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

피노키오 - 김공주의 일갈, 기자의 양심은 카메라에 있다!

까칠부 2014. 12. 5. 02:58

그래서 양심이라 부른다. 양심은 선이 아니다. 정의 역시 아니다. 단지 그것을 판단할 수 있는 이성적 도덕적 기능이다. 보편적인 인간으로서 지금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은 무엇인가. 물론 그 판단과 선택이 모두 같을 수는 없다. 모든 개인의 양심은 서로 다를 수 있다.


누군가는 전장에서 적을 향해 방아쇠를 당겨야 한다. 그리고 누군가는 그 적을 살리기 위해 방아쇠를 당기려는 손을 막아서야 한다. 아직 어린아이에게조차 총을 겨누는 병사의 양심과 그 총구의 앞을 막아서는 성직자의 양심이 서로 다르지 않다. 단지 군인이고, 단지 성직자다. 전장이라는 특수한 환경에서 군인으로서 판단하고 성직자로서 선택한다. 그것을 두고 누가 옳고 그른가 판단하는 것 역시 양심의 영역이다.


얼어붙은 계단에서 미끄러져 다치는 사람들이 있다. 아마 평범한 개인이었다면 그 모습을 보고 안쓰럽게 여기며 어떻게든 돕고자 했을 것이다. 설사 행동으로 옮기지는 않더라도 어떻게든 도와야 한다는 사실을 안다. 하지만 기자다. 얼어붙은 계단에서 사람들이 미끄러지고 다치는 장면을 뉴스로 내보냄으로써 그에 대한 경각심과 대책을 유도할 수 있다. 기자의 양심은 사람들을 돕는 것이 아닌 사실을 취재하여 알리는 것에 있다. 그리고 그것이야 말로 기자로서 보다 많은 사람들을 도울 수 있는 최선의 판단일 것이다.


김공주(김광규 분)의 일갈이야 말로 이번 8회가 전하고자 한 주제 그 자체였을 것이다. 빙판길에서 넘어져 다치는 사람들이 있다. 그것을 단지 카메라에 담고자 지켜보고만 있는 기자들이 있다. 그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것으로 전부인가. 어째서 카메라만을 고정시킨 채 돕지 않고 가만히 있는가. 기자이기 때문이다. 기자가 할 수 있는, 기자가 해야 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것이 기자의 양심이며 사명이다. 거짓 역시 진실을 위한 훌륭한 수단이 되어 줄 수 있다. 오로지 진실만을 추구한다면 최인하(박신혜 분)도 언젠가는 거짓말을 할 수 있게 될까?


뉴스란 비일상이다. 일상에서 벗어난 것들이 뉴스가 된다. 그 가운데 유독 사람들의 눈길을 끄는 것들이 미디어를 통해 세상에 알려진다. 항상 새롭고 다르고 특별하다. 그런데 과연 그 뉴스의 당사자라면 어떤 느낌일까? 전쟁이 일어나지 않아도 군인은 전쟁억지력으로서 그 의미를 갖는다. 불이 나지 않아도 소방관 역시 혹시 일어날지 모르는 불을 대비함으로써 가치를 갖는다. 하지만 보도할만 뉴스가 없는 기자란 어떤 의미와 가치를 가질까. 무엇도 대비하지도 예방하지도 못한다. 그냥 사건이 일어나면 그것을 뒤쫓아 뉴스로 내보낼 뿐이다. 설사 누군가에게는 불행일지라도 오늘도 뉴스거리를 찾아 헤매며 기다린다. 기도한다. 혹시라도 자기가 보는 앞에서 큰 뉴스거리가 하나 생겨나기를. 어떤 것이든.


하기는 그래서 기자는 '기레기'라 불리게 된 것인지도 모른다. 없는 뉴스를 만든다. 뉴스거리가 아니더라도 어떻게든 과장하고 왜곡해서 뉴스가 되도록 만든다. 뉴스가 있을만한 곳들만 찾아다닌다. 뉴스를 위해 나머지는 아무렇지 않게 외면하고 무시한다. 과거 송차옥(진경 분)이 최달포(이종석 분)의 가족들에게 그랬던 것처럼. 뉴스를 위해 사실을 왜곡하고 진실을 외면했다. 결국 잘못된 보도로 인해 어머니와 아직 어린 아들이 바다로 뛰어내린 현장에서도 보다 자극적인 장면을 카메라에 담기 위해 궁리하는 모습만을 보이고 있었다. 바로 앞에 가족을 모두 잃고 혼자서 울부짖는 남은 가족이 있었다. 송차옥이 지금의 위치에까지 이를 수 있었던 가장 큰 비결이었다. 어떻게 해서든 사람들이 보고 싶어 할만한 뉴스를 만들어 내보낸다.


자기 눈앞에서 큰 사건이 일어나기를. 물론 그래서는 안된다는 것을 알고 있다. 하지만 기왕에 일어날 사건과 사고다. 기왕에 일어날 것이면 자기가 대기하고 있는 앞에서 일어나 온전하 카메라에 담을 수 있다면 큰 뉴스가 될 수 있을 것이다. 행운이다. 다른 사람의 불행을 자신의 기회로 삼는다. 정의감이나 양심 이전의 문제다. 기자라고 하는 그들의 정체성이다. 그 앞에서 그림이 되는 큰 사건이 일어난다. 최달포의 친형 기재명(윤균상 분)이 모는 트럭이 미끄러지며 주저앉아 있는 다리다친 학생을 향해 달려드는 트럭을 멈춰세운다. 하필 기재명이다. 최달포는 벌써 기재명의 행위를 거의 확신에 가깝게 눈치채고 있다.


가족으로서의 인정과 기자로서의 양심이 서로 충돌한다. 죄를 지었어도 가족이다. 사람을 죽였어도 형이다. 아버지를 9명이나 되는 소방관을 죽음에 이르도록 만든 살인자라고 모두가 매도할 때도 기재명 역시 그 모든 것들이 사실이더라도 그저 아버지가 살아있기만을 바라고 있었다. 차마 다가가지 못한다. 자신을 털어놓지 못한다. 어쩌면 사람을 죽였을지 모른다. 3명이나 사람을 죽인 살인자일지도 모른다. 그것을 취재해 밝혀야 한다. 하지만 가족이기에 그럴 수 없다. 가족이 아니었어도. 혹은 기자가 아니었어도. 기자인 최달포는 형 기재명에게 자기가 동생 기하명이라는 사실을 밝히지 못한다. 기자로서 용의자로서만 서로 만난다.


기재명이 피를 흘려가며 다리를 다친 어린 학생을 구한다. 그러나 이미 그는 사람을 죽이고 있었다. 최인하는 사람을 구하는 기재명을 보았고, 최달포는 어쩌면 사람을 죽였을지도 모르는 기재명을 알고 있다. 둘 다 사실이다. 그렇다면 진실은 무엇인가. 엇갈린다. 무엇이 진정 가치있는 진실인가. 선택해야 한다. 선택의 순간이 다가온다. 그곳에서 모두가 보게 될 풍경은 과연 무엇일까. 남을 구하기 위해 위험마저 무릅쓰는 선량함이 죄를 짓고야 말았다.


아무튼 사실이나 진실이 아닌 양심에 반응한다는 점은 신선했을 것이다. 거짓과 진실을 판단하는 기준이 바로 자신의 양심이다. 틈이 보인다. 그러면 양심이 시킨다면 거짓말도 얼마든지 할 수 있다. 인간은 너무나 쉽게 자기를 믿어 버린다. 거짓도 진실이 된다. 흥미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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