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

미생 - 신입사원 장백기, 회사가 필요로 하는 일을 한다

까칠부 2014. 11. 10. 04:14

많은 영웅들이 부모없이 세상에 태어났다. 하늘에서 내려오거나, 땅에서 솟거나, 아니면 사람이 아닌 무언가를 부모로 두고 태어나거나. 부모가 있어도 어려서 이미 부모는 사라져 있다. 혹은 버려지고, 혹은 남겨지고, 단지 부모없이 누군가에게 거두어져 길러진다. 내가 처음이다. 내가 시작이다. 모든 것은 나로부터 비롯된다.


역시 많은 신입들이 착각하는 부분 가운데 하나다. 자기가 무척 대단하다고 생각한다. 배워야 할 것들은 이미 다 배웠다. 굳이 배우지 않더라도 자기라면 모두가 원하는 결과를 만들어낼 수 있을 것이다. 아니 오히려 다른 사람들이 자기를 배워야 한다. 하지만 현재란 과거의 누적이다. 지금 이 순간에도 자기와 똑같은 생각을 하는 사람이 최소 10명은 된다. 아무리 새롭고 놀라운 아이디어라 사람들 앞에 내놓아도 지난 시간 동안 그와 똑같은 생각을 한 사람 역시 최소 10명은 넘어갈 것이다. 그런 아이디어들이 분석되고 보완되어 마침내 결과를 내놓았을 때 사람들은 그것을 실적이라 말한다. 그 위에 지금의 자신이 있는 것이다.


회사에서 요구하는 양식과 방식을 몸에 익힌다. 영업팀에는 영업팀의 방식이, 자원팀에는 자원팀의 방식이, 철강팀에는 철강팀의 방식이 있을 것이다. 단순문서작업이라도 결국 업무에 필요하니까 시키는 것일 게다. 업무에 필요도 없는데 전기 낭비해가며 종이 버려가며 일을 시킬 회사는 어디에도 없다. 차라리 아무 일도 주지 않고 그냥 놀린다. 부서에서 하는 일이 무엇이고, 그를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하고, 그것은 어떻게 해야 하고. 서류에서 오류를 찾아내어 바로잡으려면 먼저 서류를 완벽히 이해하지 않으면 안된다. 양식화된 문서를 이해하는 것은 상당한 훈련과 경험이 필요한 작업이다. 먼저 제대로 읽을 줄 알아야 제대로 쓸 수도 있다. 기지도 못하면서 뛰려고 한다. 철강팀 강대리(오민석 분)는 정말 좋은 선배다. 건방지고 무례하기 그지없는 고작 신입사원에게조차 한 번도 말 한 마디조차 함부로 하는 법이 없다.


필요한 일을 한다. 회사가 필요로 하는 일들을 한다. 어쩌면 오상식(이성민 분) 과장이 그렇게까지 자신의 신념을 지키려 애쓰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을 것이다. 자기가 사라진다. 회사에서 자기의 존재가 지워진다. 자기란 곧 부모에게 자식이며 아내에게 남편이고 자식에게는 부모가 된다. 가정에서마저 자기를 지워버린다. 하기는 오상식이 아니더라도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 각자 반드시 지키고 싶은 어떤 선은 가지고 있을 것이다. 그것이 곧 자기를 자기이게 하는 경계다. 하지만 그렇더라도 회사로부터 월급을 받는 이상 회사가 요구하는 최소한의 일은 해내지 않으면 안된다. 과장으로서 부하직원에 대한 책임감도 있다. 김동식(김대명 분) 대리에 대한 염려로 오상식은 그토록 거부하던 일을 어쩔 수 없이 떠맡게 된다. 그래도 어떻게 해서는 신념은 지키려. 한석률(변요한 분)과 안영이(강소라 분)까지 동원한 1차에서 접대를 끝내기 위한 접예행연습은 재미있으면서도 그래서 어딘가 아릿한 슬픔이 느껴진다. 그래도 꼭 이렇게까지 해야 하는가.


