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기가 결코 쉽지 않다. 지원도 없다. 보급도 없다. 자기 혼자 적진에 남겨졌다. 살아남아야 한다. 진창을 구르고, 오물에 몸을 담그고, 온갖 수모와 굴욕을 견뎌야 한다. 지금 이 회사를 그만둔다면 어디로 갈 수 있을까? 더구나 무엇도 보장되지 않는 알몸의 계약직이다.
정규직 - 아니 그조차도 바라지 않는다. 그저 계약연장만 할 수 있으면. 계약이 종료된 뒤에도 지금의 직장에서 계속해서 일할 수 있었으면. 그것만을 바라고 어떤 무리한 요구에도 싫은 소리 한 번 해보지 못하고 그저 자신을 죽인다. 그리고 그러다가 마침내 현실의 자신마저 죽여 버리는 적지 않은 사례들을 미디어를 통해 접하게 된다. 그래도 장백기(강하늘 분)는 정규직이니 감히 상사에게 목소리도 높일 수 있다. 물론 한석률(변요한 분)처럼 어설프게 덤볐다가는 자신만 부서질 뿐이다. 그래도 고용은 보장된다.
현실에서도 흔히 보고 듣게 되는 장면이다. 박과장(김희원 분)이 장그래(임시완 분)에게 아무렇지 않게 함부로 대할 수 있는 것도 바로 그래서다. 김동식(김대명 분) 대리는 사람이 좋다. 오상식(이성민 분) 역시 좋은 사람이다. 같은 정직원인데도 신입이고 여성이라는 이유만으로 잡일이나 시키려는 하대리(전석호 분)를 비난하던 과장마저 어느새 안영이(강소라 분)에게 책상을 닦도록 하는데 익숙해진다. 정직원이야 앞으로도 계속 회사에서 얼굴을 보게 될 사람들이라지만 계약직은 계약이 끝나면 더 이상 볼 일이 없다. 같은 사무실에서 같은 일을 한다고 동료가 아니다. 같은 인간이 아니다.
일을 잘하는 것이 오히려 기분나쁘다. 요구한 서류를 바로 작성해 제출하고, 전문용어 역시 이미 완벽하게 숙지하고 있다. 심술을 부린다. 장그래의 약점으로 여겨지는 영어로 철저히 그를 짓밟고 비웃으려 한다. 박과장이나 하대리나 동기는 같다. 정직원과 계약직은 다르다. 대졸과 고졸은 다르다. 하물며 고등학교도 졸업하지 못하고 검정고시를 봤다. 남성과 여성도 다르다. 신분사회에서 비천한 신분으로 남다른 재능을 보여봤자 그것이 오히려 죄가 되고 마는 것이다. 같은 인간이었다면 부러움과 질투의 대상이 되었을 테지만 인간이 아니기에 그것은 분노의 대상이 되고 만다. 응징하고 바로잡아야 한다. 어떤 경우에는 단지 글을 읽고 쓸 줄 안다는 이유만으로 평범한 사람들에 의해 당연하게 잔인한 죽음으로 처벌받고는 했었다.
그것은 어쩌면 단지 자기기만에 불과할 것이다. 그렇게 믿고 싶은 것이다. 지는 것이 이기는 것이다. 참고 견디는 것이 결국 상대를 이기는 것이다. 이길 수 없기 때문이다. 어떻게 해도 상대를 이길 수 없음을 알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차라리 순응한다. 부당하고 불합리한 현실을 받아들인다. 36계에 나오는 가치부전(假痴不癲)이 바로 그것일 터다. 차라리 바보가 돼라. 미친 사람이 되지 마라. 세상이 모두 틀렸는데 자신만 옳다면 그것이 곧 틀린 것이다. 모두가 틀렸을 때 같이 틀렸다면 단지 같은 바보가 되었을 뿐이다. 밀면 미는대로, 당기면 당기는대로. 장백기는 정말 운이 좋다. 그를 이해시키고 납득시키려는 상사가 같은 회사에 무려 둘이나 있다. 부서가 다른 과장 한 사람과 자신의 직속인 강대리가. 정말 부럽다. 그런 상사는 정말 드물다.
