이상 이순신의 함대를 의식하지 않아도 되는 행동의 자유를 얻는다. 하지만 실패했다. 결국 수영을 옮기기는 했지만 여전히 이순신의 함대는 존재하고 있었고 이후 일본수군의 행동에는 이순신 함대의 존재가 전제되어야 한다.
그런데 문제는 이순신의 함대가 가지는 가치다. 130여 척의 전선으로도 이순신의 한대를 물리치지 못했다. 아니 오히려 한 척의 전선도 파괴하지 못하고 30척의 전선만 잃고 물러나고 말았다. 이순신의 함대를 상대하려면 얼마의 함대가 필요할까? 정작 이순신은 후퇴했는데 일본수군이 밀고 올라오지 못한 이유다. 다시 한 번 그만한 피해를 감당할 여력이 일본 수군에게는 없었다. 일본수군이 자유를 잃게 됨으로써 일본 수군의 보급을 간절히 기대하고 있던 육군 역시 전진을 멈추게 된다.
누구의 승리인가? 전쟁에 대해 전혀 아무것도 모르는 놈들의 헛소리다. 결국 이순신이 진영을 물리고 후퇴했으니 일본군이 이긴 것이다. 그래서 일본수군은 조선수군의 전투역량을 파괴했는가? 오히려 이순신이 일본수군함대의 상당수를 파괴함으로써 이후의 행동에 자유를 빼앗고 있었다. 누가 이겼을까?
별 희한한 소리를 지껄이는 놈들이 다 있다. 전투란 그런 것이다. 때로 병력을 보존하여 후퇴하는 것이 승리보다 더 가치있는 행위로 여겨지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전력이 보존되어 있다면 적은 아직 승리한 것이 아니다. 하물며 적선 가운데 상당수를 파괴한 다음이다.
전술적으로든 전략적으로든 명량해전은 조선수군의 결정적인 승리 가운데 하나다. 그것을 인정하지 못하는 것은 그저 알지 못하는 자의 허튼 자만이라 할 수 있다. 웃기는 것이다. 말할 가치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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