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사회

신해철 - 한국사회의 위선과 싸우려 했던 남자...

까칠부 2014. 10. 28. 23:49

신해철이 떠났다는 소식은 벌써 어제 들었다. 하지만 쓸 말이 없었다. 무어라 말해야 할까? 남들처럼 그냥 명복을 빈다는 한 마디로 끝내고 싶지 않았다. 그를 수식할 단 한 마디...

 

그러고 보면 서구의 락은 기성세대의 위선에 대한 청년세대의 저항에서 시작되었다. 빌어먹을 꼰대들에 의해 엉망이 되어 버린 세상을 바꾸고 싶다는 열망이 락이라는 분출구를 찾게 되었다. 아쉽게도 한국사회에서는 단지 음악적 양식으로서만 수입되고 있었다. 들국화도, 부활도, 시나위도 기성의 권위에 대한 도전에는 소홀했다. 그나마 있다면 서태지와 신해철이 아니었을까.

 

그의 분노를 불러일으키는 직설적인 말투도, 항상 그를 얕잡아 보게 만드는 솔직하고 저속한 행동들도, 마치 명장이 검의 날을 벼리듯 치열하게 다듬어낸 음악까지. 나는 너희들과는 다르다. 나는 너희들보다 한 발 더 앞서 가겠다. 두 발 더 앞서 가겠다. 따라와주기를 바랐다. 대중이. 특히 청년들이. 그것이 90년대였다. 한계가 있다면 한국사회는 신해철이 생각한 것보다 더 비겁하고 비루했다는 것. 솔직하게. 그리고 자연스럽게. 그런데 그것이 죄가 되었다. 때로 낙인지어졌다.

 

그의 음악을 그다지 좋아하지는 않았다. 아니 선택의 여지는 없었다. 들어야 했고 따라불러야 했으니. 하지만 과연 음악인으로서 그를 좋아했는가면 그는 나와는 조금 다른 곳을 보고 있었다. 하지만 그와 같은 시간을 보냈고 같은 시대를 살았으며 같이 호흡했다. 문득 돌이켜 보면 도대체 뭐가 이리 부대끼는 것이 많은가. 신해철이 위독하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도 그가 죽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은 이유였다. 불멸이란 영원이다. 그는 영원할 것이라 아무 이유없이 믿고 있었다.

 

어쩌면 그는 어린아이였다. 하고 싶은 일은 반드시 해야 하는. 해야 할 말은 일단 하고 보는. 가리는 것도 없고 꺼리는 것도 없고 하지만 자유롭지는 못했다. 항상 무언가가 그를 옭죄는 듯했다. 보는 것과는 달리 그리 강한 사람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가 부딪혀야 하는 현실이 그를 강하게 만들었을 뿐.

 

술을 한 잔 했다. 취기가 조금 올랐다. 다시 그의 음악을 듣고 싶지 않다. 다 큰 남자가 우는 것도 꼴불견이다. 바로 어제까지 같이 숨쉬던 누군가가 이제는 다시 없는 사람이 되었다는 의미는 무엇일까. 어느날 문득 떠올릴 것이다. 아, 그는 갔구나... 무심하고 무정하게도. 나보다 먼저 저 먼 길을 떠나고 말았구나.

 

나이를 먹는다는 것은 떠나보내는 것이 익숙해진다는 뜻이다. 하지만 아무리 해도 익숙해지지 않는 것이 바로 떠나보내는 것이다. 그저 삼키는 것이다. 꾹꾹. 이해하는 척 하면서. 다 아는 척 하면서. 웃으며. 웃으며.

 

다시 말하지만 명복따위 빌고 싶지 않다. 거기 가서도 그리 편하게 살 팔자는 아니다. 싸우겠지. 부딪히겠지. 음악은 놓지 못할 것이다. 언젠가 그 음악을 들을 날이 올까. 잘 가라. 빌어먹게도. 취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