살아남기 위해서. 팀의 일원으로 받아들여지기 위해서. 장그래에게 그것은 생존이다. 장백기와 안영이, 한석률에게 그것은 자존이다. 같아 보이지만 계약직과 정규직의 사이에는 그같은 메울 수 없는 크고 깊은 골이 존재한다. 어떻게든 살아남아야 하는 장그래는 절박하고, 인간으로서 자신의 가치를 인정받으려는 장백기 등의 바람은 간절하다. 결국 둘 모두 처절하다. 삶이란 전쟁이다. 그들은 이제 막 전장에 섰다. 바둑은 누가 먼저 시작했든 상대가 손을 떼면 바로 자신의 차례다. 그러나 현실의 전장에서는 내가 두기 시작하고서야 겨우 내 차례가 돌아온다. 주어진 시간 만큼 능력만큼 많은 수를 먼저 둘 수 있다. 전쟁에서는 늦으면 늦은 만큼 불리한 것이다. 실력마저 뒤진다면 남는 것은 인정에 호소하는 것이다. 숙이고, 굽히고, 사정하고, 구걸하며, 어떻게든 살려달라고 빌어야 한다. 방법은 다를 뿐 장백기도 다르지 않다. 그가 간절히 바란 것은 단 하나, 자신에 대한 인정이었다. 드디어 인정을 받았다.
결국은 기본이다. 룰이고 표준이다. 그것은 그 집단의 언어다. 최소한의 비용과 노력만으로 최대한의 정보를 전달할 수 있도록 한다. 언제 어디서 누가 보게 되더라도 최소한의 손실만으로 작성자의 의도를 최대한 정확하게 전달할 수 있도록 규칙을 정한다. 규칙에 충실한 것을 질서라 말한다. 고작 지인 몇이 의기투합해 시작한 벤처기업의 사무실이 아니다. 이미 어쩌면 평생 얼굴 한 번 볼 일 없는 수 천의 직원들이 다지 문서만으로 서로의 존재를 확인해야 하는 대기업이다. 더구나 한 번 작성한 문서는 파기되기까지 자료로서 보존되며 필요할 경우 다양한 용도로 활용하게 된다. 과거에 작성된 문서의 작은 실수 하나가 지금 하는 일에 중대한 오류를 만들 수 있다. 신수나 묘수를 잘두어 고수가 아니라 실수가 적기에 고수다. 바둑에서도 두어야 할 곳에 실수없이 둘 수 있기에 그를 고수라 부르는 것이다. 일을 잘한다는 의미다. 새로운 훌륭한 기획보다 기본적인 업무에서 실수가 없을 때 업무적으로 신뢰하게 된다. 자기에게 가장 필요한 것을 가장 중대한 고비에서 비로소 장백기는 깨닫게 된다. 비로소 자기가 일개 신입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차갑게 깨닫게 된다. 성장한다.
참 비루하다. 그토록 대단해 보이던 안영이도, 그렇게나 자신만만하던 장백기도, 사회생활과 대인관계에 자신있어하던 한석률도, 하기는 장그래는 그나마도 없었다. 가장 밑에서부터 한 발 한 발 딛고 올라가야 한다. 꺾이고 찢기고 부서진다. 너덜너덜한 잔해만이 남았다. 힘겨워 주저앉아 있다. 그것이 신입사원이다. 사회초년생들이다. 장그래가 바둑이라는 감옥에서 갓 출소한 장기수라면, 그들은 이제 학교라는 구속에서 벗어난 장기수들일 것이다. 세상은 험난하다. 감옥만이 세상의 전부였던 장기수들에게 바깥세상은 결코 호락호락하지 않다. 결국 발이 바닥에 닿으면 그때부터 올라가면 된다. 올라갈 의지만 있다면. 장백기가 가장 빠르다. 장그래에게는 넘여야 할 높고 긴 장벽이 있다. 안영이의 시련은 끝나지 않았다.
과연 김희원이다. 보는 순간 기분이 나빠졌다. 모니터로나마 한 대 때리고 싶어졌다. 하기는 원작에서도 유일한 악역이다시피 했을 것이다. 그렇다고 아주 이해가 안되는 인물은 아니었다. 무심코 그런 생각을 하게 된다. 내가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가. 과연 내가 가치있는 일을 하고 있는가. 회사에 있어 나란 존재는 무엇인가? 장백기가 하는 고민과도 많은 부분 닮아 있을 것이다. 그래서 이직을 선택하다. 하지만 그 상태로 아무 의미도 가치도 찾지 못한 채 자신을 회사에 방치한다. 고민과 시련들이 전혀 잘못된 답을 찾아낸다. 박과장이란 어쩌면 직장생활의 어두운 그늘과도 같을 것이다. 장백기 등도 자칫 순간 잘못된 선택을 한다면 박과정이 빠진 그 함정에 빠져들 수 있다. 그렇게까지 긴 시간을 보여주지 않는다.
원작에서 보던 대사들을 드라마로 들으니 호흡이 약간 맞지 않는 것을 느낀다. 조금은 어색하고 낯설게 느껴지는 것이 있다. 만화와 드라마는 다르다. 원작을 살리면서도 드라마만의 개성과 재미를 놓치지 않는다. 드라마는 드라마로서 재미있다. 맛과 깊이가 있다. 중독된다.
http://www.stardailynews.co.kr/news/articleView.html?idxno=442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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