그래서 안영이는 기꺼이 자기가 통과시킨 기획서임에도 단지 허드렛일만을 맡겠다 자원하고 있다. 안영이가 자신의 상사인 하대리(전석호 분)를 거부하는 방법은 아주 간단하다. 장백기(강하늘 분)처럼 회사를 그만두면 된다. 회사를 그만두고 다른 회사를 알아보면 된다. 하지만 하대리와 공존하기 위해서는 먼저 하대리에게 필요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 반드시 필요한 존재로서 인정받을 수 있어야 한다. 과장은 이미 안영이를 인정했다. 온전히 받아들이지는 못해도 그녀에게 일을 맡길 수 있을 정도는 되었다. 같이 일을 하고 싶다. 안영이에게도 자기의 일을 맡기고 싶다. 하기 싫은 일도, 신념을 거스르게 되는 일도, 그래서 온 몸과 마음이 찢기고 부서지고 망가져가면서도 그래도 자기에게 주어진 일이니 한다. 할 수 있는 일이면 한다. 그래도 자신의 신념과 업무를 모두 만족시키며 지킬 수 있었던 오상식은 얼마나 대단한가. 대개 어느 한 순간 꺾이고 부러지며 잊어버리고 만다. 그것이 신념이 된다.


사실 장그래(임시완 분)도 그렇게 중요하게 하는 일 같은 건 없다. 허드렛일이다. 모든 업무는 오상식과 김동식이 주도하고 장그래는 뒤에서 지시한 일들만을 처리하며 보좌하는 정도다. 장그래 자신도 그다지 욕심을 내지 않는다. 아마 고졸과 명문대라는, 그리고 이미 한 번 실패와 좌절을 경험해 본 사람과 성공만을 경험해 온 사람과의 차이일 것이다. 하지만 그래서 인정받았다. 업무를 위해 함께 일할 수 있는 동료로서 인정받았다. 얼마나 대단한 일을 하고 있는가 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다. 그들 가운데 자신의 자리를 만들 수 있느냐가 중요한 것이다. 더 대단하고 중요한 일들은 그때 가서 모두의 신뢰와 기대가 있을 때 기회를 노려 해봐도 좋을 것이다. 안영이도 그렇게 오늘도 싸우고 있다. 장백기는 도망친다. 하기는 잘 도망치느 것도 전쟁에서 필요한 기술이기는 하다. 이길 수 없는 싸움은 고집하지 않는다.


동료라는 것일 게다. 그렇게 아웅다웅해도 결국은 오상식이 신입사원이던 시절부터 십수년을 함께 온갖 일들을 겪으며 지내온 같은 회사의 동료인 것이다. 인간으로서의 정과 의리가 있다. 어떻게 보면 회사에 그다지 필요한 타입의 직원은 아니다. 일을 가린다. 하라는 일은 안하고 하지 말라는 일만 골라서 한다. 사소한 것부터 기본적인 지시를 무시하거나 외면하고 있다. 하지만 그럼에도 업무 3팀에는 오상식 과장이 있다. 그곳이 바로 오상식 과장의 자리다. 인정받지 못한 동료란 없다. 결국 오상식 과장은 또 한 번 성과로서 자신의 가치를 증명한다. 집으로 돌아가는 발걸음이 가볍고 즐겁다.


신입사원치고 지나치게 뛰어나고 능숙한 안영이의 과거가 드디어 밝혀지려 한다. 오상식 과장도 모르는 접대의 요령까지 줄줄이 꿰고 있다. 역시 남자든 여자든 어느 정도 그늘이 있고 비밀이 있어야 매력있다. 그러고 보면 장그래는 차라리 나레이터에 가까울 것이다. 감정의 폭이 좁다. 항상 침착하고 냉정하다. 관찰자의 입장에 있다. 아직 새로운 직장에 다 적응하지 못한 것일까. 물론 드라마를 끌어가는 것이 장그래 자신의 나레이션이기도 하다.


안쓰러우면서도 그립고, 안타까운데 한 편으로 얄밉다. 그래도 그런 정도 자신감과 야망은 있어야 성취동기도 강하고 성장도 한다. 하필 철강팀이다. 하지만 어쩌면 그것은 장백기가 가진 단점들을 보완할 수 있는 기회가 되어줄 지도 모른다. 성급하면 넘어진다. 많이 넘어지고 나야 넘어지지 않고 곧잘 걷는다. 작게 넘어지는 것이 중요하다. 공감하게 된다. 재미있다.


http://www.stardailynews.co.kr/news/articleView.html?idxno=438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